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 세상과 나 사이

모른 척의 온도

39화. 세상과 나 사이

소제목: 모른 척의 온도
필명: 기억을 꿰매는 사람 황미순

그 시절, 학교엔 ‘불우이웃 돕기’라는 이름의 캠페인이 있었다.
누가 처음 만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정기적으로 각 반에서 쌀이나 라면, 학용품 같은 생필품을 걷어 모아
도움이 필요한 학생에게 전달하는 날이 있었다.

아이들은 알았다.
그 대상이 누구인지.
그리고 우리 반에서는 항상,
그 이름이 현철이네로 돌아오곤 했다는 걸.

공식적으로 발표되지 않았지만
몇 번만 지나면 누구나 짐작하게 된다.
매번 다른 집 아이가 될 수는 없는 일이니까.
어떤 때는 선생님이 조심스레 이야기했고,
어떤 날은 그냥 조용히 모은 물건이 어딘가로 옮겨졌고,
그러면 아이들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모른 척, 그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배려였다.

나는 그 풍경이 마음에 걸렸다.
부모님이 챙겨준 쌀 한 되, 마트에서 사 온 라면 한 봉지를
가방에 꼭꼭 눌러 담아 학교로 향하던 그 아침들.
누군가는 도움이 될 수 있다며 기뻐했지만,
나는 늘 그날만큼은 마음이 조용히 울렁거렸다.

현철이는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
아니, 정말로 아무렇지 않았던 걸까.
그 애는 평소처럼 교실을 정리했고,
선생님 말씀을 받아 적었고,
점심시간엔 축구공을 들고 운동장으로 나갔다.

하지만 나는 그날따라
현철이의 뒤통수만 오래도록 바라봤다.

가난을 숨기기엔 너무 뚜렷한 현실이 있었고,
그걸 모르는 척하기엔 너무 또렷한 감정이 있었다.

나는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현철이 어머니는 일찍 돌아가셨고,
아버지는 무언가 일을 하다 크게 실패한 뒤로
긴 시간 동안 침묵 속에 사셨다는 걸.
그래서 현철이는 남동생들을 챙겨야 했고,
교실에서는 어른처럼 굴어야 했고,
집에서는 어린 가장처럼 살아야 했다는 걸.

그 사실을 안다고 해서
그에게 더 다정하게 다가갈 수 있었던 건 아니다.
오히려 그 애가 보인 강한 태도와 고요한 표정은
우리의 미안함조차 비껴 나게 했다.

우리는 그저, 묵묵히 함께 있는 방식으로
그 아이의 삶을 존중했다.
혹은 그렇게 믿고 싶었다.

돌이켜보면,
그 시절 우리 반 아이들은
저마다의 결핍과 슬픔을 안고 있었던 것 같다.
누구는 가난했고, 누구는 외로웠고,
누구는 조용히 집안의 아픔을 숨기고 살아냈다.

그래서 우리는 ‘모른 척’할 수 있었다.
그건 외면이 아니라,
서툴지만 간절한 방식의 공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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