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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화 돼지 잡던날

44화. 돼지 잡던 날

《마루 끝에서 본 세상》 2부


명절이 다가올 무렵이면,

마을 어귀가 유난히 소란스러워졌다.

그날이 바로 ‘돼지 잡는 날’이었다.


아빠는 며칠 전부터 건장한 청년들과 이야기를 나누셨다.

가끔은 술기운에 웃음이 터지기도 했고,

그 속삭임 사이로 어쩐지 엄숙한 긴장감도 감돌았다.

돼지는 마당에서 큰 다라 안에 사료를 헤집으며

아무것도 모른 듯 코를 킁킁대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아빠와 청년들은 굵은 밧줄을 준비하고

돼지를 마을의 울물가로 끌고 갔다.

그 돼지는, 아마도 뭔가를 느꼈는지

평소보다 훨씬 크게 꽥꽥 소리를 질렀다.

마치 자기의 운명을 아는 듯했다.


그곳엔 이미 동네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남자들은 담배를 피우며 무게를 잡았고,

여자들은 다라와 양푼, 큰 칼을 들고 삼삼오오 서 있었다.

내 또래 아이들은 호기심에 눈을 동그랗게 뜬 채,

한 걸음 뒤에서 숨을 죽이고 구경했다.


무슨 제의라도 치르는 듯,

한쪽에선 물을 끓이고, 다른 쪽에선

큰 식칼이 깨어지는 소리가 났다.

순식간에 돼지 목이 잘리고,

붉은 피가 커다란 대야에 담겼다.


털을 벗기기 위해 끓는 물을 부어가며

사람들이 돼지를 번쩍 들어 올렸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이때는 마을 전체가 함께 움직였다.

누구는 머리 쪽을, 누구는 등심을,

누구는 내장을 챙기고 있었다.


언제 약속했는지,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사람들은 자기 몫을 아는 듯

척척 다라에 담아 갔다.


엄마도 큰 다라를 들고 가셨다.

간이랑 피를 받아오셨던 것 같다.

돌아오는 길, 엄마는

돼지 간을 살짝 볶아

따끈한 밥 위에 얹어 주셨다.

“이건 피곤한 사람한테 최고야.”

엄마는 그렇게 말하셨다.


그날 하루,

동네는 술과 고기 냄새로 가득했고

아이들은 평소보다 자유로웠다.

누군가는 그걸 축제라 불렀지만

나는 어디선가 여전히 울리는

돼지 울음소리가 오래도록 귀에 남았다.


아주 오래전,

돼지를 잡던 날의 기억이

지금도 겨울 냄새와 함께 떠오른다.

그건 참 야생적이고,

또 한편으론 정겨운 풍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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