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야 알다니
남편이 커피 뽑으러 내려온 거 같은데 도통 계단 오르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십중팔구 벽난로 앞에서 불멍을 하고 있을 거 같은데... 역시나 그러고 계신다. 어쩐지 조용하다 싶던 어린이도 벽난로 앞에 배를 깔고 누워 책을 보고 있다. 이쯤 되면 얼죽아인 나도 따뜻한 차를 한 잔 들고 그들 옆에 앉아 도서관에서 빌려온 책을 편다. 크~ 감탄사를 꺼내야만 할 것 같은 그림이다.
내가 경험한 벽난로는 이런 느낌은 아니었다. 한국에 살 때 벽난로가 있는 펜션에 갔었는데 매립형은 아니었고 거실 한 편에 인테리어 소품처럼 예쁘게 자리 잡은 이동형 난로였다. 따뜻하려나 싶었는데 나무를 넣고 불을 붙이자 맹렬하게 그 위세를 과시하기 시작했고 곧 얼굴이 따끔거릴 정도로 뜨겁고 건조해졌다. 거실에 생뚱맞게 편백욕조가 있었는데 거기 물을 받아놓고 나서야 잠이 들 수 있었다. 한 번 경험해 봤으면 됐다 하고 그 뒤론 벽난로 있는 숙소를 찾지 않았다.
미국에 와서 집을 보러 다니며 보니 집집마다 벽난로가 있었다. 30~50년 된 집들은 나무를 때는 벽난로인데 거실 개수에 따라 벽난로도 여러 개가 있었다. 당시 살던 아파트는 히터를 많이 안 틀어도 별로 춥지 않았기 때문에 위험해 보이는 벽난로가 왜 그리 집집마다 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우리 집 벽난로는 그나마 나무를 때는 게 아니라 가스로 켜는 거긴 한데 집에 아이가 있다 보니 가스 누출이나 화상이 걱정되어 사용하지 않았다. 혹시라도 아이가 스위치를 켤까 봐 가스도 아예 잠가버리고, 벽난로를 통해 찬 공기가 들어오길래 겨울이면 뽁뽁이를 붙이고 책장으로 막아버리곤 했다. 몇 번의 겨울을 지내고 나서야 이곳의 주택은 바깥 날씨보다 춥게 느껴져서 다들 그렇게 벽난로가 필요했나 보다 이해하게 됐다.
그러다 얼마 전 아이 친구네 집에 플레이데이트가 있어서 잠깐 가게 됐는데 집이 참 훈훈하고 느낌도 따뜻했다. 같은 동네에 마감도 비슷한 집인데 뭐가 다른가 했더니 집에 벽난로가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그동안 방문한 집들 중에서 벽난로를 사용하는 집을 한 번도 못 봤는데 드디어 만나게 된 거다. 우린 아직 벽난로를 사용한 적이 없는데 안전하냐 물으니 겨울이면 늘 사용하고 안전하다고 했다. 그래 그렇단 말이지. 미국인들이 그렇다고 하니 갑자기 믿음이 생긴 건지 너무 추워서 믿고 싶었는지 그건 모르겠다. 다만 그렇다면 우리도 켜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며칠 뒤 해체해 둔 선들을 다 연결하고 벽난로 스위치를 켰더니 금세 거실에 훈기가 돌기 시작했다. 웅장하게 돌아가던 히터도 멈추고 집은 조용하고 따뜻해졌다. 건조해지지도 않고 벽난로의 쇠 부분도 데일 정도로 뜨거워지진 않아 나름 안전했다. 따뜻함도 따뜻함이지만 히터 소리가 나지 않는 게 너무 좋았다. 마음의 평화가 이렇게 가까이 있었다니. 아, 이래서 벽난로를 쓰는구나.
난방을 20도에 맞춰도 쉴 새 없이 돌아가는 아주 시끄러운 히터 소리를 들으며 춥다는 말을 입에 단 채로 여섯 번의 겨울을 났다. 궁여지책으로 라디에이터와 다이슨 온풍기를 썼다가 전기세가 더 많이 나와서 시끄러움을 참고 히터로만 살았는데 좀 억울해지려고 한다. 이 집에서 겨울을 날 일이 앞으로 몇 번이나 있을까. 가스비가 좀 나오더라도 부지런히 사용해 주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