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182, d+56]
이혼 얘기를 꺼낸 날부터 각방 생활한 지 6개월째, 그리고 이혼(조정)신청서를 낸 지 거의 두 달 만에 조정기일이 열렸다.
"선생님 혹시 조정기일에 참석하실 수 있으세요? 당사자 없이 변호사가 참석해도 되긴 하는데……."
조정기일을 일주일 앞두고 법무법인Q 대표번호로 전화가 왔다. 내 담당이라는 정유나 변호사였다. 당사자 없이 법률 대리인만 참석해도 상관없지만 그래도 이왕이면 참석했으면 좋겠다는 얘기를 에둘러 설명하고 있었다. 회사에 연차를 내고 일정은 뺄 수 있었다. 업무에 지장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무엇보다도 당사자들 없이 조정한다는 게 과연 효과적일지 의문이었다. 더군다나 이 담당 변호사와 나는 만난 적도 없으니 나에 대해서, 내 상황에 대해서 얼마나 잘 알고 있을까? 법무법인에 처음 상담할 땐 나보다 대여섯 살 더 많아 보이는, 그래도 나이대가 비슷한 40대 초반의 변호사가 상담했었는데……. 그때까지만 해도 그 변호사가 처음부터 끝까지 담당할 줄로 알았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날 수임료 550만 원 결제를 마치고 사무실을 나설 때에도 중년 사무장이 “우리 변호사님이 유능하시니까 아-주 잘 도와드릴 거예요.”라고 한마디 덧붙였으니까. 그러고 나서 2주일 정도 뒤에 받은 문자메시지에는 이렇게 설명이 돼있었다.
『안녕하십니까. 법무법인Q 입니다. 귀하의 담당 팀은 담당변호사 정유나, ◇◇◇, ○○○, 담당실장 ◎◎◎, 담당사무원 □□□입니다.
정유나 변호사실 ☎070-XXXX-XXXX [주연락처]』
만나지도 않은 변호사 연락처 옆에 “[주연락처]”라고 표시돼 있고, 이후 연락도 그 변호사한테서만 왔다. (은갈치 변호사는 두 번 다시 만날 일이 없었다.) 상담 내용이야 어떻게든 전달됐겠지만, 녹음이 된 것도 아니었으니 전형적인 활자 형태로, 그것도 상담하던 은갈치 변호사가 끄적여 요약된 형태로 전달됐을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나 또한 여러 가지 이혼 사유 중의 한 가지 유형으로 요약돼서 전달됐을 것이다. 전화로 돌려 말하는 변호사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아까 참석할 수 있는지 물어보신 이유는, 당사자들이 참석하면 대화가 바로바로 되고 조정이 빨리 되니까(그러신 거죠)?"
"네. 그렇죠. 양측 의사도 바로 확인되니까……."
“알겠습니다. 그럼… 조정기일 시작하기 한 30분 전에 미리 도착해 있을까요?”
“아니에요, 선생님. 그냥 시간 맞춰서 오시면 됩니다.”
“아 그래요?”
변호사는 내게 그날 일찍 올 필요도 없고 조정기일 시간에 늦지 않게만 오면 된다고 했다. 조정기일에 이렇게 그냥 참석하는 건가? 미리 만나서 전략을 짜야 하는 거 아닌가? 며칠 동안 나는 잠들기 전에 눈을 감고 이미지 트레이닝을 하듯 조정기일의 상황을 떠올려보려고 했다. '조정기일'이라는 절차에 대한 경험은 야트막하게 가지고 있었다. 좋은 회사에 다니는 듯 말쑥한 양복과 고급 무테 안경을 착용한 어느 40대 남성이 경매로 나온 도로 부지 한 뙈기를 낙찰받아 매입했다. 지자체가 관리하는 도로였지만 그 땅만 지자체 소유가 아니었다. 그것이 경매에 나왔고 그가 그 땅을 사들인 것이다. 그는 바로 그 도로를 관할하는 B시를 상대로 소송을 걸었다. 자신한테 그동안의 사용료를 달라는 취지였다. 지금처럼 '조정기일'이 잡혔고 B시청의 담당 공무원이었던 난 법정이 아닌 회의실 같은 조정실에 참석했다. 판사님으로 보이는 지긋한 연세의 남성과, 소송을 제기한 40대 남자, 그리고 나 셋이서 협상을 했던 기억이 있다.
하지만 이혼과 관련한 조정기일은 (다른 대부분의 사람들도 마찬가지겠지만) 이번 생에서 처음이었기에, 그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조정기일에서의 전략을 짜본다고는 하지만 감이 잡힐 리가 없었다. 어떤 주장을 해야 하지? 서아의 그 남자(내연남) 얘기를 꺼낼까? 그걸 지렛대로 삼을까? 그럼 서아쪽은 어떻게 나올까?
조정기일 3일 전. 법무법인Q 사무실에 찾아갔다. 조정기일이 어떻게 어떤 방식으로 이뤄질지 문의할 겸, 그리고 내가 확보한 블랙박스 영상 자료 몇 개를 출력해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미팅 장소는 몇 개월 전 처음으로 상담을 받았던 그때의 회의실이었다. 지난번과 똑같이 남향 창문을 바라보며 앉았다. 내가 가져온 출력물을 다시 한 장 한 장 넘기며 담당 변호사를 기다리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등 뒤의 출입문이 열리며 익숙한 목소리를 한 여성이 들어와 맞은편에 앉았다. 정유나. 전화 통화만 몇 번하고 실제로 대면한 건 오늘이 처음이었다. 하얀 덴탈마스크를 쓴 그녀는 자리에 앉아서도 별다른 얘기 없이 바로 본론을 얘기해줬으면 하면 눈빛을 보냈다. 다른 사건들로 시간 없으니, 내가 요청한 미팅이었기에 궁금한 게 뭔지 빨리 꺼내보라는 것 같았다.
“안녕하세요. 저……. 자료를 몇 개 가져왔는데요.”
쥐고 있던 자료를 주섬주섬 만지며 변호사가 볼 수 있도록 방향을 틀어 그녀 쪽으로 밀어 보여줬다.
“남자를 만나고 있었더라고요.”
내 말투는 담담했다. 아니, 심장은 조금 뛰었을지도 모른다, 티를 안 내려 했을 뿐. 토요일 아침 그 남자의 아파트 단지에서 그녀와 그 남자가 포옹하는 모습, 발그레한 표정으로 차 조수석에서 뭔가를 꺼낸 후 그 남자를 따라가는 모습, 그리고 오후 3시쯤 그 남자와 다시 차에 탔을 때 그녀의 앞머리엔 헤어롤이 말려있는 모습을 한장 한장 넘기며 설명해 줬다. 억눌린 감정이건, 원래 그런 성향이건 간에 아마추어 연극인처럼 펄펄 뛰며 “아니 세상에, 이 여자가 그새 남자를 처만나고 있었지 뭡니까!” 라며 처음 만난 변호사에게 소리치는 그런 성정(性情)은 아닌 것 같았다. 난 그런 타입은 아니었다.
“이걸 어떻게 확보하셨어요?”
내가 자료를 넘기며 설명하는 걸 조용히 듣던 그녀는 놀라기도 전에 자료의 수집 경위를 먼저 물어봤다. 역시 변호사의 직업병이랄까. 나는 각방 생활 전부터 서로의 자동차를 자유롭게 바꿔가며 사용하고 있었던 상황과, 그렇기 때문에 그녀 차량의 스페어키도 가지고 있어서 블랙박스에 접근이 가능했던 점을 설명했다.
“이분 참, 나이브(naive)하시네.”
블랙박스 화면이 출력된 자료들을 넘겨보던 변호사의 총평이었다. ‘순진하다’라는 그 표현은 왠지 내 앞이라 순화한 것 같았다. 나라면 ‘naive’라는 표현 대신 ‘dumb’, ‘stupid’를 사용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백주대낮에 자기 차의 블랙박스가 켜져 있는 상태에서 내연남 아파트 단지 한가운데에서 포옹도 하고, 차 안에서의 노골적인 애정표현과 대화도 고스란히 담겼기 때문에, 이건 ‘stupid’라는 수식 말고는 설명이 안 되기 때문이다. 내가 너라면 스페어 키를 철저히 숨기거나 블랙박스 영상을 주기적으로 지우거나 했겠지. 아니면 진작에 별거하면서 남자를 만나던지, 등X같이…….
월요일. 고대하던 조정기일 아침이다. 소장을 접수하고 2개월이 지났으니, 그리고 법무법인과 처음 상담하고 사건을 의뢰한 지 3개월 만에 첫 출석이니 고대할 만했다. 변호사, 판사 등 법률가들의 생각은 다르겠지만, 일반인의 시각에서는 여전히 긴 시간이다. 조정기일이 잡힌 때는 약 한달 전이었다. 그렇다면 한달의 기간 동안 변호사와 미팅을 하고 전략을 짤 줄 알았으나, 변호사는 조정기일 당일에 시간 맞춰 만나면 된다고 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좌우를 둘러보았다. 큰 병원에서 볼 법한 사무적인 느낌의 긴 벤치들이 조정실 문을 향해 놓여있었다. 바닥의 대리석이며, 벽이며 공간 전체적으로 회색의 이미지가 강했다. 말총머리로 머리를 묶어 등뒤로 늘어뜨리고 하얀 덴탈 마스크를 쓴 한 여자가 그 벤치에 앉아있었다. 정장 차림에 차분히 앉아있는 뒷모습에 정유나 변호사라는 걸 직감할 수 있었다.
“윤재희 선생님?”
“네. 안녕하세요.”
그녀가 확인차 내 이름을 불렀고 나는 가볍게 목례한 후 그녀 옆에 한 칸 정도 띄워 나란히 앉았다.
“선생님은 아직도 조정 의사가 없으신 거죠?”
조정기일 시작 5분 전에 변호사는 한번 더 내 의사를 확인하고 조정기일을 대하는 기본적인 내용을 알려주었다.
“조정위원이 선생님께 의사를 물어보면 직접 대답하셔도 되고요. 그밖에 불필요한 얘기 같은 건 안 하도록 조심해 주시고, 혹시라도 대답하시기 어렵거나 애매한 상황이 오면 제 쪽을 바라보시면 돼요. 그러면 제가 답변할 테니까…….”
“그럼 블랙박스 얘기는…”
“지금은 안 하시는 게 나을 거예요. 우선 상대방이 어떻게 나오는지 얘기 먼저 들어보시고,”
가벼운 운동화 소리가 들렸다. 그 여잔가? 내가 앉아있는 곳과 떨어진 벤치에 한 사람이 문을 보고 앉았다. 고개를 돌리기보다 흰자위로만 실루엣을 감지했다. 그리고 가벼운 구두소리가 아까의 운동화 소리보다 조금 더 빠른 보폭으로 그 여자 쪽으로 다가갔다.
“안녕하세요. 조서아 님?”
“안녕하세요.”
상대 쪽도 젊은 여성 변호사였다. 그녀는 우리 둘에게 자신들의 대화 내용이 들리지 않도록 서아를 엘리베이터와 화장실이 있는 중앙으로 데려갔다. 뭔가 웅성거리는 소리가 가뭇가뭇 들렸다. 뛰는 심장을 억눌러야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눈앞에 있는 조정실 문이 열렸다.
“윤재희님, 조서아님?”
한 여성이 안에서 문을 열고 몸을 반쪽만 내놓은 채 당사자들이 참석했는지 이름을 불렀다. 우리 네 명은 짜기라도 한 듯 동시에 일어나 조정실로 조용히 들어갔다. ‘신청인’석과 ‘피신청인’석이 있었고 나는 왼쪽의 ‘신청인’석에 앉았다. 내 오른편으로 변호인이 앉았다. 아까 우리 이름을 불렀던 조정위원 한 명이 왼쪽에 앉아 있었다. 조정실의 구조는 법정과 흡사한 구조였다. 가운데 판사 자리로 보이는 의자가 있었고 조정위원석은 판사를 기준으로 양쪽에서 서로 마주 보는 형태의 구조로 되어 있었다. 조정위원은 내 기준으로 왼쪽에 앉아 있었다. 그녀 혼자였다. 1인 몇 역을 혼자 하는지 짐작이 안 됐다.
50대 후반이거나 많아도 60대 초반쯤 돼 보이는 위원이 컴퓨터 모니터 앞에 앉은 모습이 자연스러워 보이지는 않았다. 내 세대와 또 더 젊은층에게 컴퓨터란 마치 반려동물과 같아서 컴퓨터를 바라보는 시선이나 표정, 손짓 모두 위화감이 없다면, 조정위원의 세대는 컴퓨터가 일종의 시한폭탄에서 전선을 하나둘씩 잘라내는 작업을 하는 것처럼, 키보드의 자판 하나하나를 두드리는 것에서 긴장감이 보이고 목에 힘이 들어간 듯 보였기 때문이다. 짙은 남색 정장 재킷과 스커트, 안쪽엔 흰 블라우스를 차려입은 모습에 머리모양은 드라마에 나올 법한 사모님처럼 큰 꽃봉오리 모양으로 부풀려 있었다. 컴퓨터가 낯설어 자판을 아주 천천히 눌러나갔지만 전체적으로 중년 여성으로서의 지적인 우아함을 잃지 않았다. 위원은 당사자의 이름과 변호인의 이름을 하나하나 타이핑했다. 그리고 우리 측이 제출한 신청 취지를 다시 한번 확인했다.
“신청인은 지난번 제출한 조정신청서에서 ‘신청인과 피신청인은 이혼한다’, ‘피신청인은 신청인에게 재산분할로 1,500만 원을 지급한다’, ‘각자의 적극재산과 소극재산은 각자의 명의로 귀속한다’라고 취지를 내셨죠?”
“네.”
내가 답변해야 하는지 고민하던 찰나, 변호인이 신속히 대답했다.
“피신청인 측의 입장은 어떠신가요?”
모니터를 보며 질문하던 조정위원은 자신의 질문이 끝나자 시선을 피신청인인 조서아가 앉아있는 쪽을 바라보았다.
“피신청인은 이혼에 동의할 수 없습니다.”
이번엔 상대 변호인이 재빨리 대답했다. 1초의 망설임도 없었다. 이혼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순간 머릿속이 멍해졌다. 그렇게 남자를 만나고 있는데도 이혼은 원하지 않는다? 무슨 속셈이지?
“이혼을 원하지 않는다고요?”
조정위원도 놀랐는지 목소리가 조금 커졌다.
“네. 제 의뢰인은 혼인관계를 유지하고 싶습니다.”
“음……. 그러면 피신청인과 변호인은 잠시 나가주시겠습니까?”
조정위원의 요청에 피신청인과 변호인은 드르륵거리는 의자의 바퀴소리와 함께 조용히 조정실을 나갔다. 구두와 운동화가 번갈아 내는 걸음 소리를 쓸데없이 집중해 들었다. 문이 닫히자 조정위원은 앉은 상태에서 우리 쪽으로 몸을 틀며 물었다.
“윤재희선생님은 피신청인이 이혼을 원하지 않는다는 의사를 알고 계셨나요?”
“음, 준비서면을 통해 처음 알았어요. 그동안 저한테는 자기도 이혼의사가 있다고 했었거든요. 집안에서 행동하는 것도 그렇고…….”
조정위원은 내가 법원에 낸 조정신청서의 신청취지, 즉 요구사항을 수정하는 방향으로 설득하기 시작했다. 조정 작업에 들어간 것이다.
“법원에 내신 이혼신청서에는 피신청인에 대한 재산분할 명목으로 1,500만 원을 말씀하셨는데, 이 부분을, 금액을 줄여보시는 게 어떠시겠어요?
변호사와 속삭이듯 상의한 후 1,000만 원으로 낮추겠다고 조정위원에게 말했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대기실에 앉아있을 피신청인 측과 얘기하기 위해 문을 나섰다. 3분도 안돼 조정위원이 돌아왔다. 우리의 제안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했다.
"윤 선생님께는 죄송하지만 제가 보기에는 이 재산분할금을 포기하시고 서로 이혼하는 것만 주장하는 게 어떨까 싶어요. 이혼 사유도 사실 명확한 부분이 있어 보이지는 않고…….”
'역시나 그렇구나.' 절망적이었다. 소송은 잘못된 선택이었나……. 하지만 이제 그녀에게 내연남이 있다는 증거를 찾았다. 이 카드를 아직 꺼내지 않았을 뿐이다. 난 조정위원의 과감한 제안에 당황해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조정위원이 못 듣도록 내 변호인에게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럼 내연남에 대한 소송은요?”
“별도로 진행하는 것도 가능하니까……. 어차피 이혼 사유들이 좀 약한 부분도 있어서…….”
변호사는 우선 이혼을 이끌어내고 난 후 내연남에 대한 소송을 진행하는 것도 가능하다고 얘기했다. 두 사람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무엇보다 내가 봐도 빼도 박도 못 하는 이혼사유들이 딱히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1,500만 원을 요구했던 부분을 포기하기로 했다.
“두 분 여기서 잠시만 계세요.”
조정위원은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대기실로 향했다. 나와 변호사만 남아있던 조정실은 적막하다 못해 녹음 스튜디오 내부처럼 묵직한 공기가 귓속을 가득 메웠고 마스크를 쓴 변호사의 숨소리만이 희미하게 들렸다. 조정실의 허공을 바라보는 내 머릿속에는 한 가지 생각만이 고장 난 레코드판처럼 반복해서 울렸다.
‘받아들여라. 받아들여라. 받아들여라. 받아들여라. 받아들여라. 받아들여라. 그 길로 가게 하지 마라. 받아들여라. 받아들여라…….’
나도 모르게 기도하듯 마음속으로 되뇌고 또 되뇌었다. '상간 소송 걸기 전에 스스로 네 처지를 알고 받아들여라…….' 이번에도 한 3분 정도가 지났을까. 문이 열리고 조정위원이 다시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이례적인 일이에요.”
‘아!’
조정위원의 표현에 나는 속으로 감탄하고 말았다. ‘이례적이다’라는 표현을 TV가 아닌 실생활에서 듣게 되다니……. 사람들이 습관적으로 먼저 뱉는 "음…", "어…", "저…" 같은 군더더기 표현 없이, 깔끔한 하나의 완벽한 구체 같았던 여덟 글자의 말을 들었을 때, 좀 전에 서아가 예상밖의 행동을 보인 것에 혼란스럽기보다는, 오늘 아침 평소와 다름없이 일어나 법원에 출근하기 전, 머리 모양이며 화장이며, 일반인에게 허투루 보이지 않기 위해 신경 써 꾸미고 정장을 차려입은, 교양과 품위를 느낄 수 있었던 60대의 이 여성이 사용한 어휘마저 그녀 자신의 겉모습과 너무도 일치하여 일종의 감격스러움에 가벼운 충격을 받았던 것이다. 나는 어쩌면 이런 교양, 이런 격식 있는 삶을 그동안 선망했는지도 모른다.
조정위원도 혼란스러운 모양이었다. 보통은 한쪽에서 어느 정도 양보를 하면 상대방도 받아들이던지 아니면 거꾸로 제안해서 협상하기 마련인데, 일말의 여지도 없이 단호히 거절만 하는 피신청인 측의 입장에 선뜻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혼인기간이 얼마 안 돼서 재산분할할 것도 없을 텐데…….”
“그러니까요.”
2년도 채 되지 않는 혼인기간이기 때문에 재산분할을 받을 수 있는 상황도 아니라는 위원의 말에 내 변호사도 바로 호응했다.
“이렇게 되면 조정 불성립인데, 신청인께서는 더 생각하고 계신 게 있을까요? 예를 들면 피신청인에게 금전을 좀 제시한다던지…….”
조정위원의 기습 같은 질문에 내 머릿속은 멍해졌다. 다행히 내 변호인이 대답을 대신해 줬다.
“아직 제출하지 않고 있는 자료가 있어서요……. 피신청인에게 유책사유가 있다는 걸 입증할 자료가 있기 때문에 '불성립'으로 가야 할 것 같습니다.”
조정위원은 나와 변호인의 눈빛을 번갈아 바라보며 우리의 뜻을 확인한 후, 문밖에 있던 서아와 변호인을 다시 조정실로 불러들였다. 네 사람이 모두 자리에 앉은 걸 확인하고는 불성립됐다는 마지막 멘트를 허공에 선언하듯 읽어 내려갔다.
조정실을 나온 후 대기실에서 나와 변호인, 서아와 그녀의 변호인은 본능적으로 서로의 거리를 의식하며 거리를 띄운 후 각자 얘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나와 내 변호사는 아까 앉았던 긴 벤치에 다시 앉았다.
"선생님이 저번에 보여주셨던 블랙박스 영상 있잖아요? 내부 검토를 해봤는데, 소송에 쓸 수 있을 것, 같아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안도의 끄덕임이기도 했다. 말 끝에 살짝 주저하는 듯한 멈춤(休止, pause)이 느껴졌지만 비밀스러운 단계라 신중함을 내비친 거라고 짐작했다.
"그리고 이제 조정 불성립이 됐으니까 본안 소송이 시작될 건데, 12월이잖아요? 연말연초다 보니까 법원도 인사이동이 있을 예정이라 시간이 조금 더 걸릴 수도 있어요. 선생님도 아시죠? 공무원이시니까…….(웃음)"
눈을 감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모르는 게 아니기에 어쩔 수 없지 않냐는 끄덕임이었다. 변호사는 다른 일정이 있다고 말하며 먼저 자리를 떴고 나는 법정 정문을 천천히 걸어 나와 주차장 구석에 있는 흡연실―기다란 야외 벤치 두 개가 마주 보고 가운데에는 홀쭉한 항아리가 재떨이처럼 놓여있는 곳―에서 담배를 한대 꺼내 불을 붙였다.
법원 울타리 바깥의 지나가는 자동차들을 초점 없이 바라보며 담배연기를 머금고 후- 뱉어냈다. 바로 옆에선 50대 남성 두 명이 담배를 피우며 무언가를 열정적으로 얘기하고 있었지만 무슨 내용에 대한 건지 전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입에선 연기가 대여섯 번 불려 나와 눈앞에서 천천히 사라졌지만 어떤 모양으로 흩어졌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다만 그날은 12월 중순이었고 공기가 찼다는 정도만 기억할 뿐이었다.
이 브런치에 연재 중인 글은 모두 허구이며, 실존 인물이나 사건과 일치하는 부분은 우연일 뿐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