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집안일이 너무 힘드네.
우린 집안일 10년을 해도 취미가 안 붙나벼.
마음이 잘 통하는 친구에게 또 하소연을 해 봤다. 주부라면 겪을 수 있는 집안일 권태기. 권태기라고 하기에는 빈도가 너무 잦아서 민망할 정도다. 결혼을 하려고 하던 일을 그만두고 지방으로 내려오면서 최선의 선택이라 확신했다. 아이를 낳고 기를 때 어른들은 “그래, 애는 엄마가 키우는 게 좋아”라며 칭찬하셨다. 그 칭찬이 얼마나 해묵은 고정관념인지 몰랐고, 그래서 정말 그런 줄로만 알았다. 엄마가 키우는 게 최고라고. 현실적으로는 아이를 맡길 만한 곳도 없었고, 육아 도우미를 쓴다고 생각했을 때는 전혀 수지가 맞지 않았다. 아가씨 때 아이 키우는 문제로 고민하시던 엄마인 직장 선배들의 고충을 그때는 절감하지 못했다.
첫째가 어린이 집에 적응하고 둘째가 생기기 전, 잠깐 직장 생활을 했는데, 함께 일하는 사람들이 천사 같았고, 출퇴근 시간 8시에서 5시 칼 퇴근 보장되는 꿀 직장이라 정말 행복했다. 일이 몸에 익고 담당인 회계 업무를 넘어 사업을 기획하고 운영하는 것 까지 슬슬 하기 시작할 때쯤 둘째가 생겼다. 엄마가 된 이후 처음 느껴보는 충만감이어서 포기하기 싫었다. 안될 걸 알면서도 육아휴직을 제안해 봤다. 숙달된 직원 하나를 잃고 또 사람을 구하는 일이 상사들 입장에서도 번거로운 일이었는지, 이사회에 회부하기도 했지만, 작은 복지재단의 현실적인 문제에 부딪혀 결국 휴직 대신 퇴직을 선택해야 했다. 그걸 선택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아기를 포기할 순 없는 노릇이니까.
주부의 세계는 끝없는 반복으로 소진되는 나를 견디고 또 견뎌야 하는 세계이다. 집안일 자체에 즐거움과 보람을 느끼는 사람도 분명 있겠지만, 또 직장에서도 비슷한 감정을 느끼는 사람들이 있겠지만, 가사노동의 근본적인 문제는 외적 보상이 없는 것이다. 끊임없이 내적 보상을 찾아 스스로 충족감을 느껴야 하는데, 그게 생각만큼 쉬운 일이 아니다. 하는 일이라는 것은 매일 반복되는 단순 육체노동인데, 하고 돌아서면 원상 복귀되는 매직의 구렁텅이에 빠져 허우적거리다 잠자리에 들 때쯤에야 겨우 빠져나올 수 있다. 그나마 창의성과 생산성이 돋보이는 것이 먹는 것을 만드는 일인데, 들이는 에너지에 비해 이슬과 같이 사라지는 찰나의 성취감일 뿐이다. 소진은 점점 나를 갉아먹게 되는데 그러한 연유로 수많은 가사노동자 들은 잦은 탈진과 권태를 겪을 수밖에 없다.
택배로 음식 보내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대부분 근처에서 살 수 있는데 굳이 사고 싸고 부치고의 과정을 거쳐 택배비를 낭비하는 것이 마뜩잖아서이다. 한국 있을 때는 시가에서만 택배를 받았다. 부모님은 차로 한 시간 반 걸리는 옆 도시에 사셔서 이것저것 바리바리 싸들고 자주 찾아오셨다. 한국에 살 때는 밑반찬이 떨어지는 날이 없었다. 각종 김치, 멸치 볶음, 계란 장조림, 소고기 장조림, 각종 죽, 시금치나물, 콩나물, 무나물, 도라지나물, 고추장 볶음, 직접 만드신 누룽지에 핫도그, 훈제 오리고기, 수제 어묵 등의 냉동식품까지 시어머님은 택배로 엄마는 직배송으로 매 번 냉장고는 그득했다. 남편은 거의 집에서 식사를 하지 못했다. 아침은 거르고 나갔고, 점심은 구내식당, 저녁은 회사 직원들과 구내식당에서 먹거나 회사 근처 식당에서 사 먹었다. 그리고 저녁식사 이후부터 다시 일과를 시작하듯 일을 했다. 아이들과 하는 끼니는 거의 양가에서 조달된 밑반찬이 주를 이뤘기 때문에 요리하는데 많은 품을 들이지 않아도 됐다. 요리하는 게 재밌기도 했지만 재미있자고 에너지를 쓰기엔 생존하는 일이 더 급급한 하루하루였다.
처음 독일에 넘어오고 나서 엄마에게 신신당부했다. 택배 보내지 말라고. 살아보니 웬만한 건 이 곳 아시아 마트나 한인 마트에서 구할 수 있었고, 좀 비싸다 손 치더라도 직접 한국에서 배송받았다 생각했을 때의 국제 우편료를 감안하면 비쌀 것도 없었다. 그래도 엄마는 걱정이 되는지 계속 확인했다.
김은 있어? 쪼꼬 유산균 보내줄까? 거기서 안 파는 거 얘기해봐. 보내줄 테니까.
1년에 한 번 독일을 방문하시면서 비행기에서 허락하는 만큼 꽉꽉 여행가방을 채워 오셨다. 아이들 옷, 내 화장품, 사위가 부탁한 책, 여기서 구하기 어려운 음식들, 우리가 먹고 싶다고 한 것들… 그리고 어느 한 해, 같이 지내면서 필요할 것 같은 물건과 여기서 구하기 어려운 음식들을 체크해 가셨다가 기어이 국제 항공 우편을 보내셨다. 그때부터였다. 엄마의 택배가 시작된 것은.
한 번 보내신 이후로 또 보내고 싶어 하시는 엄마의 마음이 여기까지 꽃내음처럼 끼쳐와서 도저히 택배비 핑계로 거절할 수 없었다. 택배는 엄마의 즐거움이자 멀리 있는 자식 손주를 돌보는 엄마의 최선인 것을 알면서 매번 거절하기도 어려웠다. 게다가 엄마가 보내 주신 택배 상자는 한인마트에서 오는 박스와는 달랐다. 이 곳에서 구할 수 있는 것들도 잔뜩 들어 있었지만, 고심하고 고심해서 뭐가 필요하려나 메모하고 하나하나 좋은 것, 싸게 파는 곳 찾아내서 사러 다니시고 직접 포장하면서 더 필요한 것이 없나 한 번 더 체크하고 무거운 박스 들고 우체국까지 찾아가 익숙하지 않은 외국어로 송장을 만들고 부모님의 마음이 상자 한가득 채워 온다. 비행기를 타고 몇 백 킬로를 날아와도 사라지지 않는 마음은 택배 상자를 열 때 확 퍼져 온 집안의 공기를 달콤하게 한다.
유난히 지치고 외로운 날이었다. 남편은 저녁 약속이 있다. 코로나 사태 이후로 남편이 처음 끼니를 집에서 먹지 않은 날이다. 날은 일주일 내내 우중충 해서 비가 왔다 갔다 하고 있었다. 한국에서도 물론 날씨 영향을 받긴 했지만, 한국은 화창한 날이 참 많아서 오히려 비 오는 게 반가울 때도 있었다. 독일의 겨울을 몇 번 지나고 나니 날이 흐리기만 하면 마음에도 구름이 잔뜩이다. 마음뿐만 아니라 몸도 직격탄을 맞아 축축 쳐진다. 독일의 4월은 종잡을 수 없는 날씨로 유명한데 올 4월은 유난히 맑았다. 그러더니 오뉴월이 되어 못다 부린 변덕을 맘껏 부리고 있다. 진작 따뜻해졌어야 하는 기온은 자꾸만 10도 근처로 떨어지고 아침에 아이들 옷은 반팔을 입혀야 할지 긴팔을 입혀야 할지 가늠하기가 어렵다. 자고로 일기예보라는 것은 빗나가는 것이 정설 아닌가? 그래도 6월은 여름의 초입인데 얼마 전엔 밖에 나갔더니 독일 사람들은 다 겨울 외투를 꺼내 입었더라. 봄 잠바를 입고 벌벌 떨면서, 이래서 이 사람들이 계절, 남의 눈 상관없이 옷을 꺼내 입는구나 생각했다.
며칠 내내 흐리면서 더 내려갈 곳이 있나 없나 살피며 허우적 대고 있는 날, 남편은 나가고, 작은 아이들이 유치원에서 돌아오기 전 오후 시간을 보낼 에너지 충전을 위해 낮잠을 잤다. 알람 소리에 비비적 대며 일어나 겨우 눈곱만 떼고 옷을 챙겨 입고 현관문을 열었는데 택배가 와 있다. 빨간 우체국 로고의 박스! 한국에서 택배가 온 것이다. 집 안으로 박스를 옮겨 집에 있던 민트에게 뜯어 놓으라 말해놓고 집을 나섰다. 흐린 날과 상관없이 몸이 날았다. 다행히 유치원의 두 녀석도 꽤나 컨디션이 좋아서 돌아오는 길이 쭈욱 늘어나지 않고 지름길 마냥 훌쩍 건너왔다. 택배에는 실로 다양한 것이 들어있었다. 좋아하는 브랜드의 스킨과 같은 곳에서 나온 여행용 기초 화장품 세트 2박스, 아이들이 좋아하는 김 - 여기서 구하기 힘든 조미하지 않은 구운 김 포함 - 잔뜩, 건 모둠해초, 다시용 팩, 액젓, 누룽지, 인스턴트 냉메밀국수와 냉면이 종류별로 들어있었다. 그리고 아이들의 면 마스크!!! 면 마스크를 만들어 봤는데, 손바느질로 하니 하루에 하나가 최대 생산량, 하나 만들고 나면 손이 아파서 다음 물량까지 한 이틀 쉬어줘야 했다. 일회용 마스크만 가지고 언제 끝날지 모르는 이 시간을 버티긴 힘들 것 같아서 시작한 면 마스크 만들기는 '정말 무리입니다'로 마무리하고 어른 면 마스크는 팔길래 샀는데, 아이들 껀 구하기가 어려웠다. 엄마가 한국에서 구했다길래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 면 마스크가 도착한 것이다!
내용물 대부분 내가 주문한 것들이지만, 그래도 이렇게 정확한 때 도착하다니, 엄마의 기운이 지친 딸을 위로하기로 작정한 것인가 싶다. 이것은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발견한 기분. 점심도 굶고 낮잠을 잔 데다 엄마의 택배를 여니 허기가 느껴졌다. 마침 오후 간식을 챙겨 먹어야 하는 아이들, 얼른 물을 올리고 인스턴트 냉메밀 봉지를 뜯었다.
엄마, 전에 해 준 것보다 더 맛있다! 엄마 요리 실력이 늘었나 봐.
능청을 떨며 국수를 흡입하는 둘째. ‘응, 그거 인스턴트라서 그래’라고 마음으로만 대답했다. 어쩌면 할머니 마음이 한 스푼 조미료로 들어갔는지도 모르지. 오랜만에 과식을 했다. 배만큼 마음도 잔뜩 불러왔다. 코로나 시대에 여행가방 미어터지게 싸들고 부모님이 언제 다시 독일을 방문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다만 엄마의 마음을 담은 상자들이 몇 번 더 대륙을 건너 날아오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