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감나무 아래에서
12화. 감나무 아래에서
며칠 동안 나는 지유 언니네 집과 이모 집을 오가며 지냈다.
책을 같이 읽기도 하고, 골목 어귀를 돌아 작은 문방구며 분식집을 기웃거리기도 했다.
눈이 녹다 남은 빙판길에 미끄러질 뻔하면 언니가 먼저 손을 내밀었다.
“여기 조심해야 돼. 지난번에도 한 번 넘어졌었거든.”
언니는 동네 구석구석을 잘도 꿰고 있었다.
나는 그런 언니를 따라다니며 서울의 겨울 풍경을 익혀갔다.
어느 날은 언니가 내가 다닐 중학교 앞까지 데려가줬다.
“이쪽이 정문, 저쪽이 후문. 체육 시간에 저 운동장 쓰고.”
교정은 생각보다 컸고, 교실 창문에는 겨울 햇살이 걸려 있었다.
“네가 여기 다니게 되면, 내가 기다릴게.”
지유 언니는 그렇게 말했다.
같은 학교는 아니지만, 바로 옆집에 이렇게 든든한 언니가 있다는 게
왠지 나를 덜 떨리게 했다.
오빠는 아침마다 학교에 가고,
이모는 식당일로 바빴다.
나는 식당 구석에 앉아 책을 읽다
가끔 공중전화 앞으로 가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엄마… 나야, 선영이.”
“우리 선영이! 잘 지내니? 감기 안 걸렸고?”
“응. 오빠도 잘 챙겨줘. 이모도 친절하시고… 나 괜찮아.”
말은 그렇게 했지만, 사실 엄마 목소리만 들으면 눈물이 날 뻔했다.
그리움은 짧은 통화 뒤에 더 커졌다.
공중전화 수화기를 내려놓고
손등으로 조심스레 눈가를 문지르면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사람처럼 다시 식당으로 돌아왔다.
통화시간은 늘 짧았다.
‘전화비 많이 나오면 어떡하지?’
그 생각이 머릿속을 맴돌아
마음껏 엄마를 부를 수도, 목소리를 오래 붙잡을 수도 없었다.
그래서 나는 가끔 혼자 감나무로 향했다.
오빠가 알려준 그 언덕 위,
골목을 지나 계단을 오르면 나오는 마을 끝자락의 큰 감나무.
감나무 아래에 서면
멀리 도로와 시장, 저 멀리 희미한 고층 아파트들이 보였다.
붉은 노을이 그 위를 천천히 덮으면
나는 마치 고향집 마당에서 석양을 보던 아이로 돌아간 듯했다.
‘여기서 저기까지… 엄마 목소리가 닿을 수 있다면.’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마음속으로 조용히 가족들을 불렀다.
엄마, 아빠, 동생들…
조금만 기다려 줘요.
나, 여기서 잘해볼게요.
겨울 햇살이 감나무 가지 사이로 스며들었다.
그 따스함을 등에 받고
나는 다시 천천히 골목을 따라 걸어 내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