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의 골목

73화

by 기억을 뀌메는 사람 황미순

73화. 밥을 먹다 말고

1983년 여름.
그날 저녁, 우리는 밥상 앞에 앉아 있었다.
엄마는 부엌에서 찌개를 푹 끓여 내왔고, 아빠는 고추장을 푼 양푼에 밥을 비비고 계셨다.
나는 중학교 2학년이었고, 동생들은 책가방을 던지고 막 뛰어놀다 돌아온 참이었다.
평범한 여름 저녁.
그런데 TV에서 낯선 장면이 흘러나왔다.

‘이산가족을 찾습니다’

흰색 플래카드에 큼직하게 써진 이름들.
눈물로 말하는 사연들.
카메라는 눈시울이 붉어진 사람들의 얼굴을 한 명씩 비췄다.

아빠의 숟가락이 멈췄다.
엄마도 국자 들고 화면을 응시했다.
우리는 밥을 먹다 말고, 하나둘 TV 앞으로 다가섰다.

아빠는 아무 말 없이 화면을 오래 바라보셨다.
때론 무겁게 한숨을 쉬시기도 했다.
방송은 하루 이틀을 넘어, 그 여름 내내 이어졌다.
처음엔 뉴스처럼 짧게 하더니, 이젠 하루 종일 방송에서 이산가족 사연이 흘러나왔다.
우리 가족도 그 방송을 하루 종일 보았다.

"저 사람… 얼굴이… 많이 닮았네…"
아빠는 혼잣말처럼 주얼이셨다.
그러곤 조용히 방에 들어가시더니, 낡은 서류봉투 하나를 꺼내셨다.
그 안엔 누렇게 바랜 흑백사진과, 한자로 된 옛 편지지 몇 장이 들어 있었다.

"이 방송… 보통 일이 아니야. 진짜 찾을 수 있을지도 몰라."

우린 그제야 알았다.
아빠에게도, 아직 만나지 못한 가족이 있다는 걸.

**

TV 속 사람들의 사연은 하나같이 아팠다.
눈이 오던 날 헤어졌다는 아이,
국군으로 끌려가다 마지막 본 여동생,
할아버지를 못 찾았다고 울먹이는 청년까지.

우리는 그 여름을 TV 앞에서 보냈다.
TV 화면 아래 자막으로 흐르는 이름들을 함께 읽었다.
혹시 아빠의 성, 고향, 나이와 비슷한 사람이 뜨면
동생들은 얼른 메모지를 들고 적어두었다.
엄마는 안경을 고쳐 쓰며 말없이, 오래 화면을 바라보셨다.

**

그 여름, 아빠는 동네 이장님과 면사무소에 몇 번이나 다녀오셨다.
우리 가족의 족보와 옛 주소, 고향에 남아있을지 모를 먼 친척의 이름까지
무언가를 꼼꼼히 정리하시고,
KBS로 이산가족 신고서를 보내셨다.

나는 그날 이후, 아빠의 눈빛을 잊지 못한다.
말은 안 하셨지만, 아빠는 마음 깊이 그리운 얼굴을 품고 살아오셨던 것 같다.
태평소로 웃던 그분의 인생에도,
누군가를 향한 긴 그리움이 늘 함께였다는 걸,
나는 중2 그 여름에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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