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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ne Joy Nov 25. 2020

한심한 계절

“우리 이제 7 배운다! 7!”

둘째의 말에 남편과 나는 독일 1학년 아이들의 수업 속도를 처음 접하는 것도 아닌데 웃어버렸다.

“그래? 7을 배워?”

응, 진짜 한심하지!

아이 입에서 한심하다는 말이 나오며 정말 한심하다는 듯한 표정이 떠오르자 우리 부부는 또 한 번 웃었다. 저런 표현들은 언제, 어디에서 익히는 것인가. 아이들을 보며 “한심하다, 한심해.”라고 수시로 한탄했을 것이라고 속단하지는 말아 주길 바란다. 최고의 부모는 아니지만, 수시로 한심하다는 말로 기를 죽일 만큼 나쁜 부모는 아니니까. 그리고 이렇게 천천히 배운 1학년들은 곧 알파벳(Buchstaben)을 떼고, 더하기와 빼기도 알게 될 것이다. 이륙을 위해 오래 활주로를 달리는 비행기처럼 이들은 처음엔 천천히 했던 것을 무수히 반복하며 긴 활주로를 따라 언제까지고 갈 것 같지만 어느새 떠올라 보이지 않을 만큼 고도를 높일 것이다.   


오래 쓰지 못한 것은 11월의 안개 때문이었다. 아침 안개는 맑은 날을 보증해 주던 게 떠나온 고국의 불문율이었는데, 이곳의 안개는 좀 달랐다. 온종일 안개에 갇혀 축축하고 흐리멍덩했고, 서머타임이 해제된 이후로는 오후 5시만 돼도 검게 밤이 내려와 빛이 드리울 시간이 없었다. 처음 이곳의 11월을 경험하고야 철학과 문학이 발달할 수밖에 없었을 독일의 음울한 날씨를 실감했다. 기상청 기후감시업무에 활용이라도 해얄 만큼 계절과 날씨에 예민한 사람이지만, 한국의 날씨는 대체로 맑음,이었다. 장마 기간의 흐린 날들은 시원해 오히려 좋았고, 화이트 크리스마스는 뭇사람들의 바람과는 상관없이 흔치 않아 더욱 특별했다. 흔하게 맑았던 그 날들이 얼마나 호사스러운 시간이었는지 슬슬 흐리고 비 오는 날이 번삭해지며 여름이 저물면 걱정이 앞선다. 먼저 정착한 친구들이 이곳의 추위에 몸서리를 치며 ‘기분 나빠한' 이유는 다만 묵직하게 뼛속을 때리는 냉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 냉기를 위로할 빛이 어디에도 없기 때문이었다. 붉고 노오란 단풍도 은근하지만 깊은 가을볕과 청아한 하늘에 어우러져야 아름답지 음울하게 흐린 배경 안에선 그로테스크해 보이기만 한다. 비라도 몇 번 내리면 바닥에 달라붙어 빠른 속도로 빛깔을 잃으며 흉물스러워지기 마련이다. 그렇게 짓밟힌 잎을 밟고 밟으며 이 계절을 지나는 중이다.

11월의 풍경




서툰 외국어로 살아가는 일은 짙은 안개에 갇힌 채 걷는 길과 같다. ‘별 탈 없기를' 바라는 심정으로 조심스레 한 발씩만 내디딘다. 저 앞에 있는 것이 무엇인지 선명히 보이지 않아도 문제만 생기지 않는다면 그런대로 나아갈 수 있다. 겨우 몇 단어로 문장을 쥐어짜 생활을 이어가는 외국인에 대한 친절이 제공되면 어쩐지 뿌듯함마저 느끼며 일상의 과업을 완료할 수 있다. 하지만 배려를 장착하지 않은 빠른 말의 원어민을 만나거나 문제 상황을 맞닥뜨리면 속도에 맞지 않은 기어가 들어간 것처럼 시동이 꺼져버린다. 미리 준비한 문장들과 찾아 놓은 단어들이 무색하게 재빨리 재시동을 걸고 도망치듯 자리를 벗어나는 일이 많다. 늘 쓰는 쉬운 말인데도 상대가 알아듣지 못해서 몇 번이고 같은 단어를 이렇게도 말해보고 저렇게도 말해보다 결국은 핸드폰으로 써서 보여주는 일도 있다. 그렇게 쓴 글자를 보며 그들은 그제야 “아~~!!” 탄성을 내지르며 생소한 억양과 발음을 뱉는다.


코로나 시대에 맞춰 등원 시간에 유치원은 출입 인원을 제한하는 방도를 마련했다. 반별 티켓을 만들어 한 반에 두 명의 부모만 유치원 안으로 들어갈 수 있게 한 것이다. 아이가 있는 반은 유난히 오래 기다려야 하는 일이 다른 반보다 잦은 것 같다. 그저 느낌일 테지만. 그날도 이미 기온이 10도 이하로 떨어진 문 앞에서 티켓이 들어 있는 나무 그릇을 들여다보았다. 조금 더 기다려야 하겠다. 실망하며 여기저기 뛰어다니는 아이 손을 잡고 섰는데, 안에서 누군가 나와 티켓을 내려놓는다. 얼른 보았더니 아이 반이다. 안도하며 잽싸게 문 안으로 들어선다. 아이가 외투를 벗고 신을 갈아 신는 내내 어딘가 불편하다. ‘아까 같이 서 있던 엄마, 같은 반이었던가? 나보다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던가?’ 추위와 어디로 튈지 모르는 막내를 잡느라 정신이 반쯤 빠져있는 채로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아무리 생각해도 답을 알 수가 없는데, 아까 그 엄마가 두 아들을 데리고 우리 교실로 다가온다. 아무래도 확인을 하고, 오해를 풀거나 사과를 해야 할 것 같은데, 뭐라 말을 꺼내야 할지, 민망함과 당혹감, 처음 겪는 상황과 준비되지 않은 문장의 조합은 머릿속을 점점 더 깨끗하게 비워낼 뿐이다.   

그저 웃으며 인사했는데 아무래도 그의 표정이 좋지 않은 것 같다. 그 일로 종일 마음이 개운치가 않다. 그날 이후로 그 엄마만 만나면 괜히 죄인처럼 주눅이 들었다. 그래도 이런 일은 시간과 망각의 손길이 닿아 희석되고, 기회 될 때마다 환한 인사와 친절로 덮어 어떻게든 돌이킬 수가 있다.



코로나 기간이 이렇게 길어질지 몰랐던 때, 아이들과 나의 수영 강습을 신청해 두었다. 이미 독일은 1차 외출 제한령이 떨어진 시점이었지만 상반기 두 번의 방학, 부활절(Ostern)과 오순절(Pfingsten), 내친김에 여름방학 시즌 강습까지 예약을 완료했다. 세 개 중 하나는 들을 수 있겠지! 이곳 아이들은 학교에서 자전거와 수영을 배우는데, 학교에서 배우는 것은 요식행위일 뿐 다들 미리 배우고 간다. 물에 빠져도 살아남을 수 있도록, 탄소배출을 줄이고 자전거로 등하교할 수 있도록, 무엇보다 그 많은 여가를 즐길 수 있는 최소의 스킬 두 가지를 공식적으로 “모두가" 익혀두는 것이다. 근처에 수영강습을 받을만한 곳이 없어 미루고 미루다가 신청한 것이었다. 아이들 수영 수업을 신청하며 나도 하나 신청했다. 아빠는 부산 사나이, 바닷가에서 나고 자란 데다가 해군 장교 출신이어서 바다에서 몇 킬로씩 수영할 수 있는 분이다. 아빠의 발령지였던 섬에 들어가 살 때 나는 아빠 손을 잡고 바다(물)에 뜨는 법을 배웠고, 제대로 된 영법은 배우지 못했어도 그럭저럭 물속에서 놀 정도는 떠 있을 수 있었는데, 이참에 제대로 배워보고 싶었다. 아니, 수영 아니라 몸을 움직여 할 수 있는 무언가를 찾고 있던 와중이었다.   

코로나바이러스는 아예 우리 사이에 자리를 잡은듯싶었다. 너와 나 벗하여 영영 살자는 투로 잠잠해질 줄을 모르고, 철저하게 방역을 하는 한국이나 일단 일상을 이어가는 게 중요한 이곳이나 확진자 수는 줄었다 늘기를 반복했고, 결국 아이들은 수영강습은커녕 수영장 한 번 못 가보고 여름을 보냈다. 정작 수영을 배워야 하는 애들 대신 9월에 수업이 시작이었던 나는 수영 수업이 재개된다는 안내 메일을 받았다. 독일인들 사이에서 수영을 배울 생각을 하니 긴장감에 현기증이 나는 듯했지만, 살짝 핑 도는 느낌이 나쁘지만은 않은 것이다.


첫 수업 날, 

수영복, 수영모, 수경(아들 것 빌림), 수영장에서 신을 슬리퍼, 추울 때 덮고, 씻고 닦을 큰 수건, 샴푸&린스, 바디워시, 폼 클렌져, 스킨&로션, 바디로션 마지막으로 뉴노멀 시대의 필수품 마스크까지 꼼꼼하게 짐을 챙기고 집에서 나섰다. 저녁에 외출하자니 아이들이 저마다 한 마디씩 보탠다. “엄마, 어디가?” “엄마 수영 배우러 가.” “수영장에서?” “응.” “왜?” “엄마 건강해 지려구.” “우와 좋겠다.” “나도 갈래. 엄마, 나도 같이 가.” “마빈, 거긴 같이 못가. 지금은 어른만 들어갈 수 있대.” “엄마, 수영 잘 배우고 오시세요.” “오세요, 해야지.”

아이들과 한참을 핑퐁 대화를 나누고서야 등 뒤로 문을 닫을 수 있었다. 이 저녁 시간에 혼자 어딘가 간다는 것만으로 입꼬리가 들먹거렸다. 독일인들 사이에서 독일어로 무엇인가 배운다 생각하니 심장은 세차게 뛴다. 수강 신청자 확인과 입장료 정산을 위한 멤버십 카드 충전까지 마치고 수영장으로 들어갔다. 순조로운 입장은 앞으로 수영 수업의 전조이리라 받아들였다. 눈치를 보고 몇 사람이 쭈뼛쭈뼛 모여있는 곳으로 갔다. 출석 확인과 가벼운 인사, 그리고 수업의 시작, 레일 끝에서 끝까지 수영해보라고 한다. 슬쩍 뒤로 빠져 있는 사이 앞서 있던 사람들이 줄지어 개구리 수영으로 레일을 건넌다. 눈 앞에 펼쳐진 돌발상황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몰라 당황한 채로 강사에게 말을 걸었다.


“Ich kann nicht schwimmen. (나 수영할 줄 몰라.)”

강사의 “Blablabla.”

“Hier ist den Anfängerkurs. (여긴 초급반이잖아).”

“Dies ist keinen Anfängerkurs, sondern einen Kraulschwimmkurs für den Anfänger.”

‘뭐… 뭐라는 거야… 그냥 초보자 코스가 아니라고?’

설명인즉슨, 이 수업은 자유형 초보자 코스로서 개구리 수영(Frosch schwimmen - 여기는 이 개구리 수영, 즉 평영을 제일 처음 배운다.)을 할 줄 아는 사람들만 들을 수 있는 수업이고, 그에 대한 설명은 신청을 위한 홈페이지에 이미 적혀 있었다는 것이다.

“Dann wie soll ich tun? (그럼 나 어떻게 해야 해?)”

다시 이어지는 “Blablablabla...”


대충 알아들은 대로 수영장 관리(Bademeister) 아저씨에게 가서 또 더듬더듬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관리 아저씨 역시 본인은 할 수 있는 게 없다며 전화를 해서 ‘영어로' 물어보라고 한다. 내 독일어가 도저히 두고 못 볼 지경이었나 보다. 신나서 달려간 수영장에서 맹랑하게 퇴짜를 맞고, 그만 갈 길을 잃어버린 난, 명랑하게 물장구라도 쳐야 하나 싶기도 했지만, 탈의실 문을 닫고 한참을 앉아 있다 돌아왔다.

포기하지 못해 나름 용기라는 것을 내어 한 어쭙잖은 시도들은 당연하게 거절되었다. 애초에 “Kraulschwimmen”이라고 명시되어 있는 수영장 홈페이지를 열어 보니 이미 말했듯이 코스에 대한 설명도 독일어를 쉽게 읽는 사람들에게는 “친절하게” 쓰여 있었으며, 수영장 측에서 메일로 보내온 운영 방침에는 소비자의 변덕(심?)에 대한 환불이나 다른 수업으로의 전환은 불가능하며, 대신 수업을 들을 누군가에게 나머지 수업을 넘기는 것만이 유일한 대안이라고 쓰여 있었다. 그리하여 수업 시간에 맞춰 수영장에 간 후, 수업 바깥 지대에서 대학 때 교양으로 수영 수업을 들었다는 사실을 떠올리고, 몸에 남아 있는 감각을 되살렸다. 인터넷에 올라와 있는 한국인에게 친절한 한국어 수영 강의로 예습을 하고, 멀리서 한창 진행 중인 수업을 곁눈질한 후 직접 시전하여 보면서 ‘아, 나는 자유형을 할 줄 알았구나.’ 하는 깨달음을 얻었는데, 그것이 수강료 133.40유로로 획득한 전부였다.  




아무래도 이 계절이 끝날 것 같지가 않다.

이렇게 소극적이고 말 없는 사람으로 쭉 살아야 하는가. 열심히 듣고 읽어도 대충으로밖에 이해되지 않아 일어나는 불상사들은 온몸으로 받다 점점 더 세상 밖으로 뒷걸음질이나 쳐야 하나. 유창하길 바라는 욕심은 진작 내려놓고 소박하게 생활을 할 수 있을 정도로만 발붙인 땅의 언어를 머릿속에 이식하는 일이 이렇게 버거우리라곤 예상하지 못했다. 내심 자신까지 있었다. 그 나라에 살면서 그 나라의 언어를 배우는 일인데 못할 게 뭐람. 사방이 독일어일 텐데! 하지만 이미 굳어져 새로운 걸 받아들이는 일엔 몹쓸 언어중추를 지닌 데다 아이처럼 말도 안 되는 말이라도 뱉어 누구라도 붙잡고 마음을 덜어내는 일을 하기엔 너무 그럴듯한 척하며 오래 살아온 나를 간과한 판단이었다. 그렇게 나의 자의식은 서툰 말로 이국의 단단한 껍질을 뚫고 들어가기에 너무 높았고, 어쩌다 친절한 누가 말 걸어와 몇 마디라도 나눌라치면 급격한 피로를 느끼며 급하게 마구 던져 흩어진 문장에 흠칫 놀라 또 그만큼을 물러나는 일의 반복이다.

점점 쪼그라들어 이 한심함을 탈피하긴 글러 먹었는데, “7”을 배우며 한심하다 한탄하던 우리의 1학년은 자꾸자꾸 앞으로 나가더니 8이나 9 안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구성을 더하기와 구슬 그리기로 배우고, 제법 글자를 읽었고, 아직 배우지 않은 알파벳이 들어 있는 단어와 문장들도 더듬더듬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느 날 통장에 133.40유로가 찍혔다.

코로나가 준 희귀한 선물,

만회해 줄 테니 툭 털어봐, 일어나 봐. 끝나지 않을 것은 없어. 나도. 너도.    


독읠의 가을, 이리 아름답기도 하다. 10월 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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