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로(아내 신발에 침을 뱉으며)

[D+191, d+65]

by mijo

추격전이 있던 토요일 그날 밤 서아는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나를 따돌리기 위해 결국 자신이 사는 P도시 방향이 아닌 엉뚱한 곳으로 향하는 에쿠스의 뒷모습이 처량해 보이기까지 했다. 서아는 그 남자의 차를 타고 내 눈앞에서 점점 멀어져 하나의 점이 되어 사라졌다.


날 그녀의 차량에 들어가 블랙박스 SD카드를 바꿔 끼우고 영상을 훑어봤지만 금요일까지 특별한 일은 없었다. 내 계산으론 64GB(기가바이트) 정도의 메모리는 3일 정도 지나면 새로운 영상들로 덮어 씌워진다. 시동이 걸렸을 때만 녹화되는 점을 감안해도, 3일이면 내가 차량에 들어갔다가 나온 기록은 없어지고도 남는다. 3일만 기다리자, 3일만. 그러고 나서 시원하게 까발릴 거야. 너의 민낯을, 네 본성을…….


그 3일……. 일요일, 월요일, 화요일은, 내 생애에서 가장 길고 고통스러웠던 기간이었다. 논산 육군훈련소에서의 마지막 3일, 장례식장에서의 3일보다 더 힘들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일을 하다가도 시계를 보거나 달력을 보면 가슴이 저미며 심장이 요동쳤고, 그럴 때마다 숨을 크게 들이마시며 진정시켰다. 그렇게 수십 번을 반복했다.


마침내 수요일 아침, 평소처럼 출근하는 차 안에서의 머릿속은 평소와 다르게 그녀의 가족들에게 보낼 메시지 문구를 다듬고 있었다. 9시 출근을 마치고 나는 사무실에 앉아 그녀의 가족 한 명 한 명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장인어른, 장모님, 두 명의 처형, 두 명의 형님…….


『서아가 남자를 만나고 있더군요. 지난 주말에 그 남자 차가 서아를 태우고 가려고 버젓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것도 제 집 앞에서, 제 차 앞에서요. 산악회에서 남자를 만나 외박도 몇번 하고 왔다는 거 알고 계셨나요? 저만 몰랐던 겁니까?』



D+193, d+67


서아의 가족들에게 폭로 후 이틀 정도 정도 지났을 때쯤 불현듯 그때 추격전의 상황이 궁금해졌다. 그날 저녁엔 집에 들어오지 않았고 다음날인 일요일 저녁에 들어왔으니 주말 동안은 블랙박스에 아무런 기록도 없을 것이고, (어쩌면 '아, 그때 하마터면 남편한테 들킬 뻔했다'며 가슴을 쓸어내리며 출근했을) 월요일부터 수요일 아침 내가 폭로한 이후 차 안에서 어떤 통화를 했을지, 또 어디를 갔을지…… 이젠 행동심리학을 연구하는 학자의 시각처럼 그녀의 행동의 향배에 흥미가 더해지기 시작했다. 서아가 퇴근 후 안방 욕실에서 씻고 있을 때 각방 생활 전부터 서아 차량의 스페어 키를 늘 두었던 게스트룸의 장롱 서랍을 열었다.

그런데 없다. 스페어 키가 없어졌다. 이제 더 조심하겠다는 것…이라고 봐야 하나? 장롱의 모든 서랍이며 행거에 걸린 외투의 모든 주머니를 샅샅이 뒤져보다가 갑자기,


'그래, 그 둘에겐 내가 악역이겠지.'


라는 생각이 들자 쓴웃음이 나면서 더 찾는 일을 그만두고 내 서재로 돌아와 침대에 누웠다. 그랬다. 내가 오히려 그들의 관계를 위협하고, 어쩌면 자신들에게 추가적인 소송도 불사할 수도 있는 골칫덩이가 되어버린 것이다. 나의 폭로 이후 서아가 에쿠스남을 또 따로 만났는지는 알수 없었다. 하지만 서아는 여전히 주말이면 산악회 모임에 나갔고, 닉네임 '레쿠스'인 내연남 또한 그 산악회의 멤버로 꾸준히 활동했다. 그 둘이 또 산행을 같이 했는지는 모른다. 다만 분명한 건 내연남의 에쿠스는 내 아파트 단지에서 다시는 눈에 띄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D+194, d+68


폭로 후 사흘이 지날 때쯤인 토요일 새벽 1시, 컴컴한 내 방 문을 조심스럽게 두드리는 노크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라꾸라꾸 침대에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선잠이 든 내 대답을 기다리기도 전에 문을 한 뼘 정도 열고 속삭이는 목소리가 비집고 들어왔다.


“오빠! 오빠! 자? 얘기할 수 있어?”


거의 6개월만에 들어보는 목소리에 순간 뇌정지가 온 것도 같았다. 그녀는 내게 얘기 좀 하자고 했다. 새벽 1시에. 몇 개월 전 나보고 “니가” “너나”라며 반말로 불렀던 때와는 다른 분위기였다. 그 호칭을 다시 듣는 순간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얘가 이번엔 뭔가 바라는 게 있구나’


이런 기습적인 방문에 당황하기도 했지만, 반말하다가 호칭을 다시 ‘오빠’라고 부르는 것에 대한 혼란도 있었고, 무엇보다도 불쾌함과 민망함이 더 컸다. 작은 서재에서 라꾸라꾸 침대에 누워있는 내 모습은 어디에 내놓고 자랑할 거리는 안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귀에 이어폰을 낀 채 어둠 속에서 죽은 시늉하듯 꼼짝도 하지 않았다. 노래가 끝나고 소리가 줄어드는 중간중간마다 그녀의 목소리가 이어폰을 비집고 들어왔다.


"오빠가 원하는 뭔지 말해봐. 얘기 안 할 거야?"

"계속 내 주변에 망신 주면서…"

"이제 6개월째야. 힘들지 않아?"

"협의 원하면 그렇게 해줄게."


다급한 듯한 그녀의 말들, 그런데 그중 황당했던 말은 "내일이라도 당장 짐 쌀 수 있어."라는 파격적인 제안이었다. 뭐지? 그건 물리적으로 불가능할텐데? 호락호락 나갈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그때 가장 귀가 솔깃하기도 했다. 그동안 별거도 생각하지 않았던 사람이 당장 다음날 나간다고, 콩으로 메주를 쑨다고 한들, 사람들이 믿어줄까?


서아는 문 틈에 서서 계속 소근거리듯 말하며 내가 원하는 게 뭔지 물어보았다. '시X 진짜 모르는 건가'라는 억하심정마저 들었다. 내가 7월부터 이혼하자고 줄기차게 얘기했었는데……. 혹시 내가 다른 꿍꿍이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협의이혼을 원한다면 자기도 그렇게 하겠다고 했지만, 서아의 성격에 순순히 협의이혼에 응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글쎄, 나에겐 협의이혼의 강은 이미 넘어선 지 오래였다. 그 강의 이름은 '조정기일'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아직도 자신이 주도권을 쥐고 있다고 착각하는 건지, 원하는 대로 해주겠다고 내게 선택권을 쥐여 주고는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새벽의 황당한 대화 이후 같은 날 10시쯤 그녀가 머무는 안방에 찾아갔다. 내가 원하는 건 이혼이라고 말하니 그녀는 자꾸 그 조건이 뭐냐고 물었다. 그런데 조건부 이혼이란 것이 있는 건가?


“아, 그건 좀 아닌 것 같은데.”


별거를 제안한 내 말에 대한 그녀의 대답이었다. 조금 고민하는 듯싶더니 별거하는 건 뭔가 아니라는 얘기. 뭐가 아니라는 거지? 두루뭉술하게 얘기하는 것은, 거꾸로 말하면 뭔가 명확하게 반박할 내용이 없다는 것, 즉 그냥 집에서 나가기 싫다는 얘기인가?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뭔가 이유를 곁들여가며 거부 의사를 표시해야 하는데, 이유도 마땅히 생각나지 않고, 짐 싸기는 싫고……. 어떻게 바람 피운 게 들통났는데 집에 들어올 생각을 하며, 별거하겠다는 생각을 안 할 수 있을까?

"너라면 애인 만나고 온 사람의 얼굴을 보고 싶겠어?"


"그건 알아서 생각하고."


내 질문에 대한 직접적인 대답 대신 '알아서 생각하라'는 동문서답 같은 반응에 말 그대로 할 말을 잃고 숨만 크게 내쉬었다. 법원에는 '이혼하고 싶지 않다', '원만히 해결해서 결혼생활을 유지하고 싶다'라고 말하고, 한편으로는 산악회에서 내연남 만나 외박도 일삼으면서, 새벽에 협의이혼 얘기를 꺼내며 이 전쟁을 일찍 끝내려고 유혹했던 것인가? 왜? 에쿠스 더 타고 놀려고?

캄캄한 방에 누워있는 내게 할 말 다 하고 돌아서며 나보고 결정하라는 그 말에, 또 공을 나한테 넘겨서 시간을 끄는 것 같다는 인상을 강하게 받았었는데, 곱씹어볼수록 화가 스물스물 올라왔다. 폭로할 당시 내가 얘기했던 일주일의 시한이 다 가도록 아무것도 안 하다가, 기한이 다가올 때쯤 새벽 1시에 내가 누워있는 방에 들어와서 내가 진짜 원하는 게 뭔지 알고 싶다고? 다시 원점으로 돌려 시간을 끄는 듯한 노림수가 너무 뻔히 읽혔고, 과연 그녀는 정말 무능해서 이런 식으로 상황을 몰고 가는 건지, 아니면 자기 나름대로 머리를 굴려가는 것인지, 생각할수록 나의 감정과 정신이 점점 소모되어 가는 것을 느꼈다.

결국 그녀는 남자 만나고 다닌 것을 들켰으면서도 내 집에서 나가는 건 거부했다. 이 세상에 마지막 남은 가느다란 염치 한 가닥마저 끊어지고 말았다. 도대체 뭘 위해서?


다음날 일요일 새벽 5시. 안방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고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미닫이 중문이 조심스럽게 열고 닫혔다. 그리고 도어락 소리와 함께 현관문이 천천히 열리고 닫혔다. 그녀가 나가고 없는 집에서 나는 오랜만에 자유를 만끽하며 하루를 보냈다. 이상의 소설 <날개>의 주인공처럼, 집에 아무도 없는 날 구석진 방에서 기어 나와 아내의 이런저런 화장품을 들춰보기도 했다. 소설 주인공과 나와차이점이 있다면, 그는 처에 대한 무조건적인 의존과 애정에 뿌리를 두고 있었고, 나는 불신과 증오에 찬 눈으로 단서를 찾아 나서는 탐정이었다. '날자, 날자꾸나. 이 전쟁터에서 너와 나, 둘 다 이 10층에서 날아보자꾸나…….'


현관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구두며, 어그부츠며, 플랫슈즈, 버켄스탁, 뉴발란스 운동화 등 여남은 신발들을 바라봤다. 그녀는 오늘 겨울용 크록스를 신고 나갔다. '등산화는 따로 챙겼겠지.' 내 운동화 두 켤레에 비해 그녀의 신발들은 기세등등하게 바닥 대부분의 공간을 차지하고 있었다. 변한 건 없었다. 아내가 남자를 만나고 와도, 남자 만난 것을 들켜도,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변호사는 판결이 날 때까지만이라도 그녀를 법적으로 내쫓는 방법은 없다고 말했다. 정말로 내게 주어진 옵션이 단 하나도 없었던 것이다.

그녀의 신발들을 초점 없는 눈으로 하나씩 바라보다가 한짝에 조용히 침을 떨어뜨렸다, 뱉는 소리도 없이.

'죄 없는 현관 바닥에 튀면 안 되니까, 오직 너의 신발에만……. 내가 할 수 있는 건 이것밖에 없으니까.'




"이 브런치에 연재 중인 글은 허구이며, 실존 인물이나 사건 등 일치하는 부분은 우연일 뿐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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