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의 골목

14화 단발머리 언니와 밤의 빨래 소리


단발머리 언니와 밤의 빨래 소리


우리 엄마는 동네 사람들에게 ‘미자 엄마’였다.

아빠도 ‘미자 아버지’라 불렸다.

언니는 우리 집 장녀였고, 그 이름 하나로 우리 가족은 불렸다.

세상에 첫발을 내디딘 첫 아이의 이름이

우리 가족 전체를 대신했다.


미자 언니는 나보다 일곱 살 많았다.

내가 국민학교에 입학하던 해, 언니는 이미 중학생이었다.

나는 셋째였지만, 국민학교 2학년 무렵부터는 둘째가 되었다.

가운데 언니와 오빠가 먼 세상으로 떠난 뒤였다.


그즈음부터 언니는 나와 같은 집에 살면서도

다른 시간 속에 사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나는 여섯 시면 일어나는 아이였지만

언니는 그보다 훨씬 먼저 집을 나섰다.

새벽 첫차를 타고 먼 학교로 향했고,

막차에 흔들려 돌아왔다.


나는 언니가 일어나 옷을 갈아입는 소리를 들은 적이 없었다.

대신, 한밤중 물소리로 언니의 존재를 느꼈다.

밤이 깊어 잠이 들 무렵,

부엌 바깥 마당에서

빨래하는 소리가 은근하게 들려왔다.

솥에서 데운 물을 퍼붓는 소리,

빨랫비누를 문지르는 소리,

두 손으로 헹구는 그 부드러운 찰랑임.

그게 언니의 하루 끝이었다.


언니는 항상 단발머리였다.

단정하고 말이 없었다.

웃음도 소리 없이 흘렸고,

피곤한 날엔 방 안에 조용히 앉아 있다 그대로 잠들었다.


그때 나는 자주 언니의 등을 보았다.

지친 듯하지만 억척스러운 뒷모습.

물기를 털 듯 머리를 반쯤 말리고

책가방을 벽에 기대 세운 채

언니는 마루 끝에 앉아 밤을 쉬었다.


언니는 자주 혼자였다.

엄마의 말없는 신뢰와

아버지의 무심한 칭찬 사이에서

언니는 조용히 제 몫을 다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였을까.

나는 언니에게 질문을 많이 하지 못했다.

“언니, 피곤해?”

“언니, 오늘 뭐 배웠어?”

묻고 싶었지만, 입을 떼기 전에 멈춘 말들이었다.


언니와 나는 같은 집에 살았지만

서로의 하루를 거의 모른 채 자랐다.

하지만 나는 그 밤의 빨래 소리를,

그 물기의 무게를,

그 손끝의 고단함을 지금도 기억한다.


언니는 단발머리를 말리며 하루를 털고,

나는 그 물소리를 자장가 삼아 잠이 들었다.

마루 끝에서 들려오던

언니의 삶은 그렇게 조용히

내 마음 어딘가에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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