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묵히 기다려준 사람이었다.
30화. 우리가 끝내 말하지 못했던 것들
사랑의 감정을 느끼지 못한다고 스스로를 자책했던 나는,
교회에서 날 가장 집요하게, 가장 적극적으로 좋아해 주었던 사람과 결혼했다.
그 사람은 매일 내게 작은 쪽지를 남겼고,
꽃을 놓았고, 기도했고,
때로는 진심이 버거워 도망치려 했던 나를,
묵묵히 기다려준 사람이었다.
“사랑할 수는 없지만, 예쁜 가정을 꾸릴 수 있을 거야.”
그게 내 마지막 결론이었다.
사랑이라는 불확실한 감정보다,
지속 가능한 일상, 예측 가능한 평화.
그게 내가 내린 현실적인 선택이었다.
결혼식 날, 문득 그 사람—오랜 시간 내 마음속 한 귀퉁이를 차지했던 선배—가 생각났다.
사람들 속에서, 문득 돌아보면
그가 거기 있을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는 오지 않았다.
물론, 오면 안 되는 자리였다.
우린 끝내 사랑이라는 단어를 서로에게 쓰지 못했다.
내가 도망쳤고,
그는 침묵했고,
시간은 그 모든 마음들을 조용히 덮어버렸다.
결혼 후, 바쁘게 사는 날들이 이어졌다.
아이를 낳고,
밤을 새우며 키우고,
출근 전 도시락을 싸고,
주말이면 장을 보고, 성당에 가고.
겉으로 보기엔 모난 데 없는 가정이었다.
남편은 여전히 나를 아껴주었고,
나는 그런 그를 존중하며 살았다.
어느 날, 거울 속 내 모습을 보며 문득 생각했다.
“사랑은 없어도 괜찮은 걸까?”
그 답을 아는 건, 아마 나도 아니고 선배도 아닐 것이다.
다만, 우리가 서로에게 끝내 말하지 못했던 것들.
그 말들 속에
‘사랑’이란 감정이 아주 작고 조용하게,
남아 있었던 건 아닐까.
종로의 오래된 서점에 다시 갔다.
지금은 많이 바뀌었고,
그때 그 코너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나는 여전히 책을 집어 들었다.
언젠가 선배가 내게 건넸던 책 중 한 권을.
책장을 넘기다, 연필로 적힌 짧은 글을 발견했다.
> “시간이 흐르면 마음도 흐른다.
하지만 흘러가도, 사라지진 않는다.”
한참 동안 책을 든 채 서 있었다.
마치 오랜만에 누군가에게 안부를 전해 들은 것처럼.
그날 집으로 돌아오는 길,
아이의 손을 잡고 남편의 웃음소리를 들으며 생각했다.
내 삶은 후회로 가득하진 않았다.
사랑은 짧았지만,
고맙고 따뜻한 사람이 곁에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그 시절은 충분히 아름다웠다.
그와 나,
끝내 사랑을 말하지 않았던 두 사람.
어쩌면 그 자체가
우리가 나눌 수 있었던 사랑의 방식이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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