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화 소 잡는 날
46화. 소 잡는 날
《마루 끝에서 본 세상》 2부
소 잡는 날은 돼지 잡던 날과는 또 달랐다.
동네잔치 같던 돼지 잡는 날과 달리,
소 잡는 날은 유난히 조용하고 무거운 기운이 돌았다.
아직 어두운 새벽,
우리 집 우물가에는
동네 어른 남자들 몇 분만이 모였다.
말수가 적고 조심스러웠다.
나는 마루 끝에서
그 어른들의 등과 숨소리를 지켜보았다.
밖에서 잡은 소를
우물가로 끌고 온 아빠와 동네 어르신들은
소를 조심히 눕히고
손에 익은 칼놀림으로 분해해 나갔다.
그리고 아직 김이 오르는
따끈한 소 간을
나와 동생들에게 먼저 건네주셨다.
“한 입씩만 먹어라.
딴 데선 못 먹는 거야.”
아빠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부드러웠다.
나는 그 말뜻을
어렴풋이 이해했다.
어릴 적부터
자주 아침에 쓰러지곤 했던 나를 위해
아빠는 가장 신선한 간을
늘 내 입에 먼저 넣어주셨다.
핏빛의 간을 받아 들 때
숨이 멎을 듯 낯설고 두려웠지만,
아빠의 간절한 마음이 느껴져
나는 눈도 감지 않고 꼭꼭 씹어 삼켰다.
그날 소의 갈비 한 짝, 다리 한 짝은
각 집 어른들에게
정갈하게 나누어졌다.
소의 부속물은 늘 엄마의 몫이었다.
엄마는 그날 밤도
사랑방 큰 가마솥에
선지 해장국을 푹 끓이셨다.
소뼈에서 우러난 진한 국물은
밤새 퍼올려도 끝이 없었다.
한겨울에 소를 잡는 이유는
냉장고가 없던 시절,
날이 추울 때 고기를 보관하기 위해서였다.
우리 부엌 옆 창고에는
언제나 소 다리 한 짝, 갈비 한 덩이
굵은 줄에 매달려 있었다.
서늘한 공기 사이로
고기에서 얼음기가 번쩍일 때면
나는 그것이 우리 집의 부유함처럼 느껴졌다.
아빠는 굳이 소를
우리 집에서 나누는 쪽으로 정하셨다.
그 일을 감당하는 번거로움보다
직접 나누고,
직접 아이들의 입에 간을 넣어줄 수 있는
그 선택이
아빠의 방식이었을 것이다.
허약했던 자식들을 위해
신선한 고기를 먼저 입에 넣어주고,
해장국을 끓이며
밤을 새운 부모의 마음.
그건 그 어떤 말보다
더 분명한 사랑이었다.
그날의 간의 온기,
가마솥 국물의 깊은 향.
그리고 마당을 지나는 어른들의 말 없는 눈빛.
소 잡는 날은 늘 고요했지만
참 깊고 뜨거운 날이었다.
---
#소 잡는 날 #시골겨울 #선지해장국
#부모의 사랑 #가마솥국물 #70년대 풍경
#브런치에세이 #마루 끝에서 본 세상 #미숙이의 기억
#아빠의 손 #신선한 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