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화. 세상과 나 사이

"미숙아!" 그 한마디의 온기

41화. 세상과 나 사이

소제목: "미숙아!" 그 한마디의 온기
필명: 기억을 꿰매는 사람 황미순

그날은 시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도 몰랐다.
도서실에서 빌려온 책이 너무 재미있어서,
나는 방과 후 교실 구석에 앉아 조용히 페이지를 넘기고 또 넘겼다.
아이들은 하나둘 집으로 돌아갔고,
햇살은 어느새 교실 창문을 넘어 복도까지 길게 기울어졌다.

문득 고개를 들었을 땐,
학교 안은 너무 조용했고
창밖엔 어스름이 깔려 있었다.
나는 그제야 급하게 책을 가방에 넣고
현관문을 향해 달렸다.

운동장엔 아무도 없었다.
나는 혼자였다.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흘러 있었고,
마을길은 이미 반쯤 어둠에 잠겨 있었다.

사실 겁이 났다.
시골길은 가로등이 드물었고,
저녁 무렵의 적막은 나를 더 작아지게 만들었다.
집까지는 걸어서 40분쯤.
그 길을 나 혼자 걸어가야 한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조여들었다.

그때,
등 뒤에서 누군가가 나를 불렀다.

"미숙아!"

나는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낯익은 얼굴.
숨을 약간 헐떡이며 달려오던 그 아이.
현철이었다.

그 순간, 말로 다 할 수 없을 만큼 반가웠다.
얼마나 놀랐는지,
그리고 얼마나 안도했는지.
나는 입꼬리만 살짝 올린 채 고개를 끄덕였지만,
속으로는 이미 그의 존재에 기댈 준비가 되어 있었다.

현철이는 이유를 묻지 않았다.
왜 아직 학교에 있었는지도,
왜 나 혼자였는지도.

그저 옆에 서서,
같은 속도로 발을 맞춰 걷기 시작했다.

우리 집은 걸어서 40분,
현철이네는 그보다도 10분쯤 더 먼 곳이었다.
같은 방향이지만,
이렇게 함께 걷는 건 처음이었다.

말이 많았던 건 아니다.
나는 여전히 어색했고,
현철이도 조용한 편이었다.
하지만 그날만큼은, 그 침묵이 싫지 않았다.

어쩌면 그 애가 내 이름을 불러준 순간부터
나는 마음 한쪽을 내려놓았는지도 모른다.
무섭고 외로운 귀갓길에서
누군가 내 이름을 알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그 누군가가 나를 불러주었다는 기억.

그건, 어린 나에게 참 큰 위로였다.

그날 이후로, 나는
현철이를 다시 보는 눈이 달라졌다.
무섭기만 했던 아이가
‘따뜻한 사람’ 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나는 그날 이후로
그 아이가 또다시 내 이름을 불러주기를
조금은 기다리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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