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시해,라는 말의 무게
58화. 시시해,라는 말의 무게
기억을 꿰매는 사람 황미순
중학교 1학년 여름방학을 앞두고
혜영이는 갑자기 수학문제집과 영어단어장을 내게 내밀었다.
“이거, 너 가져.
기초 문제집인데, 이거 먼저 풀어보고 모르면 물어봐.”
책상 위로 얹어진 두 권의 책은 낡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새것도 아니었다.
혜영이가 다 푼 문제집은 아니었고, 풀다가 중간에 멈춘 것 같았다.
책 귀퉁이에는 연필로 살짝 밑줄이 그어져 있었고, 영어단어장은 알파벳 순서로 접힌 자국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나는 그 순간 어쩐지 부끄러웠다.
“응… 고마워.”
대답은 했지만, 집에 와서는 책을 그냥 책장 한구석에 밀어 넣었다.
‘모르면 물어보라’는 말은
그 자체로 혜영이의 방식이었다.
누군가를 끌어당기지도 않고, 그렇다고 밀어내지도 않는 방식.
스스로 다가올 기회를 열어두면서도
자신은 언제든 혼자여도 괜찮다는 듯 선을 그어 놓는 말투.
나는 그게 조금 서운했다.
그래도 ‘나를 가르쳐 주겠다’는 혜영이의 말은 어쩐지 고맙고 또 특별하게 느껴졌다.
반장이자 1등이 나를 도와주겠다고 한 것이니까.
하지만 그 특별함은
집에 돌아와 저녁을 먹고 TV 앞에 앉으면서 잊혔고,
다음날 책가방을 챙기며 "아 맞다" 하고 떠올랐다가
이내 다시 바쁜 하루에 묻혀버렸다.
그 시절 나는 하루하루가 정신없었다.
아침엔 6시 반 버스를 타고 학교에 가고
점심시간엔 친구들과 도시락을 먹으며 웃었고
방과 후엔 서점 앞 문방구에 들러 자잘한 간식을 사 먹고 집으로 돌아왔다.
학교라는 작은 세상 안에서
나는 그럭저럭 잘 지내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성적표를 받는 날이면 다시 작은 세상 속에서도 ‘순위’가 매겨진다는 걸 절감했다.
그러다 어느 날,
복도에서 혜영이와 둘이 남게 된 적이 있었다.
그날따라 수업이 일찍 끝나고, 친구들은 체육관으로 가는 길이었는데
나는 체육복을 안 가져와 교실에 남아 있었고, 혜영이도 뭔가 챙길 게 있어 교실에 남았다.
우리는 같이 창가에 기대어 있었다.
복도 끝 창문 밖으로 여름 햇살이 쏟아졌고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멀리서 들려왔다.
나는 무심히 물었다.
“너는 왜 친구랑 깊이 안 사귀어?”
내가 진심으로 궁금했던 질문이었다.
혜영이는 그 질문에 조금 놀란 눈치였지만
곧 특유의 조용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응, 너 있잖아.”
그러곤 고개를 살짝 숙이며 웃었다.
순간 내 심장이 한 박자 빨라졌다.
‘내가 혜영이에겐 그런 존재구나.’ 하는 생각에 조금 기뻤다.
그 말이면 충분하다고 여길 찰나,
혜영이는 그다음 말을 덧붙였다.
“근데, 사실… 시시해.”
시시해.
나는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내가 시시하다는 건가?
아니면 친구라는 관계가 시시하다는 건가?
그런데 그 말투가 무심하고 단단해서
‘질문하지 마’라는 선을 내게 명확히 그어주는 것 같았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그 뒤로 나는 그 말이 자꾸 마음에 걸렸다.
'시시해'라는 말 하나에 여러 날을 머물렀다.
내가 시시한 사람일까?
우리 반 애들이?
아니면 세상이?
혜영이는 자신이 직접 정한 선 밖으로는 좀처럼 나가지 않는 아이였다.
누군가를 잘못되게 대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아무에게도 마음을 쉽게 내어주지 않았다.
친해지는 듯했지만,
늘 일정한 거리.
문득문득 다정하지만, 쉽게 깊어지지 않는 그 거리.
나는 그게 좀 서운했고,
어쩌면 그런 게 어른스러움이라고 생각했던 것도 같다.
사춘기 초입의 나는
아직 ‘거리를 두는 사람’을 이해하지 못했다.
혜영이는 반장이었고,
공부를 잘했고,
선생님께 칭찬받는 아이였고,
하이틴 소설 속 주인공처럼 조용하고 단정한 외모를 가진 아이였지만
마치 어디에도 마음을 깊이 담그지 않는 아이 같았다.
‘시시해’라는 그 한마디는
지금도 내 안에 묘하게 남아 있다.
그 시절, 내가 느꼈던 감정들이 다 모여 있는 말.
그 말은 어느 날엔 슬프고,
어느 날엔 무섭고,
어느 날엔 철학적이다.
나는 그 말을 이해하기 위해
어쩌면 지금도 마음속 하이틴 소설을 한 장씩 넘기고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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