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스물한 살이었다.
1화. 스물한 살의 봄
1992년 봄, 나는 스물한 살이었다.
외삼촌 집 옥탑방에서 자취를 하며 대학 2학년을 보내고 있었다.
낮에는 강의를 듣고, 저녁에는 카페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하루하루가 분주했고, 미래를 향한 조급함으로 늘 가슴이 타들어갔다.
스무 살의 열정은 그대로였지만
현실은 그 열정만으로 버티기엔 벅찼다.
시간이 없었고, 여유도 없었고,
누군가의 안부를 묻고, 내 감정을 들여다볼 틈도 없었다.
그렇게 바삐 사는 내게,
어느 봄날 한 남자가 들어왔다.
군 제대 후 복학한 선배.
처음엔 그냥 그런 사람이었다.
첫 교양 수업 시간,
그는 내 옆자리에 조용히 앉았다.
그 뒤로 이상하게 자주 마주쳤다.
밥을 먹으러 가도, 도서관에 가도,
심지어 아르바이트 끝나고 버스 정류장에 서 있을 때도
그는 늘 어디선가 나타나곤 했다.
"밥은 먹었냐."
"너 오늘 목소리가 안 좋다."
"왜 그렇게 바쁘게 살아?"
그의 말투는 늘 무심했지만,
그 안엔 나를 바라보는 따뜻함이 묻어 있었다.
처음엔 그게 그저 선배로서의 관심이라 여겼다.
수업 시작 전, 그는 늘 나보다 먼저 강의실에 와 있었다.
강의실 문을 열면,
그는 미리 내 자리를 비워두고선 나를 보고 손을 흔들었다.
"여기, 여기!"
낯익은 그의 손짓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그 옆자리에 앉으면,
그는 어김없이 전날 있었던 재미난 일들을 이야기해 주었다.
"야, 너 그 얘기 들었어? 어제 우리 동기 하나가 수업 시간에…"
목소리에 생기가 가득했고, 눈빛은 장난스러웠다.
어느 날은 이렇게 말했다.
"어제 너 안 왔을 때 진짜 웃긴 일 있었는데, 너 생각났어."
그 한마디에
나는 괜히 마음이 간질거렸고,
그가 나를 생각했다는 사실 하나로 하루가 가벼워졌다.
그는 대화를 참 잘 이끌었다.
요즘 읽는 책 이야기, 신문에서 본 기사, 뉴스에서 들은 흥미로운 이야기까지—
주제는 다양했지만, 그보다 더 인상 깊었던 건
그가 나를 중심에 두고 말을 건넸다는 사실이었다.
"너는 어떻게 생각해?"
"너한테 들으면 더 재밌을 것 같아서."
그의 자신감 있는 말투,
밝은 에너지,
늘 사람을 끌어당기는 그 리듬.
나는 그저 옆에 앉아 듣고만 있었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 시간이 기다려졌다.
그가 나를 기다리는 것보다
내가 그를 더 기다리게 된 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노래를 따라 흥얼거리고,
같은 수업을 신청하고,
우연인 듯 겹치는 스케줄이 반복돼도
그저 ‘운이 겹쳤나 보다’ 하고 넘겼다.
그의 말에 웃음이 났고,
그의 전화에 가슴이 뛰고,
그가 며칠 안 보이면 허전했지만—
나는 그게 무엇인지 끝끝내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땐 몰랐다.
그게 사랑이었다는 걸.
아마 알고 있었지만,
애써 모르는 척했을지도 모르겠다.
내 삶이 너무 무거웠고,
사랑 같은 건 내게 사치처럼 느껴졌으니까.
그리고 어느 날,
그가 말했다.
"이번 학기 끝나면 잠시 학교를 쉴 것 같아.
아버지 일이 좀 힘들어지셔서."
그는 담담하게 말했지만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입술이 말라붙고, 심장이 내려앉았다.
그러고는…
정말 그렇게, 아무런 예고 없이
그는 내 곁에서 사라졌다.
작별 인사도, 설명도 없이.
그해 여름,
옥탑방 창밖으로 불어오던 바람이 어쩐지 낯설었다.
버스 정류장에 혼자 서 있을 때면
그가 오던 방향으로 자꾸만 눈길이 갔다.
그러다 문득, 아주 뜬금없는 순간에
그를 생각하며 울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그제야 알았다.
그게 사랑이었다는 걸.
그 사람은,
내 스물한 살의 봄이었다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