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사람이 가진 이름

걱정이 앞섰다

by 기억을 뀌메는 사람 황미순

24화. 그 사람이 가진 이름

다음 날부터, 나는 철저히 업무 중심의 사람으로 돌아갔다.
회의에서는 누구보다 냉정하고,
보고서 피드백은 전보다 더 철저하게 썼다.
누군가 내가 팀장과 대학 동기라는 걸 알면
어떻게 볼까, 걱정이 앞섰다.

그는 여전히 침착하고 깔끔하게 팀을 이끌었다.
회식 때도 늘 적당히 거리를 유지했고
개인적인 얘기를 꺼내는 법은 없었다.
다만 가끔… 아무도 모르게 내 자리 옆에 조용히 서서
"이거 괜찮은 자료네"
한마디 던지고는
아무렇지 않게 지나가곤 했다.

그게 다였다.

그런데 이상했다.
그 짧은 한마디에도
내 가슴은 고요한 호수에 돌 하나 던진 것처럼
파문을 그렸다.

그날은 금요일이었다.
기획실 회의가 늦게 끝나고,
나는 복사실에 혼자 서 있었다.
프린터 앞에 멍하니 서 있는데
뒤에서 그가 말을 걸었다.

“너, 많이 변했다.”

그 순간 나는
“그쪽도요.”
딱 그렇게, 짧게 대답했다.

그는 웃었다.
그 웃음이
예전처럼 말장난 직전에 터뜨리던 웃음 같기도 했고,
무언가 지켜내고 싶다는 눈빛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날 밤, 팀 막내가 내게 물었다.
“선배, 혹시 윤 팀장님이랑 아는 사이예요?”
나는 눈을 피하며 말했다.
“학교 동기였어. 그게 다야.”

하지만 그게 다는 아니었다.

며칠 뒤,
회사의 오래된 인사기록 파일을 정리하다
우연히 그 이름을 다시 보게 되었다.
그리고 거기,
작게 쓰인 한 줄의 문구가 눈에 들어왔다.

‘대표이사 장남’

나는 숨이 멎을 뻔했다.

모든 조각이 퍼즐처럼 맞춰졌다.
그가 회의 때마다 유난히 주목받던 이유,
그 누구도 그에게 불필요한 간섭을 하지 않았던 분위기,
그리고 내가 아무리 좋은 성과를 내도
그 앞에선 이상하게 조심스러웠던 상사들.

그는…
그저 내 선배가 아니었다.
이 회사의, 내 삶의 한가운데 있는 사람이었다.

갑자기 모든 순간이 낯설게 느껴졌다.
그가 처음 날 회사에 소개해준 순간,
그게 단순한 배려라고만 생각했던 나 자신이 바보 같았다.
그동안 그는…
어떤 마음으로 날 도왔던 걸까.
어떤 감정으로, 내 곁에 머물렀던 걸까.

그날 밤,
나는 책상에 앉아 아무 일도 하지 못했다.
책장 사이에 끼워둔 예전 종로서적 영수증을 꺼내
멍하니 들여다봤다.

시간은 흘렀고
그는 여전히 같은 사무실에 있었다.
단지,
다른 자리에서, 다른 이름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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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루 끝에서 바라본 유년의 기억을 꿰메어 글을 씁니다. 삶의 조각들을 하나씩 꿰메어 언젠가는 나만의 ‘토지’를 완성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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