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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ne Joy Sep 03. 2021

완벽한 하루

탕약 같은 커피를 한 병 타서 얼음을 두 개 넣었다. 급하게 뛰어가서 시동이 걸린 채로 기다리고 있던 차에 올라탔다. 숨을 좀 고르고 커피를 한입 마셨다. 이 정도로 진하게 타려고 했던 건 아닌데, 농도 조절 실패다. 아무래도 오늘 겪을 분주함을 짐작한 본능이 저지른 일인 것 같았다. 오늘 오전에 해야 하는 일 두 가지가 노트에 적혀 있었고, 최대한 빨리 처리한 뒤 집안일에 돌입해야 했지만, 어느 쪽도 하지 못한 채 이사할 집으로 끌려가는 중이다. 지난 1월 말 구매한 집의 세입자가 나간 뒤로 남편은 남편과 나보다 연장자인 그 집의 벽만 세워둔 채 다 뜯어냈다. 삼 형제의 고사리손을 빌리기도 하고, 나도 가능할 때마다 가서 돕고,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인맥의 손을 빌려 봤지만, 아무래도 남편이 대부분의 일을 떠맡아야 했고, 우리의 절친, 건축가 K가 서포트했다. 독일의 인건비는 눈이 휘둥그레지도록 높아서 뭐 하나 전문가에게 맡기면 살림이 휘청한다. 이미 최대치로 끌어서 대출을 받은 상태라 아끼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몸으로 때울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철거 작업이 끝났다고 끝나는 게 아니었다. 전문가에게 맡길 수밖에 없는 개보수 작업 중에도 남편은 계속 바빴다. 50Km 거리를 - 사는 집과 이사할 집의 거리 - 수시로 오갔다. 일정을 체크해야 했고, 돈을 마련해야 했고, 너무 많은 것을 결정해야 했다. 그러는 동안 나는 생활을 유지하기 위한 모든 것을 관장해야 했다. 거기에는 한계가 없는 세 아들을 상대하는 일도 포함되어 있다.


건축가 K의 아내는 아주 애처로운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내가 왜 <집 고치는 이야기> 그만 쓴 줄 알아? 그때를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아서야. 힘내라.”

먼저 겪어본 자들만 알 수 있는 이 길고 지난한 싸움을 하는 동안 아주 큰 아량을 베풀어 주었고, 무경험자들도 두 팔 걷고 나서 주었다.


이러쿵저러쿵 오 개월의 여정이 마무리에 다다랐고, 잠시간 평화의 시간이 가고 대망의 바닥 깔기와 짐  싸기가 동시에 진행되어야 하는 죽음의 계곡을 눈앞에 두고 있는 와중이다.


막내를 유치원에 데려다 주려는데, 바닥 깔기 담당자가 말했다.

“아무래도 집에 가봐야 할 거 같아.”

막내가 유치원 갈 준비를 하는 동안 한참 통화를 하더니, 아무래도 바닥 자재가 너무 일찍 도착한 모양이었다. “Fertig Paket” 이라 불리는 자재는 원목으로 만들어진 터라 물에 젖으면 안 되는데, 일기예보 상 비 올 확률이 50% 이상. 새집엔 아무도 살지 않았고, 도착한 물건을 집 안으로 들여 넣어 주는 것은 운송업자의 일이 아니었다.

집 앞에 가 보니 이미 나무 판때기 더미가 현관문 앞에 턱 놓여있다. 얼핏 봐서 많아 보이지 않았고, 거뜬히 옮길 수 있을 것도 같았다. 집 안으로 들어가 보니 작업을 마친 도장공들이 페인트 통과 사다리, 각종 공구를 챙기며 집안 정리를 하고 있었다. 뜯어내기 시작했을 땐 과연 이 집에 들어와 살 수 있을까 싶게 스산하기 짝이 없었는데, 깨끗하게 칠까지 마친 집은 건축가 K의 말대로 들어와 자도 될 정도였다. 다시 쌓여 있는 파켓 앞으로 가서 의지를 다지는 포즈를 취하고 사진을 찍었다. 남편이 이 시간을 꼭 기록해 둘 거라며 공사 틈틈이 사진을 찍고 있는데, 집과 도와주는 사람들 사진은 잔뜩인데 정작 본인 사진은 몇 장 안 된다. 가끔 공사장을 배경으로 셀카를 찍기도 하던데, 현장의 어수선함과 고단함은 전혀 실리지 않은 사진이다. 우리가 도착하기 전에 잠시 비가 왔나 본데, 위쪽 두 줄이 꽤 많이 젖어 있었다. 단단하게 묶여 있던 줄을 뜯고 겹겹이 싸인 포장재도 뜯고, 하나 들어보려 했는데, 웬걸, 꿈쩍도 하지 않는다. 남편이 아랫부분을 들어 올려 틈을 만들어주면 그사이에 손을 넣고, 남편과 타이밍을 맞춰 든다. 그렇게 해야 겨우 하나를 들 수 있었다. 한 묶음에 25kg이라는데, 둘째 몸무게랑 비슷하다. 이제 나는 둘째를 안아 올릴 수가 없으니 당연한 이야기다. 현장을 정리하는 도장공들과 서로 피해 가며 파켓을 옮기는데 부산스러움을 더하는 목소리 하나가 도착했다. 빠른 독일어로 크게 떠드는 아저씨의 말을 처음에 전혀 알아들을 수가 없어, 남편이 영어 하실 수 있는지 물었더니, 단칼에 “Nein! Hier ist Deutschland! (아니! 여기 독일이잖아!)” 마음을 가다듬고 다시 들어보니 자기 생각에 남편 이름이 회사 이름인 줄 알고 와보니 회사는커녕 우편함에 명패도 없어서 어제 배달 왔다가 그냥 돌아갔으며, 제품을 반송할 뻔했다는 것이다. 자꾸만 남편 이름을 들먹이며 이게 도대체 뭐냐고 물어서 남편이 내 이름이라 답해주었더니, 기가 찬다는 반응. 우리는 아직 이사 들어오지 않아서 이름을 못 붙였어,라고 설명하자 어깨를 들썩. 그래도 반송해 버리지 않고 다시 한번 와 준 배송 기사님께 감사. 일찍부터 서둘러 온 우리의 선택이 다행. 그렇게 나르고 있던 나무 판때기 옆에 나무 판때기 닮은 플라스틱 판때기 한 더미가 더 쌓였다.

<Before / After >

도장공들은 다 빠지고 남편과 둘만 남았다. 빨리 해치우고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데 나를 배려한 남편이 너무 느리게 간다. “더 빨리 가도 돼.” “다칠까 봐 그러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빨리 갈 수 있어. 빨리 끝내 버리고 싶어.” “그럼 그쪽에서 할 수 있는 속도로 밀어봐.” “오케이.”

속도가 올라갔다. 두 더미 판때기 사이로 지나는 게 어렵다 싶은 순간 스텝이 꼬이고 판자를 떨어뜨리고 무릎을 콱 찧으며 넘어졌다. 아픈 건 둘째치고 파켓이 괜찮은지 걱정됐다. 떨어졌던 파켓을 옮겨 놓고 살짝 뜯어보는데 우선 겉보기엔 괜찮은 것 같다. 무릎이 시큰했지만 들여다보고 있을 틈이 없다. 파켓을 다 옮기고 나니 팔다리가 후들거렸다. 비닐 보덴도 옮겨야 하는데…


오후에 본인이 와서 하겠다고, 건축가 K가 일찍 퇴근하고 도와주기로 했다며 남편이 여기까지 하자고 했다. 비닐 보덴은 나무보다는 습기에 강한 자재라 괜찮을 것 같다고. 그래도 바로 길 앞에 그렇게 두고 가는 게, 영 찝찝했는데, 아직 오전인데 이미 오늘 쓸 에너지를 다 쓴 것 같아서 그냥 그러자고 했다. 다시 한 바퀴 둘러보고 나온다. “창이 열려 있던데 일부러 그런 거야?” 스치듯 묻는 말에 대답은 돌아오지 않고, 급하게 차를 탔다. 빨리 집에 가서 뭐라도 먹고 싶었다.

점심을 준비하며 자꾸 주전부리를 주워 먹었다. 레토르트 소고깃국이 점심 메뉴다. 한국에서 온 택배에 들어있었던 건데, 지난 상반기 한국에서 택배를 몇 번 받아 누가 보내준 건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고맙다고, 말하고 싶은데…

점심 후 정리까지 마무리하고 소파에 잠시 앉았더니 더는 못 버티겠다 싶었다. 아무래도 한숨 자야겠어,라고 말하고 나서 폭소가 터졌다. 겨우 이만큼 일하고 빌빌대는 내 모습이 웃기기도 하고, 이런 약골 손이라도 빌려야 하는 남편이 안쓰럽기도 하고, 우리 모습이 한편으론 서글픈데, 막 웃음이 터져 나왔다. 한바탕 웃고 났더니 어쩐지 다시 힘이 생겼다. 박스를 하나 만들고 찬장에서 안 쓰는 그릇들을 잔뜩 꺼내 벌렸다. 미리미리 해 놓지 않으면 나중에 스트레스만 받고 다 해내지 못할 게 뻔했다. 그릇을 담다 보니 어느새 막내를 데리러 가야 하는 시간, 차로 가서 장을 보고 와야겠다. '아이들 도시락 용 과일과 빵이 다 떨어졌어.' 생각하고 차로 나서면서, 자꾸만 등·하원 길을 차로 해야 하는 이유를 만들어 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약간의 가책이 생겼다. 어쨌든 오늘은 일이 많으니까 좀 봐주자.



하늘이 잔뜩 무거워졌다. 검은 구름이 몰려다니는 게 심상치 않다 싶더니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남편은 이사할 집의 이웃에게 “너희 집 창이 열려 있던데, 여기 비와. 괜찮은 거야?”라는 메시지를 받았다. 아무리 습기에 강하다지만 밖에 덩그러니 놓여있는 비닐 보덴 판때기들도 걱정이었다. 푹 젖어도 되는지는 잘 모르겠단 말이지. 건축가와 다른 몇 사람과 만나 하기로 한 작업은 취소한 상태였다. 내일이나 모레 또 갈 거니까, 그때 해도 되겠다 싶기도 하고, 저녁엔 막내가 다니게 될 유치원의 학부모의 밤(Elternabend)이 있었으므로, 남편이 아이들을 데리고 집에 있는 편이 낫겠다 싶어서였다. 비가 이렇게 무섭게 쏟아질지 누가 알았나, 아니 무섭게 쏟아지지 않았다 해도, 길바닥에 공사 자재를 내버려 둬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열려 있는 창을 그대로 뒀다간 물난리가 날 것이고, (애초에 왜 안 닫고 온 건지 잘 모르겠다, 아무래도 지쳐서 판단력이 흐려졌던 것 같다) 비닐 보덴을 빗물에 샤워시켜도 되는지 알 턱이 없었다. 급하게 저녁 준비를 한다. 가족 모두 출동하기로 한 것이다. 아이들은 돌아오며 잘 수 있게 샤워를 하고 편한 옷을 입혔다. 나는 차리면서 저녁을 먹었고, 가족들이 먹는 사이 처음 만나는 사람들에게 음식 냄새를 풍기지 않기 위해 씻고 옷을 갈아입었다. 씻느라 바지를 벗다 보니 오전에 다친 무릎에서 난 피가 바지에 묻어 있고, 살갗에 굳어 있었다. 아무것도 없을 곳에서 매일 저녁 보는 티브이도 못 보게 되고, 귀찮기도 했던 큰 애는 투덜거렸다. 그 애의 투정을 다정하게 위로해 줄 여분이 전혀 없었던 우리는 못 본 척 아이들을 차에 태웠다. 아이들과 같이 나서기 위해서는 준비물이 많다. 물, 간식, 장난감, 확 떨어진 기온을 대비하기 위한 담요. 유치원에서 챙겨 오라고 한 건강기록 수첩(Untersuchungsbuch)과 예방접종 노트(Impfungpass), 지갑, 핸드폰, 독일어로 오갈 대화에 주눅 들지 않을 마음가짐. 차에 앉아서 평소에 잘하지 않는 화장도 했다. 하나 안 하나 큰 차이도 없겠지만 그래도 조금은 낫지 않을까 하는 마음의 위안을 위해서. 가는 길에 막내는 잠이 들었다. 어쩐지 칭얼대더라니 피곤했었나 보다.


도착하자마자 남편과 나는 집 안으로 들어가 열린 창들을 확인했다. 생각보다 비가 많이 들이치진 않았다, 안심하며 꼭대기 층으로 올라갔는데, 지붕에 낸 창이 열려 있었고 거기로 비가 대차게 들이쳤나 보다. 화장실 쪽은 방수 처리도 되어 있고, 타일 작업도 끝난 상태라 그나마 다행이었는데, 방 쪽에 흥건하게 젖은 바닥이 어찌 될지 모르겠다. 창을 닫아 놓고, 다시 바깥에 덩그러니 놓여있는 비닐 보덴으로 향했다. 아, 막내부터 빼서 눕혀야겠다. 타일이 있는 부엌은 시멘트 바닥보단 낫겠지 싶어 돗자리에 가져간 담요를 깔고 막내를 옮겼다. 남편은 이곳저곳 살피느라 분주하다. 긴장되는 마음으로 비닐 보덴의 포장을 뜯고 옮기는데, 파켓보다는 좀 가볍다고 하는데도 혼자 들 수가 없었다. 막내랑 비슷한 무게인데 왜 안 되는지. 나는 큰아들의 도움을 받고, 남편은 혼자 번쩍번쩍 들어 나른다. 저렇게 무리를 해도 되는 건지 걱정이 되지만 다른 대안이 없으니 지켜보기만 할 뿐. 빗줄기는 훨씬 약해져서 다행이다 싶다. 다 옮기고 나니 유치원으로 향해야 할 시간이 되었다. 가톨릭 교인도 아니면서 “성 누구누구” 이름을 딴 가톨릭 유치원을 선택한 이유는 거리였다. 300m면 아이가 아무리 온갖 세상 구경과 간섭을 다 한다고 해도, 15분이면 족할 거리였다. 오늘 모임에서 아이가 언제부터 유치원에 가게 될지 정할 것이다. 부디 9월 안에 날짜를 받을 수 있기를!


이 동네는 이상하게 인터넷이 잘 터지지 않는다. 핸드폰에 데이터가 충분한데도 지도 앱이 제대로 기능하지 않는다. 멀지 않지만, 처음 가는 길이, 늦지 않아야 하는 약속에 불안함이 슬며시 들어 걸음을 재촉해 본다. 얼마지 않아, 활짝 열린 문으로 맞이하는 유치원을 만난다. 독일어는 아직도 답답한 수준이지만 유치원 학부모의 밤(Elternabend)은 이민 생활 중 가장 많이 참석한 공식 모임이다. 안 들어도 뻔한 내용일 테지만 때마다 다를 구체적인 사항들과 유치원의 분위기, 선생님들을 만나기 위해 참석하는 편이 나았다. 모임이 시작하기 전 다른 교실에서 엄마 한 명이 우리 교실로 넘어왔다. 이 모임은 새로 유치원에 오는 아이들의 부모들이 모이는 모임인데, 교실을 잘못 찾아갔었나 보다. 독일말도 어눌한데, 제대로 된 교실에 가 앉아 있는 내가 대견하다. 자기소개도 간단히 이름과 아이 이름만 밝히는 분위기라 다행이다. 모임은 무리 없이 따라가고 있었지만, 농담이 나올 때마다 어색하다. 익숙한 내용은 알아듣지만, 그놈의 농담! 그건 정말 알아듣기가 힘들 때가 많다. 너무 빠르고 많은 말로 질문을 던지는 학부모 쪽의 질문도 알아듣기 힘들다. 선생님 중 한 분은 크로아티아에서 온 지 3년이 되었다고 했다. 그  사이 어떻게 저렇게 타국의 말을 잘하게 되었으며, 부지런히 직업 훈련까지 받아 직장인이 될 수 있었을까. 부럽네, 부러워. 온갖 상념 속에 모임은 막바지를 향해 가고 있었고, 마지막 질문이 이어졌다. 아이들 등원 날짜를 정하는! 이곳의 아이들은 같은 날 시작하지 않는다. 기존에 다니던 아이들이야 방학이 끝나면 모두 함께 유치원으로 돌아오지만, 처음 다니는 아이들은 철저하게 프로그래밍된 “적응 기간"을 거쳐야 하므로 2~3주에 한 명, 더 길게는 한 달에 한 명씩 일정을 정해 입학(?)을 하게 된다. 초등학교가 아직 개학하기 전 9월 둘 째 주에 가능한 아이가 있는지 물어보는데, 아무도 손을 들지 않는다. 잠시간 눈치를 보던 나는 번쩍 손을 들었다. 오늘 하루, 정말 많은 일이 있었고, 했지만 그 일 중 가장 잘한 일로 꼽는다.




그렇게 긴 하루의 마지막 일정을 마치고 아직 텅 비어 있는 공사장에 불과한 ‘우리 집'으로 돌아왔다. 자고 있던 막내는 깨어났고, 우리는 벌렸던 전을 다시 추슬러 차에 실었다. 긴 하루가 마무리되고 있었다. 여전히 ‘우리 집'인 세 들어 사는 집으로 향하는 차 안에서 우리는 함께 탄성을 질렀다.

“무지개다!”

그려 놓은 듯 선명하고 아주 커다란 무지개가 눈앞에 서 있었다. 지평선에 맞닿은 무지개는 오늘 하루의 끝을 알려주는 대신 우리가 가야 할 여정의 방향을 알려주는 듯했다. 하루의 고단함은 녹고, 내일 갈 길을 꿈꾸기 위해 잠들었다.  



*

무지개를 만난 감격을 인스타에 짧게 남기려다 그럴 바엔 하나 쓰지 싶어서 시작한 글, 이렇게 길어질 줄은 몰랐다. 아니, 알면서 시작한지도 모른다. 이 이야기는 작년 이맘때 주택 구매 서류에 계약 사인을 했을 때부터 아니 집을 사겠다고 남편이 나서기 시작한 때부터 이어지는 이야기라 그 배경 없이 쓸 수 없었고, 게다가 이 하루의 어느 틈도 잘라낼 수 없이 빡빡하게 채워놓은 이야기를 쓰고 싶었으니까.

전략을 바꿨다. 짧게라도 계속 쓰기로. 실패. 그래도 난리 통에 글 하나를 마무리했다.


**

그때 마무리하지 못하고, 거의 마무리된 글을 책상에 겨우 앉을 수 있게 된 두 달이 지나 발견했다. 다시 전략을 세웠다. 짧든 길든 매일 쓰기로. 그리하여 집중도 못 하면서 끄응 차, 하나의 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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