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166, d+40]
토요일 오후 1시쯤 씻고 사무실 출근 채비를 마쳤다. 차를 몰고 아파트 단지에서 나와 왕복 8차선으로 된 큰 사거리에 다다라 좌회전 차선의 맨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반대편에선 녹색신호가 떨어지자 대기하고 있던 수십대의 차량들이 일제히 3열 횡대로 열을 맞춰 내가 있는 쪽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시선을 좀 더 거슬러 올라가보니 그들이 있었던 큰 도로는 저 멀리 500미터 쯤 떨어진 39층짜리 아파트 단지의 등 뒤에서 나타나 내가 있는 교차로까지 내리막길처럼 주욱 이어져 있었다. 그래서 맞은편에서 다가오는 차량들의 물결은 마치 나를 덮치려는 쓰나미의 한 장면 같았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저 수없이 많은 자동차 중 한 대라도 미친 생각을 하고 나에게 돌진할 수 있을텐데…….'
생각해보면 이 도로 한복판에서 누군가 정면에서 내 차량으로 돌진한다면 난 차에서 내리지도 못하고 안전벨트를 푸는 시늉만 하다가 그 자리에서 즉사할 것이다. 아니면 불구가 되거나. 그런데 난 지금 내 눈앞에서 나를 향해 밀려 들어오는 자동차의 파도를 보며 그동안 아무 느낌이 없었던 건가? 나를 방어해주는 건 물론 이 차체(車體)와 (제대로 작동할 거라고 믿는 수밖에는 달리 할 수 있는 게 없는)에어백이지만, 내 자동차를 방어해 줄 것은 사실 없지 않은가? 요즘 다들 자기 자동차를 신체의 일부처럼 애지중지하는 풍토에 내 차를 방어해 줄 것이 하나도 없다는 생각에 아주 잠시 불안감을 느꼈다.
과학기술이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고 있다지만 도로 위에 서 있는 우리와 자동차들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바닥에 금 몇개 그어놓은 것을 가지고 다들 놀라울만큼 그 금을 밟지 않으려 노력하며 생활하고 있다는 사실이 가끔 나를 경이롭게 한다. 보이지 않는 서로에 대한 믿음,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그가 나에게 미친 짓을 하지 않을 거라는, 그에 대한 나의 믿음. 더 정확히는 그가 그런 범죄를 저지르지 않을 거라는 나의 희망적 추측이나 사회에 대한 신뢰, 그런 믿음이 이 사회를 아주 아슬아슬하게 줄타기하듯, 그 줄이 끊어질듯 말듯 지탱하며 하루 하루 살아가고 있는 것 같았다.
갑자기 이런 뜬금없는 생각들이 가지를 치게 된 이유는, '결혼도 그런 게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닿았기 때문이다. 상대방이 어떤 미친 구석이 있는지도 모른 채, 수십 년을 함께 나란히 한 방에서 무방비로 누워 생활한다는 것이 어떻게 보면 조금은 불안하지 않은가? 무섭지 않은가? 나와 같은 공간을 쓰고 있는 이 사람이, 내가 자고 있는 사이에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을 벌일지 모른다. 베개를 양손에 쥐고 내 얼굴 위로 누른다던지, 아니면 주방에 있는 식칼을 가져와 내 가슴에 내리꽂게 되면, 그때까지 세상모르고 입 벌리며 자고 있는 내 모습은 얼마나 가여울까 생각한 적이 있었다. 이 결혼 한참 전인 20대 쯤 됐을 때 그런 결혼이라는 제도가 오직 상대방에 대한 아주 가느다란 신뢰 하나만을 바탕으로 유지된다는 것이 놀라웠던 것이다. (그리고 TV나 주변에서 보고 들은 바로는 서로를 '내 운명'이니 '천생연분'이니 부르는 것보다 '웬수'라고 부르는 모습을 더 많이 봐왔기 때문에 더 놀라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결혼은 왜 할까'라는 의문은 이혼을 위해 법적으로 다투고 있는 이 시점에 처음 가졌던 것은 아니다. 대학교 1학년 때 좋아했던 같은 학과의 누나가 풋내기였던 나는 안중에 없고 계속 누군가를 마음에 두고 있는 모습이, 그 시절에는 그렇게 마음 아플 수가 없어서 결혼이라는 제도에 대해 회의를 가졌던 적이 있다. 결혼은 내가 좋아하는 사람을 구속하여 다른 사람이 접근 못하게 하는 기능도 있지만, 거꾸로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가버리면 난 아무 손도 쓸 수 없는 비운의 제도라는 걸…….
8차선 도로 위에서, 쓰나미처럼 몰려오는 수십대의 차량들이 멈추고 곧이어 좌회전 신호가 들어왔다. 차선 제일 앞에 서있던 나와 내 뒤를 따르는 사람들은 바닥에 포물선으로 그려진 점선을 따라 하나둘 씩 동쪽으로 향했다. 맞은편에서 우회전으로 들어오는 차량 행렬과 지하차도에서 나오는 자동차들 속에 묻혀가면서 나의 상념 또한 그렇게 조금씩 희미해져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