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장 접수(이혼보다 김치)

[D+126, d-day]

by mijo

소장이 접수됐다. 각방 생활한 지 126일만에 법원에 정식으로 서류가 접수된 것이다. 다만 소송 전에 조정절차를 먼저 거쳐야 하기 때문에 ‘조정신청서’ 형태로 우선 접수되었다. 「가사소송법」 제50조에 따른 조정 전치주의(調停 前置主義)의 내용이다. 드디어 사건번호가 부여되었고, 이젠 ‘대한민국 법원’ 홈페이지의 ‘나의 사건’ 메뉴에서 사건번호와 내 이름만 입력하면 진행 상황을 알 수 있었다.


5일 전 법무법인Q 대표번호로 담당변호사가 전화를 걸어왔다. 나를 상담해줬던 은갈치 양복의 40대 변호사가 아닌 젊은 목소리의 여성이었다. (나중에 알았지만 처음에 날 상담하고 계약까지 체결했던 그 변호사―사무장이 "우리 변호사님 유능하시다"며 추켜세웠던―는 다시 대면하거나 대화할 일이 없었다. 단계별로 변호사들의 역할이 나눠져 있다는 것도 1년이 지날 쯤에야 알았다.) 그녀는 내가 법무법인에 제출했던 이혼진술서를 토대로 조정신청서를 작성했다면서 이메일로 초안을 확인해달라고 했다. 통화가 끝나고 법무법인 대표번호로 문자메시지가 왔다.


『안녕하십니까. 법무법인Q입니다. 귀하의 사건 관련하여 금일 조정신청서 컨펌 파일을 이메일로 보내드렸으니 확인 후 수정이나 컨펌 의견을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


이메일을 열어보니 아직 조정단계이기 때문에 ‘원고’, ‘피고’ 대신 ‘신청인’과 ‘피신청인’의 수식어가 신선했다. 구구절절하게 썼던 나의 진술서의 내용은 아주 간결하게 요약됐지만 중간중간 극단적인 표현들이 눈에 띄지 않을 수 없었다. 변호사가 작성한 초안에 따르면 피신청인은 혼인기간 내내 나를 무시하는 언행을 서슴지 않았고, 그녀의 남사친 관계 또한 문란할 정도여서 내게 정신적인 고통을 안겨줬다. 또한 피신청인은 줄곧 일방적으로 부부관계를 거부해 배우자인 나를 비참하게 만들어 혼인관계를 파탄에 이르게 했다. 변호사의 손길을 거친 나의 결혼생활은 소송에 적합하도록 조금 더 단순하고 명료하게 보정되어, 그녀는 세상에 둘도 없는 혼인 파탄자로, 나는 눈물없인 들을 수 없는 비운의 남편으로 묘사되었다. 그리하여 신청인인 나는 그녀에게 위자료 1,000만원과 재산분할 명목으로 1,500만원을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어디서부터 얘기해야 할지 막막한 느낌이 들었다. 극적인 묘사부터 내가 원하지도 않는 위자료와 재산분할금이 마치 기본값처럼 들어가 있는 부분까지……. 하지만 그런 자잘한 표현들까지 일일이 문제 삼다가는 또 일주일이 의미없이 흐를 게 분명했다. 결국 담당변호사에게 위자료까지는 바라지 않는다고 얘기했고 재산분할 부분은, 그동안 내가 두 배 더 부담했던 생활비며, 장보고 밥 하고 설거지하고 쓰레기 버렸던 집안일들을 생각하니 1,500만원 정도는 주장해도 되겠다 싶어 살려두었다. 그렇게 조정신청서가 접수됐고 사건번호가 부여됐다.


『안녕하십니까, 법무법인Q입니다.

귀하의 조정신청서 접수로 인한 법원 비용과 사건번호를 안내드립니다.

입금이 확인되는 대로 법원 납부 도와드리겠습니다.

- 납부금액 : 56,500원 (인지대 4,500원, 송달료 52,000원)

※ 계좌번호 : 농협 XXX-XXXX-XXXX-XX (예금주 법무법인Q)

- 사건번호 : A지방법원 2024너XXXXX 』





'그깟 김치가 뭐길래'


평소와 다름없는 토요일 아침이었다. '평소'라는 단어를 썼지만 와이프와 각방을 쓴 지 4개월째로 접어들면서 이젠 어느정도 안정되고 고착화된, 거창한 수식어를 붙이자면, '뉴 노멀(new normal)'의 주말인 것이다. 즉, 토요일 아침 9시쯤이면 난 서재에서 일어나 잠자리를 정돈하고 홈트레이닝을 1시간 정도 한다. 운동이 끝나면 씻고 나와 주방에서 점심을 간단히 요리해 서재로 가져와 먹고 오후 1시쯤 사무실에 출근하기 위해 집을 나가고 나면, 그녀는 오후 두세 시쯤 거실에 나와 TV를 켜고 활동을 시작한다. 각방 생활하기 전에도 그녀는 잠이 많아 주말이면 점심이 될 때까지 일어나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의 늦잠 생활 패턴이 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최소한 주말 아침에 서로 마주칠 일이 없으니 오전 동안 거실과 주방은 온전히 내 차지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 아침은 달랐다. 8시쯤 잠에서 깨어 맞은편 화장실을 갔다가 돌아오며 무심코 거실 가운데에 있는 커피테이블로 시선을 옮겼는데 처음 보는 물건이 보였다. 어젯밤 11시쯤 퇴근하면서 그곳을 지나가며 쓰윽 봤을 땐 사과대추만이 조그만 그릇에 담겨 테이블 위에 올려져 있었다. 연두색 바탕에 드문드문 갈색이 물든 동그란 대추. '대추 철이 왔구나'라고 생각하며 방에 들어갔었는데, 오늘 아침에 보니 사과대추가 담긴 그릇 너머로 또 하나의 약 봉투가 있었다. '에이, 설마…….' 하는 마음에 발길을 돌려 현관쪽으로 향했다.


‘설마 또 오신 건 아니겠지.’


처음 보는 운동화가 놓여 있었다. 장모님이 자주 신는 신발이었다. '어제도 있었나?' 어젠 현관에 크게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현관에 들어올 때마다 열 켤레가 넘는 서아의 신발 중에 틀린 그림 찾기처럼 매일 세어볼 수는 없는 노릇이었기 때문이다. 지난번처럼 그 일이 또 일어나서는 안 된다. 난 서둘러 여행용 세안도구를 가방에 집어넣었다. 씻을 시간이 없다. 사무실 가서 어떻게든 씻자는 생각으로 속옷만 갈아입었다. 턱수염은 까끌까끌하고 얼굴 붓기는 가라앉지 않았다. 짜증이 날 새도 없이 부리나케 집을 나왔다. 보름 전쯤 주말에도 장인어른과 장모님이 내가 잠든 사이 불시에 찾아왔었다. 한 마디로 허를 찌른 기습이었다. 그때도 토요일 아침이었다. 사무실에 출근하기 위해 씻으러 가던 중 갑자기 빈 방 문이 열리고 그들이 등장했으니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무실에 용무가 있어 나중에 말씀드리겠다는 내 말은 들으려고 하지도 않고 막무가내로 붙잡는 그 둘을 뿌리치며 내 집에서 도망치듯 나왔었다.





오후 8시쯤 사무실에서 나왔다. 저녁 끼니로 때운 것이라고는 컵라면 하나 뿐이었다. 현관문 비밀번호를 누르고 가장 먼저 확인한 것은 아침에 봤던 장모님의 그 신발의 존재 여부였다.


'하아…….'


장모님의 신발은 여전히 있었다. 놓여있는 위치만 조금 바뀐 것 같았다. 2초 정도 멈칫하다 신발을 벗고 중문을 열였다. 소파 위에는 장모님이 옆으로 누워 머리를 현관쪽으로 두고 누워있다가 문이 열리는 소리에 머리맡에서 안경을 허겁지겁 찾아 쓰고 있었고 서아는, 뭐, 똑같았다. 커피테이블 앞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거실 TV에만 시선을 고정시킨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마치 내가 귀신처럼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다는 듯이. 내 서재 앞으로 다가가자 문앞엔 손톱만 한 화장지 조각이 떨어져 있었다. 아침에 내가 문을 닫으며 문틈에 보이지 않게 끼워 놓았던 화장지 조각이었다. 누군가 내 방문을 열었다. 누구지? 장모님? 서아?


문을 열자 방 안에는 김치 냄새가 가득했다. 시골에서 어머니가 챙겨 담아주셨던 김치……. 내 서재에 있는 냉장고에서 이 김치를 지금 거실에서 쉬고 있는 두 모녀가 저녁식사 때 꺼내 먹은 것이다. 더 화나는 점은 김치통을 주방으로 가져가지도 않고 내 방 안에서 뚜껑을 열고 접시에 김치를 옮겨담았다는 사실이었다. 그렇지 않고서는 방에 이토록 김치 냄새가 가득 밸 수가 없었다. 보름 전에도 퇴근하고 나서 방문을 여니 지금처럼 김치 냄새가 짙었다. 그때도 장모님, 장인어른이 집에 머물렀었다.


씻지도 않은 채, 아니, 거실은 두 모녀가 차지하고 있었으니 씻지도 '못한' 채 불을 끄고 라꾸라꾸 침대에 누웠다. 흥분이 가라앉지 않았다. 난 정말 이해할 수 없었다. 이런 시국에 집에 불시에 찾아오는 것은 둘째치고, 내 방에 거리낌없이 들어와 냉장고에서 김치를 꺼내 먹어야 했을까? 김치, 내 어머니께서 챙겨주신 이 김치를, 한 가정이 갈라지기 일보직전인 이런 예민한 상황에서……. 먹는 게 그렇게 중요해? 그깟 김치가 뭐길래……. 그녀도, 그녀의 가족도 지금 이 상황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있긴 한 건가? 이것도 평소에 내 말과 행동을 경시하는,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태도의 발로(發露)인가?





소장이 접수되고 꽤 걸릴 줄 알았던 송달이 며칠만에 이뤄졌다. 그날은 서울로 출장 갔다가 저녁쯤 사무실로 복귀한 날. 이왕 사무실에 들어왔으니 소장이 과연 상대방에 송달되기 위해 출발했는지 한번 조회해보고 싶었다. (요즘은 하루에 두번 이상씩은 '나의 사건'을 조회하는 버릇이 생겼다.) 사건번호를 입력하니 소장이 바로 오늘 서아에게 송달됐다는 기록을 보는 순간, 가슴이 뛰었다. 왜 뛰었을까? 이제 본격적으로 전투가 시작됐다는 신호이기 때문에? 이제 그녀도 나의 의지를 조정신청서를 통해 확인했겠지. 한달 전 그녀와 문자로 다툴 때 난 변호사와 상담할 거라는 계획을 이미 얘기했었다.(그녀가 내 말을 믿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디에서 받았을까? 퇴근 후 내 집에서, 아니면 그녀의 회사에서? 법원 집행관을 통해 조정신청서를 직접 받아본 그녀의 기분은 어땠을지, 집으로 돌아가는 내내 상상해보게 되었다. 평소에 그녀가 정말로 화났을 때의 말투를 응용하면,


'아, 이 새끼가 진짜 해 보자는 거지?'


라고 되뇌었을지 모른다. 아니면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습관적으로 사진 찍어 공유하기를 좋아하는 그녀는 손에 든 조정신청서를 찍어 자신의 가족 단톡방에 올리며 "이 새끼가 제대로 해보자고 나오네."라고 센 척을 하며 전의를 다지는 말을 했을지도 모른다.


'그래. 이제 네 차례야. 네가 원하는 걸 정리해서 우리쪽으로 넘겨봐.'


그녀 또한 조만간 변호사를 선임해서 진행할 것이고, 변호사들의 화법이 그렇듯 그녀 쪽도 세게 나올 확률이 높지 않을까 생각했다. 나의 작은 행동들도 크게 부풀려서 내게도 잘못이 있는 것처럼 얘기하겠지.


『니가 지금 상황을 이렇게 만든 거야. 너 때문에.』


『갑자기 그렇게 호칭을 반말로 부르면 내가 만나서 얘기하고 싶겠어? 왜 그러는 거야?』


『지금 너랑 문자로 장난치고 있을 시간 없으니까 만나서 얘기할 거 아니면 연락하지마. 그리고 니네 부모님한테나 똑바로 말해.』


두달 전 그녀와 다퉜던 문자 내용이 다시 떠올랐다. 자, 이제 어떻게 할텐가? 만나서 자신에게 사과 먼저 하고 얘기해야 한다고 고집부렸던 그대여, 문자로는 얘기 안 할 거라는 그대여, 이젠 문자로, 활자로 얘기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왔다. 진지하게 임해라.




(이 브런치에 연재 중인 글은 모두 허구이며, 실존 인물이나 사건과 일치하는 부분은 우연일 뿐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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