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화 선지 해장국은 어디로 갔을까?
45화. 선지 해장국은 어디로 갔을까
《마루 끝에서 본 세상》 2부
돼지 잡는 날이 지나면,
그날 저녁은 마치 잔치 같았다.
마을 사람들은 돼지 부속품을 들고
한 사람, 두 사람 우리 집으로 모여들었다.
우리 집 사랑방 앞,
큼직한 가마솥은 그날의 중심이었다.
내장과 머리 고기, 피, 간…
모든 부속이 그 가마솥에 들어갔다.
우리 집 우물가에서
여인들은 팔을 걷어붙이고
내장을 소금으로 박박 문질러 씻었다.
양파, 파, 마늘, 무, 배추 같은 야채들도
찬물에 담갔다가 곱게 다듬었다.
엄마는 큰 앞치마를 두르고
선지를 조심스럽게 썰어 넣고,
양념을 한 국자씩 타이밍 맞춰 풀어 넣었다.
마늘 냄새, 들기름 향,
그리고 살짝 쿰쿰한 선지 향까지
사랑방 부엌 앞이 한겨울의 국밥집처럼
진하게 끓어오르던 밤이었다.
우리 가족은 그날 방 안에 있어도
선짓국 냄새에 배가 고파졌다.
솥뚜껑을 열 때마다
나는 키를 쭉 뻗어
들여다보기를 반복했다.
그날 밤 엄마는 쉴 새 없이
국자를 휘젓고, 양념을 더하고,
사람들의 손에 그릇을 들려주었다.
동네 사람들이 집집이 돌아가며
해장국을 담아 갔다.
다들 “역시 이 집 솜씨야” 하며
따뜻한 국 한 그릇을 들고 돌아섰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엄마는 내 앞에 따끈한 해장국 한 그릇을
말없이 내놓으셨다.
나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국을
밥 한 숟갈에 국 두 숟갈씩 떠먹으며
속까지 데워지는 그 따스함에
감탄하며 학교에 갔다.
그날 수업 시간 내내
그 해장국이 자꾸 생각났다.
빨리 집에 가서
한 그릇만 더 먹고 싶다는 생각에
수업이 길게 느껴졌다.
하교하자마자 달려가
가마솥 앞을 들여다봤지만,
텅 빈 솥 안엔
국물 한 방울 남아있지 않았다.
“엄마, 국 다 어디 갔어요?”
엄마는 마당을 쓸며
해맑게 웃으셨다.
“어쩌다 보니 다 퍼줬네.”
우리 먹을 것 한 냄비만
몰래 남겨두셨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나는 입술을 삐죽이면서도
엄마가 이웃들 그릇에 해장국을 퍼줄 때
자랑스러워하던 표정을 잊을 수 없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 밤 사랑방 가마솥 위에서 피어오르던
선지 해장국의 냄새는
마을을 데우는 연기이자,
엄마의 마음이었다.
---
#선지해장국 #돼지 잡던 날 #가마솥국물
#시골의 겨울 #엄마의 국 #마루 끝에서 본 세상
#브런치에세이 #동네잔치 #추억의 맛 #겨울풍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