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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ne Joy May 23. 2020

우리 진국씨

남편은 대학 동문인데, 학교 다니는 동안에는 한 번도 마주친 적이 없었다. 그는 컴퓨터를 전공해서 심리학과 사회복지를 전공하는 나와 동선이 전혀 겹치지 않는 데다가 창업보육센터에 위치한 학술동호회 동방에서 속세와 인연을 끊고 사는 아싸(outsider)였다. 군중에게 드러나길 원치 않았고 자신만의 세계에 몰입하여 사는 자,


그렇다. 그는 회색 남자였다!

결혼 후 그가 살이랑 머리카락만 빼고 모두 회색으로 단장한 모습을 보고 경악했다. 아무리 회색을 좋아해도 그렇지 팬티, 티셔츠, 후드 집업, 바지, 양말까지 회색으로 깔맞춤 할 것은 무엇인가! -회색 모자를 쓰지 않은 점에 감사한다.- 더 놀라운 건 그 모습이 잘 어울린다는 것이다.

회색을 위한 회색에 의한 회색의 남자!!!


좋아하는 색부터 노랑, 연두, 분홍, 화사하고 총천연색인 나는, 전혀 다른 세상에 사는 그의 매력에 푸욱~ 빠져들었다. 이상형은 키 크고 재미있는 남자였는데, 그 '재미있는' 부분이 압도적이어서 '키 큰' 부분을 포기하기로 했다.


조금 있으면 큰 아들 절친의 생일이다. 이 이야기를 위해서 그의 실명을 밝힐 수밖에 없는데, 이 곳의 많은 아이들이 그렇듯 성경인물 중 하나의 이름을 갖고 있다. 아론, 이라고. 성경 속 아론이 실제 어떤 사람이었는지 모르겠으나 우리의 아론은 푸근한 얼굴형에 동그랗고 촉촉한 눈망울, 인절미 같이 하얗고 보드라울 것 같은 피부(직접 만져 본 적은 없다), 굵은 웨이브의 브론즈 헤어, 커다란 덩치와 그에 걸맞는 식욕, 외모만큼이나 푸근하고 부드러운 성격을 가진 인물이다.


저녁 식탁 앞에서 진국씨가 물었다.
"아론은 무슨 선물 받고 싶대?"
첫 째, "몰라~"
나, "아직 못 물어봤어~"
진국, "지팡이 갖고 싶대?"


모두 웃을 지어다!!!!



그는 사골국물로 만든 모든 국물 요리를 좋아하는데, 어렸을 때 그의 어머니께서 자주 사골을 우려 그 국물로 다양한 국을 끓여주셨다고 한다. 그 때문인가 생각해 보지만 사실 그는 국물까지도 고깃국물이길 원하는 뼛속까지 육식 애착형 인간인 것이다. 스스로 채소를 좋아한다고 주장하기 위하여 좋아하는 음식 리스트에 '산채 비빔밥'을 넣곤 하지만 10여 년간 같이 지내면서 산채비빔밥이 먹고 싶다고 말하는 걸 들어본 적이 없다. 그에 반해 "아, 삼겹살 좀 먹어야겠는데?" 나 "오늘은 라면이 증말 먹고 싶다." 하는 말은 습관처럼 달고 다닌다.
한국에서 살 때야 거의 일일 일 고깃국이었을 거다. 매일 야근을 하며 먹는 저녁과 야식에 돼지국밥, 순대국밥, 감자탕 등의 메뉴가 꼭 들어가는 듯했다. 독일로 넘어오면서 기껏 해야 가끔 끓이는 미역국과 일 년에 한 번 끓일까 말까 하는 소고깃국으로 그의 고깃국 욕망을 채우기는 턱 없이 부족했다. 그래도 뭐 어쩌겠는가, 여기는 돼지 국밥집이 없는 걸.


그러던 어느 날 마트에 소뼈 파는 걸 본 그에게 전광석화와 같은 아이디어가 떠오른 것이다. 사골을 우릴 수 있겠구나!!!!

정성껏 우려내는 중인 꼬리


실행에 옮기기 위해서 커다란 사골 냄비 구입, 소꼬리 뼈와 잡뼈 다량 구매, 외곽에서 진국으로 호까지 바꾸고(그는 늘상 자신의 호를 스스로 짓곤 하는데, 이번엔 진국인 것이다) 뼈 고는 남자가 되었다. 아이들도 사골국을 꽤 좋아해서 한 번 우려내면 서너 끼는 쭉 그 국에 밥 말아먹고 남은 국물은 미역국, 떡국 끓여 먹고 그래도 남으면 육수가 조금이라도 필요한 요리에 넣어 먹곤 한다. 매끼 밥을 해야 하는 입장으로선 진국 선생의 탄생을 기뻐하는 바이다.



그의 세계와 조우는 흥미로웠다. 역사, 정치, 천문, 야생, 음악, 스포츠(특별히 야구와 농구), 컴퓨터.. 그의 관심사는 다양하고 폭넓었지만 겹치는 부분이 하나도 없었다. 사람, 인권, 환경, 음악, 드라마, 문학, 문학, 그리고 문학인 나의 관심사가 너무 좁은 건가 싶기도 하고. 그나마 겹치는 음악도 듣는 취향이 완벽하게 달라서 고음에 능한 가수들의 음악을 좋아하고 주로 듣는 편이고, 가사는 거의 듣지 않는 거나 마찬가지인 반면 내 취향은 어쿠스틱하고 잔잔한 음악을 좋아하고, 그 가사가 얼마나 시적이며, 상황과 감정을 어떻게 표현했는지에 매우 집중하며 듣는 편이다.


그에게 가사는 단지 음을 내기 위한 수단일 뿐임을 이적의 [다행이다]를 흥얼거리는 장면에서 알 수 있는데,


그대를 만나고~ 그대의 머릿결을 만~질 수가 있어서~
... 거친 파란불에도 나는 달려가리라~


으응? 거친.. 파란불은 어떤 불인가, 어디로 달려가려는 것인가?


끝도 없이 달려가는 그의 파란불 인생은 나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쳐왔고 앞으로도 그럴 예정이다. 그래서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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