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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미정 Oct 22. 2020

갑자기 꼴찌가 되었다고 느껴질 때

"그 친구가 어제 오리엔테이션을 그만두었다고요?" 내가 되물었다.

"응, 본인은 중환자실이 너무 어렵다고 원래 일하던 곳으로 가겠다고 했어"


중환자실에서 함께 OT를 받던 동료 중 한 명이 원래 일하던 곳으로 복귀했다는 소식이었다. 5명의 새로 발령받아 온 직원 중 벌써 3명이 OT 중 그만두거나 이전 근무지로 돌아갔다. 이전에 그만둔 2명은 경력이 거의 없는 신규 간호사였기 때문에 그다지 큰 감정적 동요가 없었다. 하지만 나는 어제 그만둔 그 동료가 내심 계속 버텨주기를 바랐었다. 그 이유는 불손하기 짝이 없었다. 그 동료는 나보다 경력이 많았지만 일을 배우는 속도가 더 느렸기 때문이다. 어느 집단이든 '꼴찌'에게 쏠리는 관심은 있기 마련이다. 솔직히 나는 그 관심의 대상이 내가 아니라 그 동료인 것에 안도했다.




대학교 때까지 공부라면 나름 자신이 있었고 공부로 1등을 하는 것은 나에게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물론 머리가 좋은 천재형은 아니고 부단한 노력형이었지만 말이다. 이런 내가 외국에 살면서 '1등'을 하고자 하는 욕구는 가슴은 아팠으나 그래도 빨리 포기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나의 마지막 보루는 어느 곳에 있든지 '꼴찌'가 되지 않는 것이었다. 갑자기 내가 꼴찌가 되었다고 느끼는 순간 마음속에 켜켜이 숨어있던 불안감과 오롯이 마주하는 것이 싫었기 때문이다.



나의 이 '꼴찌'에 대한 불안감의 시작은 중학교 시절 오래 달리기 사건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는 '체력장'이 점수가 되던 시대였고, 나는 1500m 오래 달리기에서 우리 반 1등을 했었다. 그로 인해 교내 체육대회 날 반 대표로 4000m 오래 달리기에 출전해야 했다. 당시 내가 다니던 중학교는 육상부가 유명한 학교였다. 그 4000m 오래 달리기는 육상부들 시합 전 기록 체크를 위한 것이었다. 우리 반에 '재수 없게(?)' 육상부가 한 명도 없었던 탓에 내가 차출이 되었다. 하지만 출발 선상에서 뛰기 전까지는 그 사실을 몰랐다.


그 날 그 출발선에 나와 같은 불쌍한(?) 처에 놓인 또 한 명의 일반 학생이 있었다. 나는 뛰기도 전에 못한다는 말을 할 수는 없어서 목표를 '꼴찌'를 하지 않는 것으로 잡았다. 나는 키가 152cm이다. 그 다른 한 명은 키로서는 육상부와 비등했으니 내가 지지 않을 목표로 삼을만했다. 출발과 동시에 육상부들은 치고 나갔다. 당연히 나와 그 학생은 육상부들에 비해 족히 운동장 반 바퀴 정도가 뒤쳐졌다. 하지만 그 학생이 나보다도 50미터는 뒤쳐져 따라오고 있었다. 목표를 달성하고 있었으니 힘들었지만 그래도 뛸 만하다고 생각했었다.



바퀴쯤 뛰었을 때 장내 방송으로 그 친구가 기권을 했다는 소리가 들렸다. 그 순간 나의 마음은 '내가 왜 기권이란 것을 고려해보지 않았을까?' 엄청난 후회가 밀려왔다. 또한 나도 이제 쓰러지는 척이라도 해야 하는 건지, 다음 목표를 무엇으로 삼고 남은 25바퀴를 뛰어야 하는 건지 정말이지 미칠 것만 같았다. 예민한 중학교 1학년, 게다가 남녀 공학인 학교라 전교생이 보고 있었다. 말이 남녀 공학이지 남, 녀 각각 반이 달랐기 때문에 소풍, 체육대회와 같은 특별 행사 때만 남학생들과 함께할 수 았었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남학생들에게 받는 시선이 더 부끄러웠던 것 같다. 모든 시선은 아마도 일등이 아니라 나에게 쏠린 것만 같았다. 나는 그 날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지금도 정확히는 모르겠다. 당시는 '포기'가 '꼴찌'보다 더 부끄럽게 느껴졌던 것 같다.



그래서 그 순간 다음 목표를 '육상부에게 한 바퀴 이상 뒤쳐지지 않기'로 정했다. 꼴에 자존심은 있어서 한 바퀴 이상 뒤쳐져서 나를 치고 나가는 '치욕'은 겪고 싶지 않았다. 입에서 단내가 나도록 뛰던 그 순간에 없던 힘이 생긴 듯 스피드를 더 높였다. 물론 보고 있던 사람들은 그 차이를 느끼지 못할 수준이었을 테다. 육상부가 골인을 하고 혼자 뛴 운동장 한 바퀴는 나에게 억만 겁의 시간보다 길었다. 거의 걸었을테니 뛰었다는 표현이 무색하지 싶다. 안내 방송을 하던 체육 선생님께서 '꼴찌'에게도 박수를 보내야 한다며 장내 방송을 했었다. 남녀 공학의 특성상 남학생들의 우뢰(?)와 같은 박수를 받으며 나는 장장 서른다섯 바퀴의 대장정을 마쳤다. 그 후 한 동안 학교에서 내가 지나칠 때 남학생들은 "야! 그 체육대회 악바리 맞지?"라고 수군댔다. 참 아이러니하게도 열 바퀴를 뛰다만 그 다른 일반 학생은 후에 공군사관학교를 수석으로 입학했다.



지금도 나는 인생에서 가장 후회가 되는 선택을 고르라면 그 날 그 선택을 택할 것이다. 물론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뛴 나에게 진심 어린 박수를 보낸 사람이 더 많았을 것이다. 하지만 감수성이 풍부한 여중생이 당시에 느꼈던 신체적, 정신적 고뇌는 상상 이상이었다. 그야말로 끝까지 뛰었기 때문에 '트라우마'가 되어버린 격이었다. '꼴찌'는 어떻게든 피해야 한다는 트라우마 말이다. 아마도 '포기'하기도 싫고, '꼴찌'하기도 싫은 욕심만 가지고 뛰었기 때문에 완주 후에 당연히 느꼈어야 할 성취감 대신 아픈 기억을 얻었을 테다.




이민을 오고 나서 학교 또는 직장에서 그런 상황에 놓일 때마다 나의 마음을 들여다보곤 한다. '꼴찌'가 되어 느낄 불안함을 여전히 피하고 싶다. 그러나 불안함의 이유는 준비가 되지 않았거나 포기하기 싫은 자존심 때문일 것이다. 불안하지 않도록 부족한 점은 조금씩 채워가면 되고 열심히 했는데도 안되면 포기하면 되는 것이다. 그런 연습을 또 해 나가야지 마음먹는다. 그러다 보면 아무리 생각해도 긍정적으로 승화가 되지 않는 그 날 그 사건을 낄낄거리며 "나 육상부랑 4000m 뛰어본 사람이야" 라고 너스레를 떨 날도 오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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