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격전(下)("자기야, 니 남편 차 번호가 뭐라고?")

[D+187, d+61]

by mijo


서아가 만나는 내연남의 뜻밖의 등장에, 말 그대로 뭘 해야 할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던 나는 그가 담배를 다 피우고 에쿠스에 타고 나서야 겨우 핸드폰을 꺼낼 생각을 했다. 찰칵……, 찰칵. 혹시라도 첫 번째 사진의 초점이 흔들렸을까봐 한번 더 찍었다. 하지만 두 번째 셔터를 누르면서도 속으론 이미 알고 있었다. 첫 번째 사진은 초점이 흔들리지도 않았고 흔들릴 수도 없었다는 걸, 단지 그 남자가 담배를 태울 때 바로 찍지 못한 자책감에 에쿠스의 애먼 뒤통수만 한번 더 찍고 있다는 것을.


차에 앉아서 30초 동안은 눈앞에 있는 내연남의 에쿠스를 멍하니 바라봤다. 바라보는 것 말고는 달리 생각나는 것도 없었다. 혹여나 그 남자의 실루엣이 보일까, 내가 있는 뒤쪽으로 고개를 돌리는 움직임이라도 있을까, 나를 마주친 당황함에 몸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서아에게 전활 거는 모습이라도 보이지는 않을까 뒷유리창의 이곳저곳을 뜯어봤지만 새까맣게 틴팅이 되어있는 유리는 가소롭다는 듯 눈도 꿈쩍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제서야 내가 가쁘게 숨쉬고 있는 걸 알아차렸다. 추운 날씨도 아니었는데 심장은 파르르 떨며 호흡을 방해할 정도였다. 심호흡을 가까스로 하면서 '생각'이란 걸 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고 조금씩 시나리오와 시뮬레이션을 그려보기 시작했다.


내가 나가기 20분 전쯤 서아가 집에 들어왔고 바로 욕실에서 씻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블랙박스 영상 속에서 봤던 그 남자는 지금 차에 시동을 켜둔 채 내 집 앞, 내 차 앞에서 떠나지 않고 있다. 서아를 다시 태우고 가기 위해 기다리고 있다는 가설 말고는 다른 가능성을 억지로 생각해내려고 해도 단 하나도 떠오르지 않을 만큼 명백했다. 그런데 어디로 태우고 가려는 건가? 당신 집으로?


다시 집중하자. 지금은 두 사람이 만나는 장면을 찍어야 한다. 서아의 블랙박스 영상만을 증거로 삼기에는 부족하다. 내 카메라로 확실하게 찍어놔야 한다. 일단 그가 차에서 다시 나올 때까지 나도 차 안에서 가만히 있을까? 하지만 그는 내 차에 대해 알고 있다. 그녀가 잭팟(jackpot)을 터뜨렸던 그날(D+176) 이후에도 서아는 내 차에 대한 정보를 그와 공유한 적이 있었다. 조정기일(D+182)이 열리기 사흘 전이었다.




D+179


금요일 퇴근 중에 서아는 차에서 전화를 받았다. 저녁 6시 40분쯤, 집에 도착하기 10분 전이었다.


"여보세요?"


"자기야, 니 남편 차 번호가 뭐라고 했지?"


"미니쿠퍼 일렉트릭? 24서XXXX."


웬일인지 그 시점 이후 서아는 차량의 스피커폰 연결을 해제하고 통화를 이어갔다.


"미니쿠퍼 봤다고요? 전기차를? 전기차 맞아요? 우리 아파트에 그거 하나만 있었는데……. 24서XXXX. 누가 또 한대 샀나(웃음) 응! 자리 좀 맡아줘!"


10분 뒤 서아의 차는 아파트 지하주차장으로 진입했다. 코너를 두 번 돌아 구석으로 들어가자 검정색 롱패딩을 입은 그가 통로에서 서성이고 있었다. 그는 내 와이프의 주차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미리 도착해 있었다, 내 아파트 지하주차장에서. 서아가 탄 차량의 헤드라이트 빛을 한몸에 받으며 그는 손짓으로 잠시 멈추라는 사인과 함께 자신의 차를 가리키며 곧바로 에쿠스에 올라탔다. 그는 자신이 맡아둔 자리를 서아에게 내줬고, 서아는 주차를 마치고 바로 그의 차에 올라탔다.

그 남자의 차에 탔는지 어떻게 알 수 있었을까? 시동이 꺼진 서아 차의 블랙박스 카메라는 빼곡히 주차된 다른 차량들이 가리는 바람에 통로에 정차된 에쿠스 옆면의 지붕과 유리창 윗부분까지만 간신히 비추고 있었다. 하지만 차에서 내린 서아의 머리가 에쿠스의 조수석쪽에서 걸음이 멈췄고(멈추지 않기를 진정으로 바랐지만), 이내 지붕 밑으로 사라지자 곧바로 에쿠스의 빨간 브레이크등이 옅어지면서 화면의 왼쪽으로 빠져나갔다. 그날밤 서아는 자정이 다 되어 복귀했다. 조정기일 이틀 전이었다.



다시, 다시 집중하자. 미니쿠퍼 전기차가 흔하지 않다는 건 이쯤이면 그도 알고 있을 것이다. 어쩌면 내 얼굴을 알고 있고 내가 차에 탈 때부터 날 의식했을지도 모른다. 그는 열흘 전쯤(D+176) 서아의 차를 타고 산악회 정모 고깃집으로 향하며 나를 향해 "미친놈… 돈도 없어 보이는구만"이라고 말했다. 그녀가 내 사진을 보여줬을 수도 있다.


하지만 모른다면? 그 남자가 이런 거에 무관심해서 내 얼굴도, 내 차도, 내 차량번호도 기억하지 못 한다면? 오히려 내가 그의 얼굴과 에쿠스와 차량번호도 알고 있다.(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그는 내가 그를 알고 있다는 걸 모른다. 다 집어치우고 정면으로 들이대볼까? 녹음기 켜고, 둘이 만나고 있지 않냐고 물어볼까? 아니면 모르는 사람처럼 대하면서 접근해 볼까? 아니야, 이 차에서 내려 다가가는 순간 조서아의 남편이란 것을 그는 금방 알아차릴 것이다. 이런 상황에선 오로지 생존만이 목적인 동물의 본능처럼 모든 신경이 곤두서 있을 것이다.

아니다. 조금만 참자. 지금 여기서 내가 차안에서 계속 있으면 그는 그녀에게 연락할 것이다, 지금 내려오지 말라고. 아니! 그렇게 되면 그 둘이 만나는 장면을 잡을 수 없다.

일단 후퇴다. 나는 차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우선 그의 시야에서 사라져야 했다. 출근하는 것처럼 보여야 했다. 그가 탄 에쿠스의 시야는 아파트 정문으로 나가는 길을 비추고 있었다. 코너를 돌아 사라져 줘야 했다.

아내의 내연남 차가 내 집 앞, 내 차 앞에서 아내를 태우기 위해 서 있었다.

정문을 나가기 전 차를 세운 뒤 빠른 걸음과 뜀박질을 섞어가며 내가 사는 107동 방향으로 다시 향했다. 약 2백 미터를 크게 돌면서 107동을 지나치고 조금 더 언덕에 있는 110동에서 그의 차와 50미터 정도 거리를 두고 뒤편에서 한 발짝씩 다가가며 내려다봤다. 가쁜 숨을 진정시키며 바지주머니에 있는 스마트폰을 더듬어 꺼내 미리 동영상 촬영 버튼을 눌렀다. 그 남자가 에쿠스에서 나와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한대 더 피운 그는 다시 차에 올라탔다. 곧 서아가 나오겠지? 1층 정문으로 나올까? 아니면 지하주차장으로 나올까? 내연남 차가 1층 쪽에 있으니 그쪽으로 나오면 딱 좋은데.
남의 동 입구 쪽에서 서성이면서도 시선은 에쿠스가 있는 동쪽을 향해 고정돼 있었다. 막 씻고 나서 머리에 아무것도 바르지 않아 푸스스한 모습의 30대 후반 남성이 서성이는 내 모습을 자각하자, 주변을 의식할 수밖에 없었다. 아파트 경비 아저씨가 지나가고, 내가 서 있는 110동에 거주하는 듯한 50대 남성도 나를 흘끗 보며 지나갔다. 나는 애써 태연하게 보이기 위해 스마트폰을 보는 시늉을 하다가 언제든 동영상을 찍을 수 있는 준비를 위해 앱을 실행했다 끄고 다시 켜기를 반복했다. 카메라를 두 배, 세 배 확대하는 연습을 해보기도 했다.




'아 지금쯤 나와야 할 텐데…….'

바로 그때 그의 차가 이동한다. 그냥 가는 건가? 아니다. T자 후진을 하더니 지하주차장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지하에서 기다리려고 하는구나.' 나는 다시 내 차가 있는 곳으로 빠르게 걸어갔다.

'늦으면 어떡하지?'

'뭐, 그럼 추격전은 끝난 거지.'

내 차에 다다랐을 때 뒤편에서 코너를 도는 자동차 소리가 들렸다. 순간 머릿속에선 그 어느 때보다도 빠르게 시나리오들이 스쳐 지나갔다.

'차 앞을 막아 세울까? 막아 세우고 동영상 촬영하며 조수석으로 다가갈까? 그럼 자동차는 나를 피해 빠른 속도로 가거나, 아니면 이 새끼들이 양아치면, 나를 들이받고 가려나? 어쩌지? 이 차가 오면 도로 위에 서…….'

하지만 그 놈의 차가 아니었다. 다시 내 차에 타고 방향을 돌렸다. 그가 들어간 지하주차장으로, 내 아파트 지하주차장으로 …….

'이것들이 보자보자하니까…….' 진부하고 관용적인 표현들이 별수 없이 머릿속에서 되뇌어졌다. 하지만 정말 보자보자 하니 대낮에 내 집 앞에서 내 와이프를 기다리는 내연남이며… 그녀며……. '도대체 나를 얼마나 X신으로 보길래'라는 생각이 연달아 났다. 오른손으로 핸들을 잡고 왼손으로는 동영상 촬영을 시작하며 지하주차장에 들어갔다. 에쿠스는 내가 있는 7-8라인 입구 앞에 대고 있었다. 이번에 에쿠스의 미등은 들어오지 않았다. 시동을 끈 건가? 그의 차 조수석 옆을 지나가며 운전석을 보기 위해 안간힘을 썼으나 선명히 보이는 것이 없었다. '뭐지? 집에 들어갔나?' 내 차를 전기차 충전구역에 주차하고 나는 5분 동안 내리지 않았다. 홈캠 앱을 열어봤다. 내 서재에 문쪽 가까이 놓은 홈캠. 아무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그가 집에 들어간 것 같지는 않았다. 나도 모르게 안도의 욕설을 섞어 읊조렸다. '시X 고맙다, 집 안까지 들어오지 않아 줘서…….'


불행 같은 다행, 아니면 다행 같은 불행의 안도감 이후 드는 생각은 '그는 나의 차를 또 알아봤을까'라는 점이었다. 아까 어렴풋하게 그는 고개를 숙이고 있었던 것 같기도 했다. 내 차를 보고 나서 숙인 걸까? 아니면 그녀를 기다리며 스마트폰에 시선을 계속 고정시키고 있었던 것일까? 내 운전석 창문 쪽으로 에쿠스의 꽁무니가 보였다. 그는 사이드미러나 룸미러를 통해 내 차에서 나오는 LED 주간주행등 불빛을 보고 있을지도 모른다.

빨간 브레이크등이 들어왔다. 이번엔 그의 차가 움직여 지하주차장을 나갔다. 안 태우고 간다고? 나를 의식해 이곳을 떠났을 수도 있고, 다시 1층 입구에서 서아를 태우기 위해 이동한 것일 수도 있다. 가능성은 두 가지뿐이다.


'내가 먼저 내려? 가서 대면해?'

'지금 대면해서 뭐 할 건데? 서아가 차에 타는 모습을 찍기가 쉽지 않을 텐데.'

'그놈 차가 지금 길가에 있는지, 1층 정문 앞 주차장에 있는지 모르잖아.'

'그리고 계단으로 올라가면 그놈을 볼 수 있어도, 만나면 뭐라 할 건데? 잡아뗄걸?'

머릿속에선 서로 다른 목소리가 치열한 논쟁을 벌이고 있었다. 30초 정도 숨을 고르며 생각한 끝에 결국 사무실로 향하기로 했다. 이 이상은 무리였고 또 자충수를 둘 위험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서아는 언제 나갔을까? 아까 홈캠에 문 소리가 몇 번 들리긴 했었는데, 방문 소리인지 현관 소리인지 알 수 없었지만 그때 나간 것일까. 아무튼 집에서 더는 인기척이 들리지 않으니 그녀가 나간 게 틀림없었다.





아파트 단지 정문에서 나가는 좌회전 신호를 기다리고 있던 때 룸미러로 검은색 차가 다가오는 게 보였다. 사실 에쿠스는 내가 사는 단지에서 쉽게 눈에 띄는 차는 아니었다. 보통의 차라면 내 차 뒤에 한팔 간격 정도를 띄우고 멈춰야 하는데 에쿠스와 내 차 사이에는 다른 차 한 대가 들어올 만큼 엉성할 정도로 널찍했다.
내 출근 경로는 좌회전 신호를 받고 20미터 정도 직진한 다음 우회전하고 나서 왕복 8차선 도로에 좌측으로 합류하는 것이다. 그 이후부터는 직진하거나 좌회전을 해도 직장으로 가는 길이 된다.

하지만 오늘 저녁은 약간 변형을 주기로 했다. 좌회전 신호를 받고 꺾어 또 이어지는 좌회전 대기줄에 일단 멈췄다. 그러자 에쿠스가 내 뒤를 따라 좌회전을 한 다음, 예상대로 큰 도로에 합류하기 위해 우회전 후 좌측 깜빡이를 켰다. 나도 바로 차선을 변경해 그를 따라 우회전했고, 합류를 마친 에쿠스를 따라 8차선 대로에 진입했다.
그러자 에쿠스는 다급했는지 전방 100미터 앞의 교차로에서 바뀌어가는 좌회전 신호를 받으려고 급가속을 기 시작했다. 에쿠스와 내 차 사이의 경차가 걸리적거렸지만 전기차의 가속력으로 추월해서 그의 차 뒤에 섰다. 좌회전 신호가 빨갛게 바뀌었고, 8차선 교차로에서 어정쩡하게 급정거한 에쿠스는 횡단보도 표시선을 뒷바퀴로 밟고 있을 정도로 많이 지나쳐 멈춰있었다. 너무 급히 멈춘 탓에 길을 건너는 사람들이 에쿠스의 뒷모습을 쳐다보며 지나갔다.

찰칵, 찰칵.


횡단보도 위에 정차하고, 정지선은 당연히 지나쳤고, 신호위반도 했고……. 과태료 먹일까? 일단 사진을 찍어놓으면서 내연남을 소위 '금융치료'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소심한 복수에 히죽거리는 어린아이의 기분이 들기도 했다.
직진신호가 들어왔다. 에쿠스는 아까 멈춘 순간부터 계속 신호등만을 쳐다본 듯 0.1초 만에 우측 깜빡이를 켜며 직진 차로로 들어갔고 나 또한 그 차를 따라 차선을 변경해 직진했다. 또 다른 큰 사거리에서 좌회전 신호를 기다리는 에쿠스와 미니쿠퍼 사이에 다른 차가 끼어들어 더는 가까이에서 사진을 찍지 못했다.


'병X들, 찜찜하면 고속도로 타고 가야지.'


그들의 대책 없는, 뻔한 행동에 씁쓸한 마음이 일었다. 나중에 결국 에쿠스는 지역 경계가 바뀌는 사거리쯤에 와서야 나처럼 좌회전 신호를 받지 않고 직진신호를 따라 멀리 갔다.

더는 쫓아가지 않았다. 지금까지의 내 경로는 그와 그녀의 사이를 알고 추격한 걸 수도 있지만, 평소 내 직장에 출근하는 경로였기 때문이다. 좌회전 차선에 있다가 에쿠스를 따라서 직진 차선으로 바꾼 것도, 직장에 빨리 가기 위해 차선을 바꾼 것으로 볼 수 있었다.

내 추측에 에쿠스는 자기 집에 평소보다 15분에서 20분 더 크게 돌아서 갔을 것이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서도 심장은 계속 뛰어 쉽사리 진정되지 않아 결국은 배가 아프기 시작했다. 스무 살 때 아버지한테 처음 대들었을 때에도 배가 이렇게 아팠었는데……. '내 눈에 띄기만 해 봐라.' 천하에 둘도 없는 패륜아가 아니라면 그놈은 두번 다시는 오늘처럼 자신의 차를 끌고 내 아파트에 오지 않을 것이다.

이제 나는 내 두 눈이며 핸들을 쥐고 있는 열 손가락이며 두 팔이며 두 다리며, 마치 지독한 악귀와 몇 시간 동안의 사투를 벌인 퇴마사의 모습처럼 축 늘어지기 시작했고, 미약하게 남은 체력을 간신히 유지하며 집으로 가는 길을 더듬고 있었다. 그 이후의 일들은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그날 서아는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 브런치에 연재 중인 글은 허구이며, 실존 인물이나 사건 등 일치하는 부분은 우연일 뿐임"

작가의 이전글추격전(上)("애 없을 때 이혼해서 너무 좋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