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아무렇지 않다는 말

심장에 툭 하고 떨어진 듯한 기분이었다.

by 기억을 뀌메는 사람 황미순

29화. 아무렇지 않다는 말

선배가 유학 시절 알고 지내던 여성과 혼담이 오간다는 이야기를 들은 건,
회의가 끝나고 사무실에서 나가는 엘리베이터 안이었다.

“들었어? 팀장님, 혼담 들어갔다더라.”
“상대가 유학 시절 알던 사람이래. 집안에서 오래 본 관계라더라.”

그 말이 내 귀에 닿는 순간,
마치 오래전 바닷속에 가라앉아 있던 돌멩이가
심장에 툭 하고 떨어진 듯한 기분이었다.

그날, 난 아무 일 없는 듯 웃으며 퇴근했다.
회사 앞 카페에 들러 커피를 하나 들고,
익숙한 길을 따라 천천히 걸었다.
그리고 속으로 몇 번이나 되뇌었다.

“괜찮아. 아무렇지 않아.
선배는 처음부터 날 여자라고 생각한 게 아니었잖아.
그저 후배. 좋은 후배였을 뿐.”

머릿속에선 그럴듯한 말들이 줄지어 지나갔다.
이성적인 판단. 적당한 거리감. 쿨한 태도.
하지만 가슴은... 묘하게 불편했다.

내가 그 사람을 정말 좋아했던가?
아니, 이제는 다 지난 감정이었다.
사랑이라기보다 감사였고,
그가 내 삶에 남긴 온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온기가, 다른 사람에게 가게 되는 상상은
묘한 질투처럼 가슴을 긁었다.

나는 누구였을까.
그 사람에게, 나는 어떤 존재였을까.
마음 한구석에서 아주 조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사람은 너에게, 진심을 건넸던 적도 있어.’

그랬다.
어느 겨울, 문 앞에 놓여 있던 약봉투와 도시락.
아픈 날,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눈물만 났던 날.
그는 그저 말없이 “괜찮다”라고,
“부담 갖지 말라”라고 했던 사람이다.

그걸 사랑이라 단정할 순 없지만,
분명 그건 한 사람의 깊은 마음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 마음을 애써 외면했다.
두려웠고, 피하고 싶었고,
그저 졸업만 하면 끝나는 일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지금,
나는 다시 그 사람의 곁에 있다.

그 사람은 예전처럼 나를 챙기지 않는다.
다정한 눈빛은 업무로만 향하고,
사적인 질문은 점점 줄어들었다.
그는 이제 더 이상 내 마음을 살피지 않는다.
나는 그 변화가 오히려 편했다.

하지만 그 소식이 전해진 순간,
모든 무게가 엎질러진 물처럼
한순간에 흩어져 버렸다.

괜찮다고, 아무렇지 않다고
수없이 말하면서도
내 안의 나는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았다.

“왜 하필 그 사람이어야 했을까.”
“왜 그 사람과 그런 관계까지 가게 된 걸까.”
“나는 그 어떤 자격도 없었던 걸까.”

물론, 선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회사 안에서 그 이야기를 입 밖에 꺼낸 적도 없었고,
나에게 그 여성에 대해 설명하거나
단 한 번의 눈빛 변화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게 오히려 더 힘들었다.

아무 감정도 없었던 사람처럼,
모든 게 지나간 과거처럼,
그는 여전히 단정했고,
여전히 차분했다.

나는 어느 날, 회사 복도에서 마주친 선배에게
그냥 인사만 건넸다.

“팀장님, 좋은 하루 보내세요.”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혜선 씨도.”

그리고 그대로 지나쳤다.
언젠가 내가 외면했던 그 마음처럼,
이번엔 그가 내 마음을 모르고 지나친 것이다.

그날 밤, 집에 돌아와 책장을 정리하다
예전에 선배가 건네줬던 책 한 권을 발견했다.
밑줄 쳐둔 문장이 눈에 들어왔다.

> “우리는 종종, 가장 소중한 것일수록
말하지 않고 묻어두려 한다.”



나는 책을 덮고 한참 동안 멍하니 앉아 있었다.

그 시절, 말하지 못했던 내 마음과
지금, 말할 수 없는 선배의 마음이
한 책장을 사이에 두고 마주 보는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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