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176, d+50]
그녀의 블랙박스를 보기로 했다. 뭔가 앞뒤가 맞지 않았다. 내게는 줄곧 자기도 이혼 생각 있다고 당당히 얘기하던 서아가, 열흘 전 그녀의 법률대리인이 법원에 낸 준비서면엔 이혼을 원하지 않는다고 했다. 행복한 결혼생활을 유지하고 싶다고 했다. 뭐지? 내게 했던 얘기는 그냥 홧김에 내뱉은 건가? 내가 조정신청서에서 주장한 여러 이혼사유들은 모두 다 회복이 가능한 것들이라고 반박했다. 회복이 가능하다면 그녀는 왜 한 달째 아무런 움직임을 보이지 않는 걸까? 카톡도 대면 대화도 없이, 매일 밤 자신이 묵는 안방의 문을 쾅쾅 닫으며 분노를 표출하면서, 법원에 그렇게만 얘기하면 자연스럽게 회복되는 건가?
『니가 지금 상황을 이렇게 만든 거야. 너 때문에.』
『행동하기 전에 잘 생각했어야지.』
몇 달 전 그녀의 날 선 메시지들이 다시 떠올랐다. 그런데 이제 와서 회복이 가능하다고? 뭔가 이상했다. 몇 날 며칠을 혼란과 고민 속에서 보내다 그녀 차량에 있는 블랙박스가 떠올랐다. 서아는 운전 중에 통화를 자주 하는 타입이니 블랙박스 영상을 보면 자신의 언니들이나 지인과 통화하는 내용을 통해 그녀의 생각을 엿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블랙박스 영상의 대부분은 다른 직장인들과 마찬가지로 8시쯤 회사로 향하고 오후 6시 이후에 집으로 돌아오는 평범한 루틴뿐이었다. 이 블랙박스는 그녀와 사귀고 3개월 정도 되던 날 25만 원 들여 그녀에게 사준 블랙박스였다. 왜 돈을 이런저런 데에 많이 썼을까? 당시엔 그녀의 전 남자친구와 또 '친한 동생'에 대해 신경이 많이 쓰였다. 연봉이 나보다 많았다는, 5년 가까이 사귄 전 남자친구 그리고 '친한 동생'이라며 '돌쇠'라는 별명을 붙여줬다는 그 사람은 자동차에 대해서 모르는 게 없다고 했다. 일종의 질투, 시샘이랄까. 서아의 전 남친은 서아에게 블랙박스며 여러 액세서리며, 또 자취방에 있는 가전제품들을 꽤나 많이도 선물해 줬다. 그녀는 나와 연애를 막 시작했을 때에도 전 남친이 선물한 자취방의 물건들을 못 돌려주고 있어 잘 쓰고 있다며 친절하게 설명해 줬다. 이상하리만큼, 당당히도……. 그렇기 때문에 난 그의 흔적이 자꾸 생각나 새로운 블랙박스로 덮고 싶었다.
(그리고 그녀는 전 남친과 사귈 때 찍었던 사진들마저 "추억"이라며 나와 사귈 때에도 지우지 않고 있었으니, 할 말은 다 한 셈이었다. 그걸 지우라고 하면 왠지 쪼잔해 보이고, 그냥 놔두자니 그녀의 자취방에서 동고동락했을 전 남자친구와 그가 안은 그녀의 강아지들(코코, 보리)의 모습이 사진첩에서 툭툭 튀어나오곤 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몰랐던 것이고 지금의 나라면 그 사진들을 다 지우라고 얘기했을 것이다. 비록 그녀가 "추억"이라고 주장하는 것에 너무 잔인하게 요구하는 것 같지만……. 가만, 과거에 사귀었던 연인과 찍은 사진을 "추억"의 범주에 넣는 것이 과연 맞을까?)
며칠 뒤에 다시 블랙박스에서 SD카드를 꺼내 노트북에 연결했다. 11월 마지막 주의 영상이었다. 마우스 커서로 동영상 타임라인을 큼직큼직하게 건너뛰다가 어느덧 익숙한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많이 보던 상가의 모습들… 내가 가끔 출장 갔을 때 보던 풍경이다. 서아의 차가 내 직장이 있는 P시내로 들어온 것이다. 그것도 토요일 아침 8시에. 차는 P시 외곽에 있는 한 아파트 단지로 들어갔다. '주말에 고객을 만나기라도 하는 건가?' 예전 기억에 그녀는 평일에 시간이 없는 고객들을 위해 가끔 주말에 그들의 집을 찾아가서 서류를 받아오기도 했었다. 그녀의 차는 단지 주차장에 주차된 후 시동이 꺼졌다. 영상의 시간은 오전 8시 33분. 화면은 그녀의 차가 바라보고 있는 주차된 차량들의 모습만 비치고 있었다. 쿵 하고 문이 닫히는 소리와 블랙박스가 충격을 감지하는 삐빅 소리가 거의 동시에 들렸다. 차에서 아무 소리도 안 나는 것으로 봐서 누가 차에 탄 건 아니다. 그녀가 차에서 내렸다. 하지만 화면은 여전히 주차된 차량들만 비추고 있었다. 어디 갔지? 블랙박스 시야에서 벗어나기 위해 운전석에서 내리자마자 쭉 옆으로 걸어간 건가?
‘후방 카메라!’
그래. 후방카메라 화면이 보이지 않았다. 블랙박스 뷰어 구석의 메뉴를 찾아서 후방카메라 화면을 띄웠다. 주차하고 차 뒤편으로 빠져나간 그녀가 주머니에서 뭔가를 귀에 가져다 댔다. 스마트폰이었다. 통화를 하는 듯 시선은 약간 아래를 향하며 걸음을 천천히 왼쪽으로 옮기다 오른쪽으로 옮기다가 전화를 끊었다. 시선은 다시 정면을 향하며 왼쪽을 바라보며 한두 발짝 걷다가 다시 반대편을 바라보며 걸었다. 30초쯤 지났을까. 고개를 다시 왼쪽으로 획 돌리며 그녀의 시선은 그쪽으로 고정됐다.
‘1초, 2초, 3초…….’
무의식적으로 초를 세며, 아니 내 심장박동을 느끼며 내 시선 또한 그녀와 마찬가지로 화면의 왼쪽 구석을 향했다. 멀리서 모자를 눌러쓰고 성큼성큼 다가오는 한 남자.
‘10초, 11, 12…….’
그 남자의 시선은 목표가 있다는 게 느껴질 정도로 곧고 거침없었다. 걸음걸이도 마찬가지였다. 화면의 오른쪽을 보았다. 화면에 비친 거리로 봤을 땐 그녀의 차에서 50미터 정도 떨어져 얼굴이 픽셀(pixel) 단위 20여 개 조각으로 구성된 듯 뭉개져 보였지만 나는 그녀를 대번 알아볼 수 있다. 너의 이마, 머리카락을 말총머리처럼 뒤로 질끈 묶을 때 드러나는 너의 동그란 이마.
동그란 이마가 서쪽의 남자를 향한다. 남자의 속도만큼은 아니지만 그녀 또한 그 남자 쪽으로 향했다. 두 사람의 거리가 점점 좁아진다. 다섯 발짝, 세 발짝, 한 발짝……. 그 남자와 그녀의 사이가 0발짝이 됐을 때의 프레임은 두 사람의 얼굴이 서로 맞닿아있는 모습이었다. 남자는 입을 내민 듯하기도 했고 고개도 약간 앞으로 기울어진 것 같았다. 마치 상대에게 입맞춤하려 할 때 몸이 그렇게 기우는 것처럼. 일반적인 TV나 영화 동영상처럼 움직임이 티 없이 완벽하고 매끄럽지가 않았다.
(FPS라는 단위가 있다. ‘Frames Per Second’, 즉 초당 프레임 수. 일반적인 블랙박스 영상의 프레임은 초당 20 프레임 정도다. 쉽게 말하면 0초부터 1초까지의 시간 동안 그림이 그려진 20장의 책장이 넘어간다는 뜻. 어릴 적 교과서의 빈 여백에 ‘졸라맨’의 모습을 한 장 한 장 그려서 책장을 후루룩 넘기던 시절처럼. 하지만 후방카메라의 경우 프레임 수가 전방카메라의 절반 수준에 불과해서 영상은 훨씬 더 끊기는 듯한 느낌이었다.)
서로가 입맞춤하는 듯한, 적어도 남자가 그녀의 볼에 뽀뽀를 살짝 하는 듯한 프레임의 다음 장면은 남자가 걷는 속도를 줄이지 않은 채 그녀를 와락 안은 나머지 그녀의 몸이 살짝 뒤로 밀리는 모습이었다. 후방카메라에 비친 그 둘은 점점 그녀의 차 쪽으로 다시 다가왔다. 그리고 그녀의 표정……. 남자의 박력 있는 포옹에 쑥스러운지 입은 웃음기를 띤 듯 약간 벌리고 눈길은 정면이 아닌 약간 아래쪽으로 떨궈 자신의 발을 보며 차의 조수석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래. 그 표정이 있었지.’
나도 잊고 있었던 그녀의 표정……. 그녀를 처음 만나 자기소개를 나누고 하천변 산책길을 걸으며 언뜻 보였던 그녀의 쑥스러웠던 표정이 있었다. 다른 남자에게 그 표정을 보여주는 그녀의 모습을 보니 순간 가슴이 철렁한 느낌이 들었지만 그것도 잠시, 이젠 이혼을 결심한 나였기에 측은한 마음도 들었다. 이젠 서로가 다시 행복해졌으면 좋겠다는 마음…….
‘그래. 그렇게라도 행복해라.’
그 둘은 조수석 쪽 문을 열고 부스럭거리며 뭔가를 꺼낸 후 다시 차량의 뒤편으로, 후방카메라 화면의 왼쪽으로 사라져 갔다, 남자가 등장했던 왼쪽으로. 시간은 오전 8시 40분이 되어갔다. 영상을 띄엄띄엄 건너뛰며 9시, 10시, 11시가 지나자 “시스템이 종료됩니다”라는 안내음성과 함께 영상도 종료되었다. 내가 사준 블랙박스는 상시녹화가 아니었기 때문에 시동이 꺼진 후 3시간 정도가 지나면 자동으로 종료된다.
다음 영상을 틀었다. 타임라인은 같은 날 오후 3시 20분께부터 시작됐다. 후방카메라의 화면은 맑은 겨울 하늘을 비추고 있었다. 곧이어 트렁크 문이 위로 열린 것임을 깨달았다. 그녀가 차의 잠금을 해제하고 트렁크를 연 후 시동을 켜자 다시 녹화가 시작된 것이다. 그녀가 운전할 때마다 항상 메들리처럼 반복해서 듣는 남자 가수들의 발라드 음악이 줄지어 나오고 있었고, 영상 속 파란 하늘이 화면에서 점점 위로 밀려 올라가더니 화면 아래쪽에서 아파트 건물과 아스팔트가 등장했다. 그리고 그 트렁크 문을 닫는 그녀의 모습이 보였다. 오전에 그 남자와 만났을 때에는 롱패딩을 걸치고 있었는데 지금은 롱패딩은 없고 갈색 긴소매 니트 차림이다. 그리고 앞머리에는 헤어롤이 말려 있었다. 오전 8시부터 오후 3시까지 약 7시간 동안 행적이 묘연했던 그녀는 씻은 듯 헤어롤을 말고 다시 나타났다. 그리고 조수석에 누군가 탔다.
“자기야. 다 챙겼어?”
그 남자다. 기본적으로 일반 남성보다 조금은 굵은 목소리이면서 아주 약간 허스키한 소리도 섞여있다. 목소리로 봐선 40대 중반의 목소리 같았다. 그나저나, "자기야"라고? 그녀의 차는 그 남자의 집이 있는 P시에서 출발해 다시 A시 방향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차 안은 발라드 가수들의 감미로운 절규들과 경유차의 드렁드렁한 소음이 섞여 그 둘의 대화하는 소리는 잘 들리지 않았다. 그나마 속도가 줄거나 신호등에 멈춰서 있을 때에만 겨우 알아들을 수 있었다.
“저거 나도 자기 주려고 샀는데. 방향제.”
남자가 그녀의 차 안에 있는 방향제를 가리키며 말한 듯했다.
"아, 나도 방향제 새거 있었는데……."
"근데?"
"그거 지금 미니쿠퍼에 있어!"
그녀가 말한 미니쿠퍼는 올해 초 내가 새로 산 미니쿠퍼 일렉트릭(전기차)을 뜻했다. 내 돈으로 산, 내 명의의 차였지만 평소 그녀가 출퇴근이나 주말에도 사용하도록 양보했었다. 그리고 4개월 전 내가 이혼 얘기를 꺼낸 후 미니쿠퍼를 다시 가져가게 되었고 그녀는 미처 회수하지 못한 방향제를 떠올린 것이다.
"아……. 아하……."
'미니쿠퍼'라는 네 글자만 얘기했는데도 그 남자는 이미 내용을 파악했다는 듯한 반응의 탄식이었다. 즉, 미니쿠퍼가 누구 차인지도, 그리고 그녀가 한동안 타고 다녔다는 사실 등의 어느 정도 배경지식을 그 남자는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이었다.
"언제라고 했지? 조정기일? 다음 주 수요일?"
"화요일."
"미친놈. 오백이야 오백! 나 같으면 그 돈 가지고……. 둘 다 돈도 없어 보이는데……."
'둘 다'라는 말에 서아는 머쓱한 웃음을 지으며 조수석에 앉은 그에게 "돈 없어 보여요? 그렇구나, 돈 없어 보이는구나……."라고 반응했다.
차 안의 그 둘의 대화 내용은 활기가 느껴졌다, 나에 대한 욕을 제외하면. "둘 다 돈도 없어 '보인다'"라……. 서아는 내 사진을 그 남자에게 보여준 건가? 아니면 추측한다는 뜻의 '보인다'인가?조정기일이며, 변호사 선임비용이며 그에게 얼마나 얘기한 것인가? 오후 4시가 지나고 서아의 차는 A시의 중심가를 향해 여전히 달리고 있었다.
“자기야 오늘 우리 인사만 딱 하고 저녁 딱 먹고 공식행사 끝나면 자리에서 일어나자. 그리고 내일 여주 가서 한 바퀴 돌고 맛있는 거 먹자.”
남자는 이번 모임이 처음은 아닌 듯 어떻게 흘러갈지 알고 있는 듯했고, 서아는 초조했는지 모임장소가 가까워질수록 말수가 줄어들었다. 큰 도로를 달리던 차는 어느덧 상가가 즐비한 골목길로 들어가고 있었다. "공식행사"라……. 어떤 모임이 있는 걸까? 그리고, 여주 아울렛? 맛있는 거 먹는 사이? 이 남자는 도대체 누구일까. 새벽 3시, 그녀가 터뜨린 잭팟(jackpot) 앞에서 난 더 이상 눈꺼풀을 들 힘이 남아있지 않았다. 노트북을 닫지도 못한 채 이어폰만 귀에서 빼내 책상 위로 던진 후 침대에 몸을 눕혀 잠을 청했다.
5시 50분에 눈이 떠졌다. 3시간 정도 잔 걸까. 심장이 말 그대로 계속 쿵쾅거려 제대로 잘 수가 없었다. 영상에서 밤 10시경 그녀가 다시 그 남자의 집으로 바래다줄 때의 모습이 계속 떠올랐다. 남자는 그녀의 차에서 내려 근처에 있는 자신의 차에서 뭔가를 꺼내 그녀가 앉아있는 운전석 쪽으로 다가갔다.
"아까 내가 말한 방향제. 잘 써."
"헤헤. 고마워!"
그리고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2~3초간 이어졌다. 남자가 입은 패딩에서 나는 소리, 그리고 이어진 그녀의 애틋한 신음소리. 마치 강아지가 가볍게 낑낑 거리는 듯한……. 남자가 운전석 창문을 통해, 즉 블랙박스 카메라가 비추지 않는 곳에서 방향제 선물을 그녀에게 건네주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그들이 포옹을 한 건지 그 이상을 한 건지는 소리만으로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분명히 알 수 있었던 것은 아니, 모를 수 없었던 것은 그녀의 앙탈진 신음이었다. 우리 연애할 때에도 넌 그런 소리를 냈었지. 그랬지…….
"아이, 담배냄새!"
"알아 미안해(웃음). 내일 봐 자기야!"
"응. 방향제 고마워!"
이 브런치에 연재 중인 글은 모두 허구이며, 실존 인물이나 사건과 일치하는 부분은 우연일 뿐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