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의 골목

11화

들판의 줄, 아이들의 줄


모내기가 끝난 들판은

마치 자를 대고 그은 것처럼

모가 줄을 맞추어 심어져 있었다.

그 정돈된 풍경을

논둑에 앉아 한참이나 바라봤다.


어른들은 어쩜 저리도

한 치의 오차 없이 심을까,

아이들인 우리는 신기해하며

모판 위를 조심조심 걸어보기도 했다.

그러다 “야야, 밟지 마라!” 하는

어른들의 고함에 후다닥 도망치곤 했다.


모가 심어진 논은

초록빛이 점점 진해졌고

그 색은 곧 마을 전체를 물들였다.

멀리서 보면 마치 물결처럼 흔들리는 들판.

바람이 불면 초록의 잎들이 파도처럼 일렁였고

하늘엔 커다란 구름이 천천히 흘렀다.


어느새 마을은

모내기의 분주함을 지나

잠시 숨을 고르는 시간으로 들어섰다.

논일을 마친 어른들은

비로소 한낮에 마루에 걸터앉아

막걸리 한 잔, 수박 한 조각을 나눴고


아이들은 해가 지기 전까지

논두렁과 밭두렁을 뛰어다녔다.

술래잡기, 땅따먹기, 고무줄놀이,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고무줄은 멀리서 보면

마치 논의 모줄처럼

일렬로 팽팽하게 이어져 있었고

아이들의 발이 리듬을 맞추듯 오르내렸다.


논에서 뛰어오던 발에는 흙이 묻고

햇볕에 달궈진 얼굴은 벌겋게 익었지만

아무도 힘들다 말하지 않았다.

논두렁 한 편에 쪼그려 앉아

우리는 손에 잡히는 풀을 뜯고

꽃반지를 만들며 수다를 떨었다.


“너, 저기 구름 봤어?

토끼가 누워 있는 거 같지 않니?”

“아냐, 저건 공룡이야. 목 긴 공룡.”


하늘의 구름은 우리의 캔버스였고

들판은 운동장이며

논두렁은 소꿉놀이의 주방이었다.


아무것도 없었지만

우린 무엇이든 만들어냈다.

논물에 비친 얼굴을 보며

서로를 놀리고 웃었고

물웅덩이에 손을 담그고

누가 더 오래 버티는지 겨뤘다.


저녁이 되면

엄마의 부름 소리가

멀리서부터 들려왔다.

“미순아, 밥 묵어라—”

그 부름은 놀던 아이들에게

자연스레 헤어짐의 신호가 되었다.


해는 천천히 들판을 물들이며

하루를 접었다.

논에는 아직도 물이 고여 있었고

그 위엔 붉은 노을이

잔잔하게 퍼지고 있었다.


이야기 많은 하루였다.

숨바꼭질처럼 빠르게 지나간 하루.

하지만 그 모든 게

조용히 들판의 줄 사이로

스며들고 있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기억의 골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