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의 골목

75화

by 기억을 뀌메는 사람 황미순

75화. 기다림, 그 여름의 눈물

1983년 여름.
우리 가족은 하루도 빠짐없이 텔레비전 앞에 모였다.

TV 화면 아래로 흐르는 수천 개의 이름들,
"장○○, 1936년생, 서울 장충동 철공소집 둘째 아들"
그 익숙한 자막을 볼 때마다
엄마는 조용히 입을 다무셨고,
아빠는 술잔을 들지 않은 채 정좌한 자세로 화면을 보셨다.

우리는 간절했다.

**

아빠의 어릴 적 이야기에는
늘 외할머니, 외삼촌, 외사촌들이 등장했지만
아빠의 "진짜 가족" 이야기는 없었다.
장충동이라는 지명과 철공소라는 단서만 있을 뿐,
기억은 아득했고, 감정은 깊었다.

아빠의 그늘진 눈빛을
우리는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어릴 때는 왜 그런지 몰랐지만
나이를 먹으며,
아빠의 설움이,
그 ‘숨은 듯한 아픔’이
우리 가족 모두에게 전염되어 있었다.

**

어느 날은 엄마가 말씀하셨다.

> "너희 아버지, 한 번도 누구 탓을 안 하더라.
그냥 자기가 할 일 하며 살더라.
그게 더 맘 아픈 거다."



엄마의 그 말은
내 가슴 한편에 오래도록 남았다.

**

그해 여름,
나는 매일 이산가족 방송을 방청하듯 보았다.
울며 서로를 껴안는 화면 속 사람들,
50년 만에 만난 오빠,
초등학교 앞에서 헤어진 딸을 찾은 어머니.

나는 TV를 보며
그들의 눈물을 나의 눈물처럼 흘렸다.
정말, 함께 울었다.

그러면서도,
그 자리에 아빠가 있기를 바랐다.
카메라 앞에서
"내가 찾는 형입니다" 하고 손 흔드는 누군가가
우리 아빠를 알아봐 주기를 간절히 원했다.

**

가을이 가까워져 오고,
날이 서늘해질 무렵에도
아빠의 가족은 나타나지 않았다.
전화벨이 울릴 때마다
우리 집은 숨을 멈췄고,
"아니야, 그냥 가게에서…" 하면
조용히 안도의 한숨이 섞인 아쉬움이 흘렀다.

**

그 여름,
우리는 희망을 배웠고,
기다림의 아픔도 함께 배웠다.

아빠는 말이 없어지셨고,
엄마는 더 조용해지셨다.
우리 자식들은
아빠가 놓치고 온 가족의 모양을
마음속에서 하나씩 상상해 보며
아빠를 더 깊이 이해하게 되었다.

**

"아빠, 혹시라도 그분들이 아직 살아 계시다면…"
나는 마음속으로 혼잣말처럼 늘 기도했다.
아빠의 설움이, 그 여름
우리 모두의 것이 되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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