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과 데미안을 지나 나의 독일 문학은 파트리크 쥐스킨트에 안착했다. 영화화되면서 많은 관심을 받은 <향수>보다는 그의 경장편 또는 희곡과 단편 소설들이 훨씬 마음에 들었다. 그중 <좀머씨 이야기>는 처음이자 최고였다. 더 어렸을 때 <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와 <어린 왕자>를 읽으며 느꼈던 통쾌함 - 아이의 마음과 말로 어른들의 세계를 비틀어버리는- 을 다시 느낄 수 있어 좋았고, 무엇보다 주인공의 시선은 그 시절 나의 것과 겹쳐 있었고, 그 안에
삶과 죽음을 따뜻한 듯 덤덤하게 차가운 듯 명징하게 담아 주었다.
다시 읽어 보니 그때는 대충 그렇겠거니 하고 넘어갔던 디테일을 알아보는 재미가 쏠쏠했는데, 예를 들면, 신발 사이즈 28(1)이라든지, 고등학교 5학년(2), 나무에서 떨어지는 시간을 <스물하나>를 제대로 발음하는 시간(3)에 비교하여 표현한 것 등이었다. 게다가 작가의 태생은 가끔 놀러 가기도 하는 뮌헨 남서쪽의 호수 Starnberger See 근처라고 하니 그가 묘사하는 풍경들을 머릿속에 그리는 일이 눈앞의 사진을 들여다보는 일만큼 선명해졌다. 지도를 보다 좀머씨와 ‘내'가 살았던 마을을 찾은 것 같기도 하다.
독일의 신발 사이즈도, 학제도, 숫자를 말하는 법도, 어떤 호수의 이름과 그 근처의 풍경도, 아무것도 모르던 중학교 1학년 때 좀머씨를 만났다. 아무것도 몰라도 모든 이야기에 빨려 들어가 순식간에 읽어 내려갔다(원래 책을 빨리 읽는 편이 아니다). 하늘을 날 수 있다 믿었던 아주 작았을 적 경험담, 나무 위를 내 방처럼 사용했던 나날들, 좋아하는 소녀에게 함께 집에 가자는 말을 듣고 1에서 6까지 철저한 준비를 하고 약속한 날 하굣길에서 소녀를 기다렸는데, ⌜얘, 너 나 기다렸니?⌟ 한마디로 허무하게 사라져 버린 행복의 순간, 갖은 장애를 거쳐 오느라 그만 피아노 레슨에 늦었을 뿐인데, 잔뜩 화가 난 선생님, 그 앞에서 눌러야 하는 건반에 선생님의 코딱지가 묻어 있어 그 음에 다다를 때까지 휘몰아치는 주인공의 갈등, 결국 건반을 누르지 못해 선생님께 온갖 욕을 얻어먹고 자신을 이 지경으로 만든 모든 이에게 복수하겠다는 결심으로 나무 위에 올라서서 자신의 구슬프고도 아름다운 장례식을 상상하는 장면은 모두, 나의 것 같은, 나의 것일지도 모르는 이야기들이었다. 주인공 나의 그런 생기 넘치는 이야기들은 계속해서 걷는, 걷기만 하는 좀머씨의 이야기들과 교차하여 펼쳐진다. 한 번씩 마주쳤다는 것 외에 어떠한 연결점도 없는데 왜 하나의 이야기처럼 이어져 있었을까. 걷기만 하던 좀머씨가 어느 날 호수 속으로 걸어 들어가 사라져 버린 부분에서 마치 나의 부고를 읽은 것처럼 충격을 받았었다. 어린 날의 눈에 담아 넣으려니 삶과 맞닿아 있는 죽음은 시커먼 물처럼 되려 나를 삼켜버릴 것 같았다.
독일로 넘어온 지 얼마지 않아 마을에서 좀머 할머니를 만났다. 할머니는 배낭을 메지도 않았고, 지팡이를 들지도 않았지만, 그녀를 보는 순간 좀머씨가 떠올랐고, 좀머 할머니로 명명했다. 아이들이 등교하는 시간 즈음에 주로 확인할 수 있는 할머니의 동선은 마을 광장에서부터 우리 집이 있는 골목, 한 번에 알게 된 것은 아니고 아이들 데려다주며 몇 번이고 마주치면서 확인한 것이 그 정도였는데, 때로 마을의 다른 곳에서 걷고 있는 할머니를 마주하면 ‘여기까지 오시는구나!’ 하고 동선을 추가할 수 있었다. 이방인인 내가 할머니를 알 방법은 오로지 길에서 만나는 것뿐이었고, 그 길 위에서 할머니는 항상 “걷고" 있었고, 어떤 사람들처럼 미소를 지으며 “Hallo” 하고 인사를 걸어오지도 않았기 때문에 정말 ‘걷기만' 하는 사람으로 보였다. 항상 비슷한 차림(헐렁하게 항아리 라인으로 떨어지는 검정 바지와 비와 눈을 막을 수 있는 독일인들이 즐겨 입는 스타일의 점퍼는 파란색과 검은색이 섞여 있었는데 거의 흑백으로 보였다)과 무표정으로 느리게(좀머씨는 빠르게 걸었지만) 걷는 할머니를 보며 좀머씨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어느 날 마트에서 할머니를 만났다! 티를 내지는 않았지만 좀머씨의 마지막을 처음 읽었을 때만큼 충격을 받았다. 좀머 할머니는 좀머 할머니가 아니었다. 생활의 많은 부분을 연결하는 도구로 걷기를 사용하고 있을 뿐인 그냥 독일 마을에 사는 ‘평범한' 할머니였다. 온갖 상상은 그것으로 끝났다. 호수를 끼고 있지 않은 마을에 느리게 걷는 누군가는 호수로 걸어 들어가지는 않을 것이다.
동면에 들어가는 짐승처럼 겨우 살아갈 수 있는 정도의 에너지만 남아 있다. 잘 조절하지 않으면 하루를 채 살지 못한 채 방전되어 버리기에 최대한 에너지를 들이지 않는 방식을 적용 중이다. 에너지의 잔량이 적을 때 SNS는 좋지 않은 쪽으로만 기능한다. 시간을 먹는 괴물로 변해버린, 핸드폰에 깔려 있던 SNS를 다 지웠다. 남는 시간, 책을 들고 눕거나 어항 속을 하염없이 들여다본다. <아름답고 신비로운 물세상>은 손가락으로 온 세상과 연결된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작은 유리 속 보다 훨씬 단조로웠다. 그렇지만 작은 유리 안 세상은 손에 닿지 않았고 물 세상은 실재했다. 허탄의 세계에서 헤매는 일보다는 작은 생태계의 디테일을 발견하는 일이 달랑거리는 에너지를 충전하기에 적합했다. 가을 표 무기력은 마주할 때마다 낯설어 대하는 법을 찾지 못하고 당황한다. 그럴 때면 달릴 재간이 없는 나는 저만치 달려가는 사람들을 보며 불안했다. 좀머씨는 과거일지 무엇일지 모르는 것에 쫓겨 달리듯 멈추지 못하고 걸었지만, 사람들 속에서 나는 뒤처지지 않기 위해 달린다. 그러다 맞지 않은 속도에 고꾸라지면 영원히 불행할 거란 저주에 갇힌다.
오색 빛 시절의 “나"는 좀머씨의 회색 인생과 극명하게 대비된다. “나”에게는 좋은 날도 있고 힘든 날도 있고 구름을 타고 두둥실 올랐다가 단숨에 떨어지는 날도 있다. 슬프기도 기쁘기도 즐겁기도 짜증 나기도 한 날들을 지나며 계속 자란다. 어린 시절의 고민은 몇 년 뒤 고민거리가 되지 않고 새로운 걱정이 앞을 가로막지만 이내 자전거를 타고 그사이를 재빨리 지나간다. 좀머씨에게는 시간의 경계가 없다. 어제는 오늘과 같고 오늘은 다시 같은 모양의 내일에 이어져 있다. 아무리 시간이 가도 자라지 않는다. 변하지도 않는다. 목적지도 없는 걸음을 멈추지 못하고, 혹은 멈추지 않아 가지만, 누구에게도 닿지 않아 이해받을 수 없다. 그런 일에 마음을 쓰지도 않는다. 그저 걷고 또 걷는다. 그렇게 걸어서 삶을 이어가고 죽음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하루의 삶을 잇고, 다시 하루 치의 생을 걷는다. 허물어진 시간 속에서 고요히 사라져 간다.
괴팍하고 기괴한 형태로 그저 너절한 조각을 이어 붙여 가는 삶을 유지하기 위해 책을 읽고 어항을 들여다보며 걸음을 걸었다. 좀머씨 쪽에서 삶을 바라보면 패배자의 심정이 된다. 있지도 않은 자의적인 줄에서 이탈했다는 불안감은 이내 불행으로 이어진다. 어차피 줄은 없고 가짜는 정신만 차리면 진짜를 보려는 사람 앞에서 힘을 쓰지 못한다. 우리는 모두 다른 길에 서 있다. 사는 일은 각각의 길이다. 속도와 방향, 어느 것으로도 잴 수가 없다. 내내 비가 오는 가을은 이내 지나갈 것이고, 글루바인(Glühwein)의 온기로 녹일 수 없는 냉기를 품은 겨울이 왔다 갈 것이다. 화사한 봄과 싱싱한 여름도 오고 갈 것이다. 분명한 경계를 짓고 정확한 방향을 정해 나아가든 허물어져 어제와 같은 오늘을 살든 우리는 모두 시간 안에서 허물어지는 중이다. 그저 걸어가는 중이다.
(1) 이것은 만 나이 4살 반을 넘긴 우리 막내가 신는 신발의 사이즈이다.
(2) 독일 특히, 작가가 살았던 Bayern 주는 초등학교에 해당하는 Grundschule 4년을 졸업하고 나면 고등교육의 세 갈래 Gymnasium, Realschule, Hauptschule로 나뉘게 된다. 따라서 고등학교 5학년은 이곳 표현으로 9학년, 한국 학제로 비교해 보았을 때 중학교 3학년 정도로 추정된다. 소설이 나왔던 당시의 학제가 지금과 동일한지는 확인하지 못하였다.
(3) 독일어의 스물하나는 Einundzwangzig로 “1과 20”으로 읽는데 그 발음이 까다롭고 유난히 길게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