2015년 5월.
영국의 코츠월드라는 곳에 갔을 때, 난 누군가로 인해 초여름 나뭇 잎처럼 산들거렸는데. 그 때. 짧고도 강렬한 감정을 바탕으로 적어내려간 소설 한 자락. 그 때의 감정도 사람도 사랑도 사라졌지만, 이 소설은 완성될 수 있을까. 세상에 얼굴을 내밀어 본다.
기숙사로 올라가는 샛길이 보이는 도서관 이층 창가, 오월의 햇살이 여자의 짧은 머리에 내려앉았다. 엷은 청 스커트에 하얀색 블라우스, 연노랑 스웨터를 어깨에 살짝 걸친 여자의 피부는 조금 하얗고 얼굴은 마른 편이다. 손가락으로 글자를 가만가만 짚어 가며 읽어 내려가던 여자는 책 속의 인물에 심취해 있다. 가느다랗고 긴 손가락은 까맣고 윤이 나는 여자의 머리카락과 대조적으로 하얗게 반짝거렸다. 햇살이 파도를 산산이 조각내는 듯한 눈부심에 맞은편에 앉은 다른 학생에게는 신경이 거슬렸지만 여자에게는 그저 희미한 빛의 흔들거림으로 밖에는 느껴지지 않았다.
여자는 책을 읽다가 무언가 생각에 멈춰 설 때면 검지와 중지를 톡톡 내려치고서 손가락을 멈춰 세우는 버릇이 있다. 눈을 감고서 여자는 골몰하게 남자를 생각했다. 유년의 남자는 누이와 까르르 웃으며 물장구를 치고 있다. 남자의 엄마로 추정되는 중년의 여성이 카메라를 들고 책 이편의 여자에게 곧 사진을 찍을 테니 웃으라는 눈짓을 한다. 찰칵. 순간 여자는 멈칫하고 눈을 번쩍 떴다. 여자의 갈색빛 동공은 갈 곳을 잃은 듯 초점이 없다. 정신이 번쩍 든 여자는 이윽고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방금 전 읽은 것을 상상했다고 하기에는 책 속의 그들이 너무도 생생하게 다가왔기 때문이다. 흑백 사진 속의 남자는 장난기 그득한 웃음을 머금고 여자를 향해 웃고 있었다. 토옥 톡 손가락을 내려치며 여자는 생각한다. 지금 남자가 가진 따스한 웃음은 그가 어린 시절부터 지녀온 것이구나, 하고.
드르륵드르륵. 여자의 왼손에 찬 까만색 손목시계가 오후 5시 12분을 알렸다. 이제 겨우 책의 앞부분을 읽었을 뿐인데 이 책을 마저 읽고 싶은 욕망이 여자의 온몸을 휘어 감았다. 7시가 되면 남자가 올 것이다. 그전에 여자는 눈을 감고서 남자가 걸어오는 길을 짚어 내려갔다. 길게 늘어선 돌담이 다소 느린 걸음으로 지나갔다. 채 떨어지지 않은 태양의 빛줄기가 나뭇잎 사이로 고개를 내밀었다 숨기를 반복한다. 부드러우면서도 활기찬 남자의 발걸음이 흔들거렸다. 여자의 길고 가느다란 손은 돌담을 쓰다듬으며 남자의 발걸음을 쫓았다. 길의 코너에 다다랐을 때 남자의 발걸음이 다소 빨라졌고 여자는 남자를 놓칠 새라 다소 빠르게 손가락을 짚어 나갔다. 다시 남자의 발걸음이 보인다. 남자는 전에 없는 하얀 미소를 지으며 멀리 남자를 기다리는 또 다른 여자에게 손을 흔든다. 순간 나뭇잎 사이로 비친 강한 햇살에 눈이 부신 여자는 앞을 볼 수 없다. 여자의 가슴은 쿵, 하고 떨어졌다. 멀리 보이는 또 다른 여자의 형체를 알아보기 위해 여자는 안간힘을 썼지만 햇볕이 너무 강렬한 나머지 눈을 뜨지 못하는 것이다. 온 세상이 빛에 반사되어 하얗다.
드르륵드르륵. 여자의 시계가 7시 정각을 알렸다. 여자는 보이진 않지만 어스름한 저녁의 차가운 공기를 느꼈다. 토옥 톡. 여자는 입술을 꾹 다문 채, 책을 읽다 만 손가락을 내려친다. 이윽고 여자는 눈을 꾹 감은 채 검지를 길게 늘어뜨리고, 남자가 사라진 돌담에 또박또박 글씨를 새겼다.
‘나는 너를 탐독한다. 우리가 만난 이전의 시간에 대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