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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미정 Jul 11. 2020

시행착오와 실패의 경계선상에서

이민 1세대 간호사, 취업 첫 해 경험한 실패와 두려움

몬트리올에서 간호사로 일한 지 약 일 년이 넘었다. 첫 직장을 구하는 건 이 곳에서 태어난 사람들에게도 힘들다. ‘경험’과 ‘인맥’(레퍼런스)을 중시하는 문화 때문이다. 퀘벡 간호사 면허를 취득하기 위해 공부했던 과정은 지나 보니 아무것도 아니었다. 약 8개월 간 구직 활동을 하며 자존감이 참 많이도 떨어졌었다. 우여곡절 끝에 꽤나 이름 있는 한 종합 병원에 취직했다. 그 기쁨도 잠시 일한 지 약 일주일 만에 ‘이곳을 떠나야 하는 건가?’ 회의감이 들었다. 적당히, 대강 일 하는 것이 미덕으로 여겨지는 곳이었다. 스스로를 이렇게 다독였다. ‘얼마나 힘들게 구한 첫 직장인데 이만큼도 감지덕지한 상황이다. 하찮은 존재인 내가 잘하지도 못하는 영어나 프랑스어로 큰 실수 없이 어서 적응할 생각이나 해야지, 단점부터 찾아 내서야 되겠어...’


″밥은 꼭 먹고 일할 수 있는 곳에서 영어로 간호사를 하자″라는 모토로 이민을 선택했다. 미식가도 아니요, ‘밥’ 은 배고프지 않도록 뭐든 먹으면 된다고 여기는 내가 그 ‘밥’을 꼭 먹기 위해 여기까지 왔다. 하지만 간호사에게 버릇보다 무서운 것은 없었다. 간호사에게 무거운 ‘책임감’을 요구하는 한국 병원 문화가 내 몸에 고스란히 배어 있었다. 일을 최대한 깔끔히 하려고 했다. 언어적으로 상대적인 열등감을 느껴 더 그런 면도 있었다. 당연히 해야 하지만 남은 하지 않는 일을 나는 몸에 배어 그냥 했다. 사실 다른 동료 간호사들을 비판하려는 마음도 없었고, 그럴 시간도 없었다. 상대를 비판하지 않았지만 대강대강 일하는 방향으로 함께 가 주지는 못했다. 다른 방식으로 친구가 되어 보려고 맛있는 걸 만들어 가 보기도 했는데 효과는 그 날 뿐이었다. 나는 점점 말 수가 줄어갔다. 나도 물론 그들에게 불편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괜찮았다. 나를 지지해 주는 동료들도 몇몇은 있었고, 내가 그리도 원하던 ‘밥’은 무슨 일이 있어도 먹으며 일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나에게는 중환이거나 손이 많이 가는 환자들이 주로 배정되었다. 농담할 시간도 없이 나는 늘 바빴다. 나 스스로 일을 잘하는 걸로 나의 존재감을 찾으려 했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좋은 배움의 기회라 여기고 불평 없이 받아들였다. 근무한 지 일 년이 되어 갈 무렵 원내 공모를 통해 타 부서로 가기로 마음먹었다. 이십 여일 후면 이 곳을 아주 부드럽게 떠날 수 있었는데 갑자기 코로나로 인해 모든 부서 이동이 무기한 연기되었다. 그 후로 몇 달간 강도가 꽤나 강한 ‘따돌림’을 경험했다. 더불어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내 인생 처음 느껴보는 복잡한 감정 앞에 와르르 무너졌다. 


업무는 평소보다 체력적으로 훨씬 더 힘들었고, ‘따돌림’을 무시해 가며 일에 집중하는 것이 정신적으로 꽤나 소모적이었다. 개인보호장구의 부족으로 간호사로 일하며 처음으로 두려움도 느꼈다. 그 대단치 않은 ‘밥’을 먹고 일하려고 여기까지 왔는데 바이러스가 서슬 푸른 곳에서 간호사로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일하는 시간 외엔 타인을 위해 자가 격리를 해야 할 때가 많았다. 개념 없는 많은 시민들이 마스크도 끼지 않은 채 공원이며 거리에 한 가득인 걸 볼 때면 내가 일하는 의미가 무엇인가 허무했다. 한국의 위기 대처능력이 자랑스러웠지만 왠지 나에겐 그마저도 먼 나라 이야기 같았다. 동료들이 부모님을 안아 드리지 못한다고 한탄할 때면 내가 선택한 이민의 길이지만 ‘너희는 그래도 뵐 수나 있지’ 생각이 들어 속으로 쓴웃음이 지어졌다. 영상 통화를 자주 하니 평소와 별로 다를 것이 없었다. 하지만 한국에 있는 가족과 친구들이 애절하게 그리웠다. 양국의 자가 격리 기간을 감안하면 향후 일 년 정도 내 휴가를 다 몰아 써도 한국에 갈 수 없겠다 싶어 의욕이 저하되었다. 대학 졸업 후 쭉 혼자 산 나에게 ‘외로움’은 나름 좋은 친구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번에 느껴 본 가족과 친구들에 대한 그리움은 단순히 외로움이란 단어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복잡했다. ‘밥’은 여전히 먹으며 일하고 있었지만 왠지 괜찮다는 마음이 들지 않았다.


최전선에서 환자를 살리는 의미 있는 일을 하면서도 인생의 의미를 찾기 힘들었다. 이렇게 힘든 순간에 부서 사람들과의 연대를 통한 위안을 얻기 위해 내 소신 따윈 버려야 했던 것일까? 경제가 이렇게 나빠진 시기에 부서 이동을 기다리기도 전에 사직이라는 백기를 들어야 하나? 자책감은 미움보다 나를 더 힘들게 했다. 나에게 일은 가장 소중한 것 중에 하나이다. 어느 곳에서 어떤 일을 해도 어려움은 있었고 그 어려움을 거름 삼아 이제까지 잘해 왔다고 믿었다. 하지만 이번엔 그 어려움이 나를 돈독히 다지는 토양이 아니라 상처가 되어 피를 철철 흘리고 있는 것 같아 두려웠다. 그 상처가 정신적인 트라우마가 될까 두려웠다. 그래서 다른 곳에 가서도 이 트라우마의 기억 때문에 별 것 아닌 일에 엉엉 울고 있지 않을까 무서웠다. 평소의 나였다면 적응 과정의 시행착오라 여겼겠지만 이렇게까지 나를 다독여 주지 못한 이번은 실패다. 나 자신을 그만 다그치고 힘든 상황에서도 환자들 간호하는 일을 잘하고 있다고 스스로 격려해 주려고 한다. 잘했어, 잘하고 있어 그리고 그만하면 충분해 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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