찻잔 속의 하루
(제목: 『찻잔 속의 하루』)
어릴 적 우리 집에는 찻잔이 없었다.
어머니는 언제나 하얀 법랑 주전자에 보리차를 끓이셨고,
아버지는 그걸 밥그릇처럼 생긴 사기그릇에 마셨다.
내가 처음 ‘찻잔’이라는 걸 손에 쥔 건,
마흔을 넘겨 사무실 책상 위에 머그컵을 놓기 시작하면서였다.
나는 1958년 7월, 충북 괴산에서 태어났다.
7남매 중 셋째였고, 부모님은 늘 바쁘셨다.
나는 말수가 적은 아이였고, 듣는 쪽에 가까웠다.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사람을 관찰하고,
그 사람의 말속에 담긴 뜻을 오래 곱씹는 습관이 생긴 건.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나는 서울로 올라갔다.
친척집에 얹혀살며 낮에는 사무보조 일을 하고
밤에는 학원에서 타자 연습을 했다.
그 시절엔 ‘비서’라는 직업이 멋져 보였다.
정장을 입고 문서를 들고 복도를 걷는 모습이
마치 영화 속 사람들 같았으니까.
첫 직장은 을지로의 한 제지회사였다.
오전 9시에 출근해, 전화받고 차 내리고,
점심때엔 상무님 서류를 택배로 보내고,
퇴근하고 나면 전철역까지 뛰어가야 했다.
하지만 그 시절이 내겐 아주 반짝거렸다.
스물한 살, 햇살이 닿는 구두를 신은 내 발이
조금은 어른스러워 보이던 시절이었다.
스물다섯, 지금의 남편을 만났다.
사무실 옆 건물에 있던 세무사무소 직원이었다.
조용하고 예의 바른 사람.
큰 감정표현은 없었지만 항상 따뜻했다.
그 사람과 결혼해 아들 둘을 낳았고,
서른부터 마흔까지는 눈 깜짝할 새에 지나갔다.
그땐 나 자신보다 식구들의 끼니와 학비,
명절 선물과 잔치비용을 먼저 챙겨야 했으니까.
쉰이 지나서야 내 손에 찻잔이 들어왔다.
큰아이의 결혼식이 끝난 어느 날,
친구가 내게 예쁜 찻잔 세트를 선물로 줬다.
그 찻잔으로 녹차를 마시며 처음으로,
나는 하루를 천천히 보내는 법을 배웠다.
내 삶은 대단하지 않다.
신문에 날 일도, 방송에 나갈 일도 없었다.
하지만 나는 하루하루를 정직하게 살아왔다.
가족에게 부끄럽지 않은 마음으로,
내 이름으로 살아온 그날들을 이제
한 줄 한 줄 글로 남기고 싶다.
이 글을 누군가 읽게 된다면,
나는 그 사람이 고개를 끄덕이며
이런 말을 했으면 좋겠다.
“참 괜찮게 살아오셨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