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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미정 Nov 19. 2020

참을 인 셋이면 살인을 면한다

하지만 나를 죽일지 모른다

나는 내가 좋은 것보다 상대방이 좋은 것이 더 마음이 편하다. 그래서 참는 걸 참 잘한다. 어려서부터 도움을 받기보다는 책임감 있게 어떤 일이든 스스로 해 내야 하는 상황 속에서 성장해왔다. 이러한 이유로 타인에게 도움을 요청하기 힘들고 도움을 받는 것도 편치만은 않다. 왠지 타인에게 민폐를 끼치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도움을 주고받으려고 연습하고 있는 중이다. 




이러한 성격 때문에 20대에는 꾹꾹 눌러 참았다가 나도 모르게 '욱'하고 터지는 순간이 많았다. 그러한 순간마다 돌이켜보고 친한 지인들을 통해 나의 문제점을 찾으려고 노력했다. 그런 과정을 통해 내가 도덕적인 기준이 높은 사람임을 알게 되었다. 또한 나의 그 도덕적 잣대를 타인에게 적용하다 보니 남보다 참아야 하는 순간들이 많았다. 평소에는 나의 감정을 잘 표현하지 못하다가 상대방이 내뱉은 아주 사소한 말 한마디나 행동에 '욱'하고 화를 내고야 만다. '욱'하기 전까지는 상대방을 내가 도와주었다는 생각조차 안 했는데 그 사소한 말 한마디나 행동이 도화선이 되어 내 감정에 엄청난 불을 지피고야 만다. 이럴 때면 상대방은 아무렇지도 않던 내가 갑자기 화를 내니 어리둥절해했다. 


나는 처음부터 상대방을 잘 믿고 아낌없이 퍼주는 편이었다. 그런 나의 마음을 상대가 조금만 알아주면 나의 것을 다 내주어도 아깝지가 않다. 그리고 그 사람에게 나의 도덕적 잣대는 하염없이 내려간다. 하지만 새로운 인간관계를 맺을 때 '적당한 거리감'을 유지하지 못해 도와주고 욕먹는 상황이 많았다. 특히 이민을 와서 살다 보니 그러한 상황이 한국에서보다 훨씬 더 잦은 것 같다. 셀 수 없이 아픈 경험을 통해 인간관계에서 '적당한 거리 유지'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깨달았다. 특히 병원에서 일을 할 때는 무엇보다 '일'이 우선이고 그 거리를 유지하기 위해 힘쓴다. 그렇게 친한 사람도, 딱히 미워하는 사람도 없다. 그래서 출근할 때 오늘 어떤 간호사들과 함께 근무하는지 근무표를 세심히 뜯어볼 필요가 없다. 


하지만 최근에 미운 동료가 하나 생겼다. 그래서 출근 전에 그 동료와 함께 일해야 하는지 근무표를 자꾸 확인하게 된다. 아이러니한 것은 이 동료가 자신의 방식대로 나를 도우려고 하는 행동이 나의 인내심을 자극하고 있다. 이 동료는 일을 잘한다. 간호사가 된 지 2년 정도밖에 안 되었지만 손이 빠르고 상황 판단 능력이 뛰어나다. 하지만 나의 시선으로는 이 동료가 말이 너무 많고 오지랖이 참 넓은 단점이 있다. 나의 성격이 도움받는 것에 익숙지 않다 해도 중환자실에서 일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나는 도움을 요청할 상황이 많다. 이 친구는 내가 부탁하지도 않은 일을 마치 내가 못해서 쩔쩔매는 것처럼 말을 하며 미리 해 놓는다. 그리고 그 상황에서 자신이 나를 도운 것에 대해 모든 사람이 다 알 정도로 소위 떠벌린다. 내가 정말 바쁠 때는 '내가 곧 도와줄게'라고 소리쳤지만 정작 도와주지는 않았다. 또한 서로 간의 의견 차이가 있을 수 있는 부분에서는 항상 가르치듯 혹은 지적하듯 나에게 말한다. 


나에게 인수인계를 줄 때와 다른 senior 간호사에게 인수인계를 줄 때 일을 다르게 하는 간호사들이 간혹 있다. 즉 일을 덜 하고 넘겨주는 경우가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이런 사람에게는 그냥 웃고 넘길 수가 있는데 오히려 나를 도와주려고 했던 그 사람에게 미움을 쌓아서 출근하기 싫을 정도였다. 아무리 그 동료의 과시욕구가 크다 하더라도 인간의 본성이 싫은 사람을 나서서 도와주거나 끊임없이 관심을 보일 리가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이번에도 절친에게 내 감정을 털어놓고 이 상황을 돌이켜 보았다. 




물론 그 동료는 나랑 스타일이 맞지 않는 사람이다. 피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그럴 수는 없으니 문제의 원인을 찾아야 한다. 상대를 바꾸기는 어려우니 내가 바뀔 수 있는 것을 찾으려고 한다. 역치가 많이 낮아졌다고 믿었던 나의 도덕적 기준은 아직도 굉장히 높은 곳에 있었다. 나는 우선 상대방이 필요하다고 할 때 원하는 것을 아낌없이 내어주는 것이 도움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도와주고 생색내지 않는 편이다. 그렇게 하지 않아도 상대방이 알기 때문이다. 대부분 다음날 다시 만나는 경우가 많고 인수인계 시에 '어제 그걸 해 놨더라. 고마워'라고 인사를 건네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런 소소한 인사를 통해 같은 환자를 간호하는 둘 사이의 연대감이 느껴져서 만족스럽다. 그 동료는 겉으로 드러내야 만족스러운 사람일 수도 있고, 상대방이 말하지 않아도 자신이 알아서 도와주는 것이 진정한 도움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나의 방식대로만 도움을 규정하고 색안경을 끼고 바라본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병원 가기 싫을 정도로 그렇게 미워하며 참을 것이 아니라 내 감정을 표현했었어야 했다. 나는 나의 감정을 표현하는 것에 취약하다. 알고는 있는데 말이 정말 잘 안 나온다. 하지만 참을 인 셋이면 살인은 면할지 모르나 참기만 하면 우선 나를 먼저 죽일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다 보면 또 상대에게 화를 폭발시켜 그 동료와의 관계까지 나쁘게 할 것이다. 잘 참아내는 에너지를 정말 힘들지만 표현하는 에너지로 바꾸어 보려고 한다. 오랜 성장과정을 통해 형성된 성격이니 최소 10년은 걸려야 부드러워지겠지 생각이 든다. 


삶은 이렇듯 언제나 쉽지가 않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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