빗속에서, 아무 말 없이

억수 같은 비.

3화. 빗속에서, 아무 말 없이

외삼촌 집은 버스 정류장에서 15분쯤 걸어야 했다.
언덕도 있고, 가로등도 드물어
밤에 혼자 걸어가기엔 늘 조금 외로웠다.

나는 버스 정류장 근처의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금요일부터 일요일까지 아르바이트를 했다.
식사시간을 넘긴 손님들이 뜸해질 때쯤
매니저의 눈치를 보며 빠르게 뒷정리를 하고,
밤 11시가 다 되어야 퇴근할 수 있었다.

친구들과 길게 어울릴 시간은 없었다.
알바를 마치면 곧장 집으로 향해야 했으니까.

외삼촌은 출입구가 달라서 나를 마주하진 않았지만,
현관 센서등이 켜졌는지를 꼭 확인하고 나서야
비로소 안심하고 잠이 드셨다.
그걸 알기에
나는 늘 제시간에 조용히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날도 평소처럼 일이 늦게 끝났다.
그런데 문제는—
비였다.
그냥 비가 아니었다.
하늘이 쏟아붓는 듯한 억수 같은 비.

우산은 없었고,
레스토랑에 비치된 비닐 우비도 다 나간 상태였다.
나는 조리장에게 커다란 쓰레기봉투를 하나 얻었다.
허리를 잘라 머리에 씌우고,
양팔을 비닐로 둘러 겨우 몸을 덮었다.
그러곤 비를 뚫고 터덜터덜 정류장 쪽으로 걸어 나왔다.

그런데 그 순간—
입구 근처 가로등 아래
커다란 우산을 든 그 사람이 서 있었다.

선배였다.
비에 젖지 않으려고 몸을 바짝 구부린 나를
그는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멈춰 섰고,
그도 말없이 다가왔다.
우산을 내 쪽으로 기울이며 말했다.
"야… 뭐 하는 거야, 이게."
말투는 웃는 듯했지만, 눈빛은 심각했다.

"비가 이렇게 오는데 왜 그냥 오려고 해."
"우산이 없었어…"
"그럼 전화하지. 내가 데려다줄게."

그 순간 나는
숨겨왔던 감정이 다 무너질 것 같았다.

그는 아무 말 없이 내 어깨 위로 우산을 더 깊이 눌러주었다.
그리고 한 손으로는
내가 비에 젖은 옷자락을 툭툭 털어냈다.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지만,
그 안에 담긴 마음이 너무 커서
그 앞에 내가 너무 작아지는 것 같았다.

우리는 말없이 걷기 시작했다.
오르막길을 따라
물 웅덩이를 피해
나란히, 아주 천천히.

그 길이 그렇게 짧았던가 싶을 만큼
나는 그 순간을 오래오래 기억하고 싶었다.
말 한마디 없어도,
그 옆에 있다는 것만으로 마음이 놓였다.

집 근처 골목 입구에 도착했을 때
그는 우산을 넘기며 말했다.
"이거 가져가. 내일 돌려줘."
"너는?"
"나는 뛰어가면 돼."

그리고는
내 대답을 듣지도 않고 등을 돌려
비를 뚫고 달려갔다.

그날 밤,
우산을 껴안고 계단을 오르며
나는 처음으로 울고 싶어졌다.

그가 비를 맞고 돌아서는 뒷모습에
내 모든 마음이 젖어버린 것 같았다.

그리고 나는
그제야 깨달았다.
이건 그냥 다정한 선배가 아니었다는 걸.

나는 그를
아주 많이,
이미 오래전부터
좋아하고 있었다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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