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밤 잠들 수 없었다.
23화. 다시, 내 앞에 선 당신
회사에 다닌 지 벌써 5년.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건 사무실의 공기뿐만 아니었다.
지각 하나 없이 매일 아침 같은 시간에 출근했고,
프로젝트가 잡히면 밤을 새워서라도 마감에 맞췄다.
‘성실한 직원’, ‘믿을 수 있는 팀원’
그런 말들이 나를 설명해 주는 꼬리표가 되어
누구보다 바쁘고 치열하게 20대의 후반을 보내고 있었다.
상사들은 날 신뢰했고,
어느 날부턴가 ‘팀장’이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나왔다.
아직은 이르다는 생각도 했지만
욕심보단 책임감이 컸기에,
그 기대에 부응하고 싶었다.
그러던 어느 날,
사내 인트라넷에 인사발령 공지가 떴다.
"마케팅 전략팀 신임 팀장… 윤기준."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설마… 같은 이름일 수도 있지.’
그 이름이 흔하지 않은 건 알았지만
그래도 아닐 수도 있다고,
아니길 바라고 있었다.
그리고 마주했다.
오전 회의실.
낯설지 않은 미소를 머금은 얼굴.
조금은 더 단단해진 눈빛과
나긋한 말투.
“잘 지냈지, 혜선아?”
낯설지 않은 목소리,
낯설어선 안 되는 이름.
나는 아무렇지 않게 웃었다.
“어머, 윤기준 팀장님. 반갑습니다.”
의식적으로 ‘팀장님’이라는 호칭을 붙이며
프로페셔널한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어쩌면,
내 손끝이 살짝 떨리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회의는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그는 날 보며 특별히 말을 걸지도, 시선을 오래 두지도 않았다.
오히려 너무 무심할 정도로
업무적으로만 나를 대했다.
그런 그 태도에
괜히 내가 혼자 많은 걸 기대한 것 같아
속이 뒤집혔다.
‘그냥 그런 거지… 오랜만에 만났다고 뭐가 달라지겠어.’
하지만 퇴근길,
문득 그가 복도 끝에서 나를 불렀다.
“혜선 씨, 잠깐만.”
뒤돌아보니, 그가 예전과 똑같은 눈빛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그 눈동자 안에서 나는 다시
3학년 도서관의 그 가을로,
종로서적의 겨울밤으로
순식간에 빨려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오늘 하루 어땠어?”
너무 일상적인 질문.
하지만 그 순간,
나는 모든 걸 애써 눌러놓고 살아왔다는 걸 깨달았다.
“… 괜찮았어요. 요즘 바쁘게 잘 지내요.”
내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속은 잔잔하지 않았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조용히 말을 덧붙였다.
“난…
네가 여기 있을 줄 몰랐어.”
그 말을 끝으로 그는 다시
팀장의 얼굴로 돌아갔다.
정중하고, 단정하고, 거리 두는 태도로.
하지만 나는 그날 밤
잠들 수 없었다.
그 사람의 눈빛이,
내가 한때 그토록 외면하려 했던
그 사랑이,
아직도 내 안 어딘가에 남아 있다는 걸
부정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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