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벽 뒤에 남겨진 것들

마루 끝 추리

by 기억을 뀌메는 사람 황미순


창밖으로 흐르는 하루의 빛은 이미 바닥에 스러져 있었다.
연주는 오래된 지하 스튜디오의 형광등을 켰다. 차가운 불빛이 바닥과 벽 사이, 오래전 묻어두었던 시간들을 다시 끌어올리듯 퍼졌다. 그곳은 그들의 첫 전시가 준비되던 공간이자, 그해 겨울 가장 많은 눈이 쌓였던 곳이었다.

“냄새가…”
먼지 섞인 곰팡이 냄새.
지하의 공기는 늘 숨을 가로막았고, 연주는 몇 초 동안 그 숨 막힘 속에 그대로 서 있었다.

스튜디오 한쪽 벽, 그곳에는 벽에 붙여둔 캔버스 뒤로 무언가가 숨겨져 있었다. 지난겨울, 누군가 급히 치운 듯한 자국. 테이프 자국이 남아 있고, 그 자리에 약간 떠 있는 벽지가 기묘하게 들떠 있었다. 연주는 무릎을 꿇고 그 틈을 손톱으로 뜯어보았다.

거기엔 오래된 폴라로이드 사진 한 장이 삐뚤게 붙어 있었다.
사진 속.
한 남자가 그녀를 보고 웃고 있었고, 그 뒤로 흐릿하게 한 아이가 있었다. 연주는 심장이 찢어질 듯 움찔하며 뒤로 물러났다.

“이게… 언제 거지…”
기억을 뒤져도 저 장면은 없었다.
그런데 사진 속, 구석에 적힌 숫자.
“95. 1. 28”

“그날이다.”
그녀는 중얼이며, 몸을 떨었다.
그날은, 그 아이가 사라진 날이었다.

지하 스튜디오엔 그 아이가 머물렀다.
아무도 말하지 않았지만, 누군가는 알고 있었다.
연주는 기억 속에서 또 한 사람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 스튜디오를 처음 소개해줬던 사람, 그리고 첫 전시 당시 내내 조명 세팅을 했던 남자. 이름은 ‘진욱’.

“진욱 오빠…”
그는 늘 밤에만 와 있었고, 지하의 구조를 가장 잘 알았다.

그 순간, 스튜디오 문이 덜컥 열렸다.
누군가 들어왔다.

“연주야?”

익숙한 목소리.
진욱이었다.
그는 여전히 검은 모자를 쓰고 있었고, 손에는 작은 종이 가방을 들고 있었다.

“여기… 다시 오다니. 네가 이렇게 오래 붙들고 있을 줄 몰랐어.”

“이 사진.”
연주는 사진을 들고 그를 바라보았다.

“오빠, 이거 기억나지?”
진욱은 그걸 보더니 미세하게 입꼬리를 떨었다.

“아직도 네가 이걸 찾고 있을 줄은… 솔직히 좀 무섭다, 연주야.”

“왜 이게 여기 있어? 그날, 나만 본 거 아니었지? 오빠도 있었지?”

진욱은 침묵했다.
그의 눈동자는 붉게 충혈돼 있었고, 미간이 천천히 구겨지듯 주름졌다.

“… 그래. 나도 봤어.
하지만, 넌 울고 있었고. 넌 몰랐잖아.
난 그냥... 그 아이가 집에 간 줄 알았어.”

“거짓말하지 마. 오빠, 스튜디오 문 잠근 사람, 오빠잖아.
아무도 못 나가게 했잖아.”

진욱은 종이 가방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가방 안에서 철컥, 무언가 부딪히는 소리.
그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들었다.

“그 아이... 지금도 여기에 있는 거야?”
연주의 목소리는 바늘처럼 떨렸다.

진욱은 천천히 시선을 스튜디오 안쪽 벽으로 돌렸다.
“지금도... 있는지, 난 몰라.”
그 말은, 한때 있었다는 의미였다.

연주는 무릎을 꿇고 다시 캔버스를 치웠다.
그 뒤 벽, 그 위에는 이상한 자국이 남아 있었다.
마치 벽을 뜯고 무언가를 붙였다가 다시 덮은 흔적.

“우리가 여기서 전시를 하던 날,
그 아이는, 그 뒤에 있었던 거야?”
연주의 눈엔 눈물이 맺혔다.

진욱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바닥에 앉아 연주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말했다.

“진실이 다 나왔다고 해서,
사라진 아이가 돌아오는 건 아니야.”
“하지만, 그 아이는 우리 중 하나였어.
우리 전시를 매일 와서 보던 아이.
너도 기억하잖아. 그날 마지막까지 남았던 유일한 관람객.”

정적이 흐르고, 지하의 형광등이 깜빡였다.

연주는 입을 열었다.
“누군가는 말해야 해. 그 아이가 여기에 있었다고.
우리가, 다 알고 있었지만, 모른 척했다고.”

그날 밤,
연주는 오래된 지하 스튜디오의 벽 앞에서
폴라로이드 사진을 조심히 들고
스튜디오를 나섰다.

진실은, 여전히 그 벽 뒤에 있었다.
하지만 이제, 그녀는 그것을 끌어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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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루 끝에서 바라본 유년의 기억을 꿰메어 글을 씁니다. 삶의 조각들을 하나씩 꿰메어 언젠가는 나만의 ‘토지’를 완성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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