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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둔형 최작가 Jan 12. 2022

(10YEARS) 알고싶다

2022.  10YEARS. 프롤로그(220112).

#01


  “나무를 보지 말고, 숲을 보란 말이야”, “그렇게 코앞만 바라보면 안 돼, 더 멀리, 더 넓게 바라봐야 한다고” 같은 소릴 들어본 적 있는가. 대부분 회사에서, 임원이나 직장 상사에게 듣게 되던 말이었을 텐데, 대체로 그렇게 쉬우면 본인이 직접 하던가. 내지는 로또만 되면 그만둔다.라는 반응으로 갈린다. 숲을 봐야 할까. 더 멀리, 더 넓게 봐야만 할까.


  당신의 미래는 언제인가. 10년? 20년? 1985년의 백 투 더 퓨처에서는 2015년이었고, 1989년의 원더 키디는 2020년이 미래였다. 2022년, 지금. 미래를 넘은 미래의 시대에서 우리에겐 지금을 넘어선 모든 순간이 미래가 될 수도 있다. 지금부터 하고 싶은 이야기는 지금부터 시작되는 우리 미래의 이야기다.


  인구절벽, 그린플레이션, 팍스 테크니카, 위드 팬데믹, 윈터 이즈 커밍. 우리의 한 치 앞은 우리가 겪어본 과거의 모습처럼, 알 듯하면서도 모르는 일들이 태반이다. 불확실함. 명확하지 않음. 을 두고 누군가는 흥미롭다고, 또 다른 어떤 이들은 불안하다 느낀다. 다만, 한 가지 명확한 게 있다면 두 부류 모두 우리의 미래가 어떻게 펼쳐질지에 대해 궁금해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단순한 호기심에서부터 먼저 미래를 옅보고, 이득을 취하려는 삐뚤어진 욕망까지. 의도와 목적은 다르지만, 모두가 미래를, 내일을, 자신에게 다가올 기회나 위기를 누구보다 빨리 알아차리고 싶어 한다.


  어린 시절, 어른들은 현실이 힘들면 점집을 찾아간다고 했다. 미래에 대한 인간의 탐닉은 건강과 불량식품의 관계처럼, 불가능함을 알면서도 오랜 학습으로 끌려 마땅한 것일 수도 있다. 달콤 짭짤 시큼한 미래는 불량식품이다. 정확한 예측이 불가능하다고 딱 잘라 말할 수 있는 미래는. 두려워할 대상이 아니라, 더욱 다양한 미래의 가능성을 펼쳐낼 수 있는 기회에 가깝다.     




#02


  둘째가 태어났다. 내 생에 이렇게 빠른 10달은 처음이다. 첫째를 임신했던 당시는 최소한 지금보단 길었고, 군대에서의 10개월은 지금보다 최소한 두 배는 느리게 흘렀다. 어쨌든 간에 벌써, 둘째가 태어났다. 코로나가 바꿔놓은 건 사회적 거리두기, 드럽게 아픈 백신 의무접종, 원격교육, 재택근무뿐만이 아니었다.


  며칠 , 아내의 진통 소식에 휴가를 내고 집으로 달렸다. 진작에 꾸려놓은 가방을 들고,  급하게 병원으로 달렸다. 도착. 아내는 간호사의 손에 의지한  분만 대기실로 이끌려 갔고, . 다시 병원을 나왔다. PCR 검사 ‘음성결과 없이 출입 금지』, 선별 진료소에서 급하게 검사를 받았다. 최소 3시간은 넘어야 결과를 받아볼  있다고 했다. 다시 병원으로.  건물 커피숍에서 결과를 기다렸다. 다리를 떨거나, 고개를  숙여 스마트폰을 보거나, 담배를 피우러 들락날락하는,  또래, 가끔 나보다 어려 보이는 남자들의 초조함이 커피숍에 그득했다. 옆자리 초조해 보이는 아저씨가 전화를 받는다. 억울하다는 듯이 씩씩거리는 숨소리가 거칠지만, 입가는 미소로 번진다. 화가  걸까. 기쁜 걸까. 어쨌든 격앙된 말투로 알겠다고, 확실히 카페의 정적을 깨뜨릴 정도로 명확하 했다. 고무재질의 쟁반에서 쨍그랑 소리가 들릴 정도로 급하게 정리하고, 자리를 떴다.


  멍하게 그를 바라보는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온갖 감정이 뒤엉켜, 허둥지둥거리는 남자를, 앉아서 각자의 시간으로 불안을 떨쳐내던 남자들이 귀신이라도 본 듯이 놀라면서도 눈을 떼지 못한다. 고요함을 깨뜨린 원망의 이유가 아니라, 곧 불려 나갈 불안함, 혹은 두려움에 몸이 굳은 편에 가까웠다. 불안함에 치를 떨면서도, 애써 태연 한척하는 아저씨들의 묘한 긴장감이 아지랑이 치듯 피어오른다.


  결과가 나오기까진 2시간 남았다. 음성 결과가 먼저 나올까. 아이가 먼저 나올까. 벌떡거리는 심장이 먼저 튀어나올까. 가능성은 넘쳐나는데, 어떤 상황도 확신할 수 없다.     




#03


  산부인과에는 항상 사람이 많다. 예약을 했다 해도 최소한 30분은 기다려야 한다. 저출산, 그것도 세계에서 가장 적게 낳는 초저출산 국가의 산부인과는 바쁘다. 아이를 키우는 일은 더 힘들어졌다. 환경은 예전만 못하고, 기업은 더 악랄해졌다. 개인정보는 이제 공공재에 가깝다. 스마트폰이 세상을 바꿨지만, 인공지능은 사람을 바꿨다. 사람의 행동과 언어가 수시로 수집되고 임의로 분석된다. 원하기도 전에 서비스가 제공된다. 교묘하게 개인의 탓으로 돌리던 구조적 문제는 더욱 심해졌다. 개방의 미덕이 사라졌고, 형식적이던 협력마저 중단됐다. 그렇다고 다양성이 사라졌다는 의미도 아니다.


  불확실하고 위협이 되는 요소들이 넘쳐난다. 국가적 위협이나 보안을 넘어 학교나 회사, 오늘 저녁 메뉴에 대한 고민까지 ‘위협’ 혹은 ‘위험’이라는 범주로 수렴된다. 위험의 대가를 산술로 계산했던 시대에선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위험천만한 시대가 시작되었다. 국가나 기업의 제도화된 무책임성은 개인의 자유를 탄압하는 공식적인 입장이 되었다. 금융 상품으로 만들어진 문화(예를 들어 YOLO 같은)는 당연히 우리 시대가 추구해야 할 정신처럼 받들여지고 있다. 다양성이 있는데, 다양성을 만들어내는 사람(주체)은 없다.


  누구나 우주로 여행을 떠날 수 있다고 생각하면, 지금보다 훨씬 더 먼. 미래의 이야기는 좀 더 희망찰 수도 있겠다. 그런데, 누구나, 여행으로, 우주에 떠날 수 있을까. 수십 년, 적어도 수백 년은 지나야 가능하지 않을까. 어쩔 도리 없이, 우리가 당장에 마주할 미래는 극단적인 변화와 암담함이 지배적이다. 우리는 전쟁만큼 처절한 팬데믹을 겪고 있으며, 또 예측조차 불가능한 다른 위협을 마주할 인류의 역사를 답습하고 있다. 과연, 내일은, 내년, 그 이후의 우리와 우리의 세상은 어떻게 변화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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