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화. 세상과 나 사이

혜영이와 하이틴, 그리고 내 끝에서 10등

57화. 혜영이와 하이틴, 그리고 내 끝에서 10등

기억을 꿰매는 사람 황미순

처음으로 하이틴 소설을 알려준 건 혜영이였다.
어느 날 점심시간, 도시락을 먹고 책상서랍을 열던 혜영이가 조심스레 꺼내든 작은 책.
밝은 표지에 그림 같은 여학생이 그려진 그 책이 바로 내 첫 번째 하이틴이었다.

“이거 볼래?”
“뭔데?”
“재밌어. 사랑 이야기.”

사랑 이야기.
그 단어가 입에 맴도는 순간, 가슴이 간질간질해졌다.
그전까지 내가 읽은 책들은 동화책이나 학습만화, 전집류였다.
그런데 ‘사랑 이야기’라니.
그건 사춘기의 문을 똑 knock 하고 두드리는 말 같았다.

혜영이와 나는 그렇게 하이틴 소설에 빠져들었다.
처음엔 점심시간, 쉬는 시간, 자율학습 시간에 읽었고
나중엔 수업시간까지 몰래 읽었다.
국어책이나 사회책 사이에 쏙 끼워 넣으면 선생님도 잘 모르셨다.

혜영이는 책을 정말 빠르게 읽었다.
나는 나름 독서량이 많다고 생각했는데도 혜영이는 나보다 한 수 위였다.
하루면 한 권을 끝내고, 다음날 또 새로운 책을 들고 왔다.
그러면 우린 번갈아 가며 읽었다.

그 시절, 우리 반에는 하이틴 독서 네트워크가 조용히 작동하고 있었다.
한 친구가 빌려오면, 그 책은 두세 명 손을 거쳐 몇 날 며칠 안에 반 전체로 퍼졌다.
특히 여자아이들 사이에서.

혜영이는 그 독서 네트워크의 조용한 중심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친구가 많지는 않았다.
반장이었고, 공부도 잘하고, 선생님들의 신뢰도 두터웠지만
어느 누구와도 깊게 어울리지는 않았다.
그저 ‘모범생’이자 ‘반장’ 일뿐이었다.

나는 좀 달랐다.
모범생은 아니었지만, 이런저런 친구들과 두루두루 잘 지냈다.
등하교 길에도 동네 친구들과 깔깔 웃으며 간식을 나눠먹고, 학교에서도 수다 떠는 걸 좋아했다.
문희랑은 밥 먹다가 웃다가 물을 뿜고, 금은 이는 책상 밑에서 쪽지를 보내며 늘 웃음을 안겨줬다.

하지만 혜영이는 그런 일에 쉽게 휘말리지 않았다.
친구들 사이에 있을 때도 웃긴 이야기에는 조용히 웃을 뿐, 큰소리로 웃거나 감정적으로 반응하는 법이 없었다.
그 아이는 항상 중심을 잘 잡고 있었다.
그 점이 대단하다고 느껴지기도 했고, 또 한편으로는 조금 외로워 보이기도 했다.

그런 혜영이가 유일하게 나와 같이 빠져든 게 하이틴 소설이었다.
둘 다 새 책이 오면 책표지를 매만지며 탄성을 질렀고, 등장인물들의 이름을 외우고, 결말에 대해 수군대며 시간을 보냈다.
사랑이 뭔지도 몰랐지만, 소설 속 첫사랑과 이별 이야기에 괜히 마음이 아려오곤 했다.

그렇게 행복한 1학기가 지나고,
드디어 기말고사.
문제는 여기서 시작되었다.

기말고사 시험지가 배부되던 날, 내 손은 연필을 쥐고 있었지만 머릿속은 하이틴 소설의 주인공 ‘지수’가 남긴 마지막 편지로 가득했다.
‘지수는 민석이를 왜 그렇게 쉽게 보내버렸을까?’
현실 속 국어 시험지의 마지막 지문은 아무리 읽어도 글자가 머리에 박히질 않았다.

시험이 끝나고 성적표가 나왔다.
혜영이는 또 1등.
나는 끝에서 10등 안에 들었다.

눈앞이 어질어질했다.
같이 하이틴을 읽고, 같이 놀고, 같이 웃었던 혜영이가
어떻게 1등을 할 수 있는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같이 교과서 사이에 소설책을 끼워 읽었고, 같이 시험 전날에도 줄거리를 나눴는데.

내가 뭔가 크게 잘못 살고 있나 싶었다.
친구들과 수다를 떠는 시간, 간식을 사 먹으며 웃던 시간들이 전부 내 발목을 잡은 듯했다.
내가 어리석은 건가, 혜영이가 특별한 건가.
그때는 답을 알 수 없었다.
그저 씁쓸했고, 서러웠고, 자존심이 상했다.

수업 시간에 몰래 책을 읽는 짓은 그 후로도 계속됐지만
마음 한편엔 ‘어차피 나는 혜영이처럼 안 될 거야’라는 씁쓸한 체념이 자리 잡았다.
혜영이와 나 사이엔 어떤 간극이 있었던 것이다.
같은 시간을 살아도, 같은 책을 읽어도
누군가는 늘 앞서고, 누군가는 늘 뒤처지는.

나는 그 사실이 너무 괴로웠다.
하지만 그 괴로움도 시간이 지나자 익숙해졌다.
그리고 언젠가부터 깨달았다.
혜영이는 그 모든 순간에도 혼자였다는 걸.
그 아이의 1등은 그저 수치일 뿐, 누군가와 나눌 웃음이 없었다는 걸.

나는 10등 안에 있었지만,
문희와 금은이, 그리고 수많은 친구들과 우정을 나누고 있었다.
그때는 몰랐지만,
지금 생각하면 내가 얻은 건 생각보다 많았다.

성적표보다도 더 큰 무언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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