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Anne Joy Aug 14. 2020

떨어지다

독일에 온 첫해 여름, 가정용 풀을 사기로 했다. 아이들이 자꾸 마당 수돗가에서 물놀이를 했다. 기왕 마당도 있으니 호사를 한 번 누려보자. 다양한 선택지 앞에 심혈을 기울여 고른 물건을 구매하고 배송이 되고, 풀장을 받고 나서야 필요한 것을 알게 된 다른 부속품들까지 모두 구매하는 동안 8월은 이미 절반을 지나고 있었다. 여기 놨다 저기 놨다 물을 넣었다 뺐다, 우여곡절 끝에 설치하니 20일이 지났고, 이곳의 여름은 그즈음이 되면 꺾인다는 것을 알게 됐다. 결국, 그 해는 수영장 구매와 설치하는 방법을 익히는 것에 만족해야 했다. 아쉬워하는 아이들을 달래며 다시 물을 빼고 접어 넣었다. 갑작스레 끝나버린 여름.



김승옥 작가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 24세의 나이에 ‘감수성의 혁명'이라는 날개를 달고 날아올라 한국 문학사의 흐름을 이끄는 주인공이 되었다. 1960년대, 그의 20대는 화려하고 찬란한 여름이었다. 너무 이른 계절이 온 걸까. 반짝이던 그의 문장들은 다시 볼 수 없게 되었다. 여전히 그는 어디에선가 어떠한 문장들을 만들고 있을 텐데 더는 그 문장에 황홀해져 꿈을 꾸는 이가 없게 된 것 같다. 그를 숭상하는 이들은 과거를 되감아 재생한다. 그의 생은 20대에 박제되어 있다. 그의 여름은 끝나지 않는다. 그리고 영원히 끝났다.



부박한 문장 앞에 뒤채이는 날들을 보냈다. 욕심이 차오르자 더는 쓸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벼려지지 않은 칼로 잘라낸 조각들은 거칠고 엉성했다. 자꾸 도망갈 궁리를 하면서도 고개를 가로젓고 다시 앞을 본다. 더 갈 수 있을까. 차마 되돌아갈 수는 없다.

날아본 일이 없다. 떨어질 일도 아직 없다. 여름, 아주 늦은 여름을 하염없이 기다린다.

물씬거리는 초록의 세계, 여물어가는 열매의 계절, 작열하는 태양과 쏟아지는 빗줄기가 겨루는 뜨거운 시절, 생명이 폭발하는 시간.


끝나버려 영원히 다시 오지 않을 여름과 언제 올지 기약 없는 여름,
어느 쪽이 더 섧나.


떨어져 버린 나의 바나나


매거진의 이전글 새로운 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