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미화 언니의 훈련소
미화는 우리 또래와는 조금 다른 분위기가 있는 친구였다.
그건 단지 하얀 피부나 또박또박한 말씨 때문만은 아니었다.
미화 곁엔 항상 ‘언니’라는 존재가 있었다.
미화 언니는 중학교에 다녔고, 방송반이었다고 했다.
방송반이라는 단어부터가 우리에겐 생소했다.
학교마다 있는 것도 아니었고, 우리처럼 막 뛰어놀기 바쁜 동네 아이들에겐
그런 활동은 먼 이야기 같았다.
미화는 늘 언니 얘기를 조심스레 꺼냈다.
“언니는 내가 걸을 때도 허리 펴라, 어깨 펴라 그래.”
“말할 때 입 벌리는 법도 알려줘.”
그럴 땐 마치 무슨 ‘무대 위 연습’을 하듯 따라 해 보이곤 했다.
손끝을 곧게 펴고 “안녕하세요”라고 인사하는 미화의 모습이
낯설지만 참 귀엽기도 했다.
어느 날, 나는 미화네 집에 놀러 갔다.
좁고 낮은 우리 집과는 달리 미화네는 높고 조용한 분위기가 났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조용히 책을 읽고 있던 언니가 우리를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갑자기 나에게 “소개하는 연습 한번 해볼래?” 하고 물었다.
처음엔 뭔 말인지 몰랐다.
“그냥 네 이름을 말하고, 어디서 왔는지, 무슨 걸 좋아하는지 말해봐.”
미화 언니는 단정하게 앉은 자세로
손짓까지 써가며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를 알려주었다.
“너무 빨리 말하지 말고,
입 모양을 또렷하게 하고,
웃는 얼굴로.”
나는 얼떨결에 따라 했다.
“저는… 황미순이고요… 마장 공판장 근처에 살아요… 좋아하는 건, 어… 고무줄놀이?”
그러자 언니는 “좋았어, 근데 말할 땐 어깨를 조금 더 내리고,
눈을 보고 말하면 더 좋아”라며 진지하게 가르쳐주었다.
그건 대역 연습 같은 느낌이었다.
우리는 연기자가 아니었지만
미화 언니의 눈엔, 모든 순간이 훈련의 장처럼 보였다.
내가 미화네 집에서 그렇게 소개 연습을 한 날,
집에 돌아오는 길 내내 그걸 몇 번이나 혼잣말로 따라 했다.
‘안녕하세요, 저는 황미순입니다.’
‘저는 고무줄놀이를 좋아합니다.’
낯설고 어색했지만, 그 말들을 하는 내 모습이 좀 새로웠다.
어쩐지 똑바로 걷고 싶어 졌고,
나도 조금은 멋있어지고 싶었다.
그날 이후, 나는 미화가 왜 말씨가 고운지 조금 알게 되었다.
그건 타고난 게 아니라,
곁에 누군가가 자꾸 다듬어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그날, 언니가 차려준 유자차를 마시며
작은 연극처럼 짧은 대사 놀이를 하기도 했다.
나는 생전 처음 보는 표정과 말투를 따라 해 보며
내 안에 있던 조심스러운 나를 꺼내 보는 기분이었다.
언젠가 미화 언니처럼,
누군가에게 말하는 법을 가르쳐주는 사람이 되고 싶단 생각도 들었다.
그땐 몰랐지만,
그날의 기억은 내 말투와 자세, 그리고 사람을 대하는 태도에
조용히, 깊게, 오래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