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187, d+61]
토요일 아침 7시, 그녀가 집을 나가고 없다. 차를 타고 갔을까? 어제 퇴근하면서 아파트 지하주차장에 충전해 뒀던 미니쿠퍼를 이동시킬 겸 내려가봤다. 서아의 차는 어제 주차된 곳에 그대로 있었다. 그럼 누군가의 차를 얻어 타고 간 건가? 또 산악회?
그녀가 산악회에 다니고 있다는 걸 알게 된 때는 열흘 전쯤이었다. 새벽 3시, 그녀 차량의 블랙박스 영상을 통해 내연남의 존재를 확인했던 날.(D+176)
보름 전 서아는 토요일 아침 8시쯤 내 직장이 있는 P시내의 외곽에 있는 한 아파트 단지로 찾아갔었고, 그 남자가 마중 나와 주차장에서 포옹한 후 서아는 그 남자를 따라갔었다. 오후 3시쯤 서아는 씻은 듯 앞머리에 헤어롤을 말고 나타나 그 남자와 함께 A시에 있는 어느 고깃집으로 향했다. 그게 끝이 아니었다. 산악회 정모가 끝난 저녁 서아는 내연남과 또 한 명의 여자 회원을 태우고 그 두 명을 집까지 바래다주었다. 내가 법원에 조정신청서를 내고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이자, 조정기일을 몇 주 앞둔 때였다.
전방 카메라는 컴컴한 골목길을 비추고 있었다. 오후 8시가 지날 무렵 문이 쾅쾅 닫히는 소리가 들린다. 여자 목소리가 둘, 남자 목소리가 하나였다. 여자가 한 명 추가되었다. 그 여자도 산악회 회원인 것 같았다. 목소리는 40대 중반쯤. 서아가 나머지 두 명을 집에 태워다 주는 모양이었다. 산악회 정모 자리가 한껏 재밌고 왁자지껄했는지 다들 목소리가 조금씩 상기돼 있었다. 차 안에서 이런저런 대화 중에 40대 중반의 '소백이'가 결정적인 말을 했다. (나중에 알았지만 산악회에서 서아의 닉네임은 '밤톨이', 내연남은 '레쿠스', 제3의 여인은 '소백이'였다.)
“근데, '삐삐'도 여기 가입하기 전에 한 달을 염탐했다고 했잖아, 여기 어떻게 운영되는지. 사람들마다 산악회에 대한 안 좋은 시선들이 있으니까 자기도 한 달을 어떻게 운영하는지를 탐색했대. 나도 좀 그랬던 것 같애. 한 2, 3주 정도, 어떻게 운영되는지. 진짜 관광버스 대절해서 가는지,”
관광버스 얘기가 나오자 세명의 웃음이 터졌다. ‘산악회’라고 말하면 항상 따라다니는 수식어들, ‘묻지마 관광’, ‘불륜’. 그들의 머릿속에도 공통적으로 그것이 떠오른 듯했다. 서아가 아까 정모에 있었던 에피소드를 얘기하기 시작했다.
“아니 아까 '삐삐' 언니가 자꾸 ‘너 솔로야?’라고 자꾸 물어보는 거예요. 그래서,”
“‘삐삐’도 이혼한 거야?”
“응. 그쪽에 앉아있던 사람들 싹 다 이혼했어.”
내연남 '레쿠스'가 두 여자의 대화에 끼어들며 말했다. '레쿠스'는 누가 이혼했고, 애는 있는지, 또 회원 중 누구누구가 썸을 타고 있는지까지도 빠삭하게 알고 있었다. 대화 정황 상 그가 제일 먼저 가입하고 그 다음이 '소백이' 그 다음이 '밤톨이', 서아였다. '레쿠스'의 설명을 듣고 '소백이'가 놀라며 물었다.
“진짜? 애들도 있는 것 같던데. 애들은 혼자 키우는 거야?”
아이를 키우는 이혼녀 회원에 대해 저마다 안쓰러운 멘트를 하던 중 운전하던 서아가 조용히 웃음을 터트렸다. 멋쩍은 것 같기도 했고, 아니면 흥분되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나오는 소리 같기도 했다. 웃음을 섞으며 혼잣말하다 이어서 차에 탄 두 사람에게 들리게끔 말했다.
“너무 좋아……. 너무 다행이에요. 애 생기면……. 애 없을 때 이혼해서 너무 좋아!”
약간의 웃음으로 호응하던 40대 중년의 '소백이'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아직 한 건 아니지?”
“아니. 아니에요. 소송 중이에요. 지금 같이 살고는 있는데,”
"같이 산다고? 불편하지 않어?"
"각방 써서 안 마주쳐요. 안 마주친 지 몇 달 됐어요."
"진짜? 어우, 그것도 쉽지 않겠다. 그러면 정리하면 누가 나오기로 한 거야?"
"제가 나와야 해요. 아파트 명의가 오빠 명의라. 재산 분할 받아서……. 처음에는 불편했는데 이젠 서로가 아예 안 마주치니까 안 불편해요."
"재산 분할 때문에 소송한 거야?"
"애초에 오빠랑 나랑 협의 안 했어요. 오빠가 저한테 이혼하자고만 해놓고,"
"아 그쪽이 먼저 이혼하자고 했어?"
"네. 자기가……. 하여튼 기분 나쁜 일이 있었죠. 그래서 오빠가 협의이혼하자고 했는데, 저는 '무조건 만나서 얘기하자', '만나지 않고 협의 이혼 없다' 이랬거든요."
조정기일 열리기 전, 서아가 산악회에서 남자를 만나고, 또 종종 그의 집에서 자고 온다는 걸 알았을 때에는 물론 충격이 없진 않았지만, 연애 시작할 때부터 자기는 남사친이 많다며 자랑 아닌 자랑을 했던 그녀였기에, 드라마에서 하듯 소스라치게 놀라거나 뒷목 잡고 쓰러질 정도는 아니었다. '응, 그럼 그렇지…….'라는, 체념과 예상이 뒤섞인 탄식 정도만이 있었다. 서아가 그 남자('레쿠스')와 포옹 후 보였던 발그레한 표정을 지었을 때 '그래. 그렇게라도 행복해라.'라는 응원의 마음까지도 생겼었다. 이제 그녀도 조정기일에서 협의할 거라고 예상했기 때문에……. 하지만 서아측이 낸 준비서면에서 그녀는 나와의 "행복한 혼인관계를 유지"하고 싶다고 했고, 이후 조정기일에서도 이혼 생각이 전혀 없다고 했다. 이때야 비로소 놀라긴 놀랐었다.
조정이 성립되지 않고 나서 맞는 첫 주말. 서아는 자기 차를 그대로 두고 아침에 산악회 모임에 갔다. 집에 홀로 남은 난 주말 루틴을 시작했다. 일주일간의 빨랫감들을 세탁기에 넣고 아침 겸 점심을 먹기 위해 주방 선반을 뒤져보았다. 10개월 전쯤 샀던 시래기된장국 레토르트 제품이 하나 남아 있었다. 소비기한은 한 달 전까지였만 어쨌든 냄비에 부어 끓이고 햇반을 전자레인지에 돌렸다.
내가 이혼 얘기를 꺼내고 각방 생활을 시작했던 2024년 7월부터 이 주방의 시간은 멈춰있었다. 만약 이혼과 관련된 전시회가 있다면 이 공간을 '각방생활 6개월째 가정의 주방'이라는 타이틀을 붙이면 제격일 것 같았다. 가스레인지에는 이곳저곳에 얼룩이 하나 둘 쌓이기 시작했고 소금이며 간장이며 식초며 찬장의 조미료는 내가 주방을 떠난 이후부터 박제된 듯 사용감이 거의 없어 폐기될 날만 기다리는 사형수처럼 도열해 있었다. 각방 생활 전까지 내가 사 온 것이건, 서아가 가져온 것이건 출처가 분명한 것은 각자 꾸준히 소비하면서 없어졌지만, 그렇지 않은 애매하고 불분명한 제품과 반찬통은 냉장고 안에서 그 누구의 구원의 손길도 받지 못한 채 점점 곰팡이가 피고 있었다.
내 서재 냉장고에 있는 묵은 김치들도 정리하기로 했다. 자주 먹지 않아서 열무김치며 총각김치며 허연 골가지가 드문드문 보였다. 그리고 배추김치는 웬일인지 아직도 쌩쌩해서, 시래깃국과 곁들여먹기 위해 조금씩 잘라 반찬 접시 위에 올려 담았다. 밥을 다 먹고 나서 묵은 김치통 두 개와 냄비, 그릇을 바로 설거지하기 시작했다. 개수대에는 그녀가 2주 가까이 쌓아둔 그릇과 텀블러들이 가득해서 그것들을 피해 설거지하기가 쉽지 않았다. 냄비와 김치통을 헹구는 내내 서아의 텀블러와 그릇들이 이리저리 넘어져서 다시 세워놓으면서 조금은 짜증이 나기도 했다.
같은 날 오후 5시, 사무실에 출근하기 위해 씻고 옷을 입고 있는데 아침에 집을 나갔던 그녀가 돌아왔다. 들어오자마자 안방 욕실에서 씻는 소리가 들렸다. '마주치지는 않겠군.' 집에서 나갈 때 서로 동선이 겹칠 일이 없을 것 같아 가벼운 마음으로 현관을 나섰다. 엘리베이터에서 습관적으로 지하 1층을 눌렀다가, 아침에 충전이 완료된 미니쿠퍼를 1층 길가로 옮겨놓은 것을 생각하고 다시 1층 버튼을 눌렀다.
'날씨 좋다…….'
건물 현관을 나오며 고개를 들어 아파트 동 건물 사이로 보이는 12월의 하늘을 바라보았다. 공기는 가을처럼 상쾌하고 청명했다. 크게 숨 한번 들이마시며 단지 도로변에 있는 내 차로 다가갔다. 조수석 문을 열고 쇼핑백―방에서 꺼낸 햇반 6개와 사무실에서 입을 점퍼 하나를 담은―을 의자 발밑에 두었다. 반대편으로 걸어가 운전석 문을 열고 타려는 찰나, 내 차 앞에 있는 검은색 중형차와 그 옆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는 40대 남성의 실루엣이 내 시야 언저리에 들어왔다. 운전석에 앉아 다시 정면을 바라봤다.
'에쿠스'
그날 산악회 정모가 끝나고 돌아가는 길에 서아의 내연남 '레쿠스'가 자신의 닉네임이 왜 '레쿠스'인지 '소백이'와 '밤톨이'(서아)에게 설명했던 때가 생각났다. 차 옆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는 내연남이, 서아를 박력있게 껴안았던 영상 속 그 남자가 내 눈앞에 있다니, 내 앞에 나타나다니…….
"아아……."
탄식보다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 맞닥뜨리자 뭔가를 말해야 하는데 생각이 나지 않고, 뭔가 액션을 취해야 할 것 같은데 그게 무엇인지 당장 생각나지 않아 머릿속에서 에러가 발생한 것처럼 나온 하나의 신호음이었다. 내 차 앞에 대놓고 서있는 에쿠스를 멍하니 바라보며 있다가 그가 운전석에 타자 내가 겨우 생각해 낸 것은 우선 핸드폰을 꺼내는 일이었다.
이 브런치에 연재 중인 글은 모두 허구이며, 실존 인물이나 사건과 일치하는 부분은 우연일 뿐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