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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ka Apr 03. 2022

미국에 살지만 운전은 안 합니다

완전 자율주행차 언제 나오니

어-어- 옆 차랑 부딪칠 것 같아!


2018년 여름 어느 토요일 아침. 처음으로 집 주변을 벗어나 큰 도로로 차를 끌고 나가서 목적지에 도착하기 직전, 기어이/기어코/끝내/결국 교통사고가 났다. 아니, 내가 교통사고를 냈다.

죄송합니다 빨간 자동차님



운전을 꼭 해야 해


미국에 간다고 했을 때 지인들이 다들 한 마디씩 했다. 운전을 꼭 해야 해! 정말 하기 싫지만 아마 그래야겠지 싶었고 (장롱)운전면허도 있으니 닥치면 하게 되지 않을까 막연히 생각했다. 워싱턴주는 한국 운전면허가 있으면 시험 없이 워싱턴주 운전면허로 교환해주기 때문에 DOL(Department of Licensing)에 가서 간단하게 면허증도 발급받았다. 운전하려고 발급받은 건 아니었지만.


출산 후 2주 정도 지나서 산후도우미가 있을 때 운전연습을 해보자 싶어 남편과 함께 차로 5분 거리의 마트를 다녀왔다. 다운타운의 잦은 교차로 멈춤과 차선 변경을 별 탈 없이 마치고 주차까지, 마음은 너무 불안했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두 번 연습 운전을 하고 산후도우미가 그만두면서 그것도 끝이 났다. 살고 있는 아파트 지하에 큰 마트도 있고 바로 앞에 쇼핑몰도 있고, 아는 사람이 없으니 외부 약속도 없어서 운전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해 잊고 살았다.


주택단지로 이사를 와서도 운전을 안 할 수만 있다면 정말 안 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조수석에 앉아서도 다가오는 차가 있거나 경적이 울리거나 옆 차선에서 너무 빨리 지나갈 때도 깜짝깜짝 놀라는 인간이 난데. 집에서 걸어서 15분 거리 카페도, 40분 거리 마트도 산책하는 기분으로 가끔 다녀와서 불편하지도 않았다. 그러다 동네에서 아이들 나이가 비슷한 한국 엄마 A를 만나게 됐다. A는 야외활동형이라 그런지 아이들을 데리고 자꾸 어딜 가자고 했는데, 내가 운전을 못한다고 하니 빨리 연습해서 놀러 다니자고 채근하기 시작했다. 애들 구경하고 체험할 게 얼마나 많은데 집에만 있냐고. 그러던 차에 유럽에서 이민 생활하고 있는 지인에게 "이제 운전을 해야 하나 봐"라고 말했다가 "아직도 운전 안 하니? 애가 불쌍하다"라는 핀잔을 듣고 좀 심각해졌다. 내가 아이에게 돌아갈 기회를 박탈하는 그런 엄마인가 하는 생각 때문에 괴롭고, 그럼에도 선뜻 운전대를 잡지 못하는 나 자신에게 계속 화가 났다.


없는 용기를 짜내어 남편과 아이를 태우고  주변에서 연습을 시작했다. 아이가 타고 있으니  두근거리고 손에 땀이 났다. 그래도 차가 별로  다니는 주택가라 위험한 상황은 없어서 500미터 정도 떨어진 놀이터까지 운전해서 주차하는 연습을 반복했다. A 운전 언제  거냐고 자꾸 물어서 요즘 연습해서 놀이터까지는 간다고 했더니 그녀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아이고 거기는 우리 애가 운전해도 가겠네요. 안타까운 마음에 하는 말이겠거니 하고 어색하게 웃고 말았는데 마음속엔 뭔가 이런 상황을 부수고 싶은 마음이 생겼던  같다.   토요일 아침에 연습을 하는데 남편이 언덕 너머까지 가보자고 하여 일단 가다가 에잇, 마트까지 가볼까? 내가 이런 말을 내뱉고  것이다. 남편도  상태면   있을  같다며 가자고 했다.


마트까지 거리는 3.5km 정도고, 가파른 언덕을 올랐다가 평지를 달리다가 다시 비탈길을 내려가서 교차로 여섯 개를 지나 좁은 좌회전을 두 번 해야 하는 경로였다. 비탈길을 내려가며 차선이 줄어드는데 급하게 변경하다 신호에 겨우 멈췄다. 우어어 덜덜덜, 그때 갓길에 차를 세우고 멈췄어야 했다. 진정하지 못한 상태로 신호가 바뀌어 그대로 가다가 어찌어찌 삼거리에서 좌회전 신호를 받으려고 기다리는데 옆이고 뒤고 차가 딱 붙어 있으니 너무 긴장됐다. 신호가 바뀌고 핸들을 깊게 돌렸는데 옆에서 남편이 "어어 옆 차랑 부딪칠 거 같아!" 라며 소리를 질렀다. 핸들을 잡은 채로 급하게 브레이크를 밟았는데 곧이어 쾅 소리가 나며 차가 멈췄다. 맙소사, 갓길에 주차되어 있던 차가 보도에 올라가 있었다.


사고의 순간이 아직도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내가 그때 어떻게 했어야 사고가 안 났을까 생각해봐도 잘 모르겠다. 다만 내 미숙한 운전의 결과가 인명사고가 아니라서, 옆 차선 차랑 부딪치고 뒤차와도 부딪치는 연쇄 추돌사고가 났을 수도 있는데 이 정도로 끝나서 천만다행이다.


차만 다쳐서 다행이죠


너무 놀라서 눈물도 나오지 않고, 일단 내려서 애가 괜찮은지 보고 바닥에 쭈그려 앉아서 큰 숨을 쉬었다. 동네 언니에게 카페 앞에서 사고가 났는데 어떻게 해야 하냐고 물으니, 너도 거기서 사고 났냐(알고 보니 사고 명당)며 일단 911을 부르라 하셨다. 전화를 했는데 관할 경찰서로 연결을 해줘서 바로 경찰차가 왔다. 소방차도 왔다가 다친 사람 없는 거 보고 돌아갔다. 경찰관이 남편에게 사고 경위를 듣고 내 운전면허증과 자동차등록증 및 보험을 확인하고 상대편 차를 조회해서 연락을 했는데 차주가 바로 앞 카페 직원(!)이었다. 그 와중에 아이가 배고파해서 그 카페에 앉아 밥을 먹이고 있었는데, 일하던 직원이 차주라 하여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경찰관이 상황을 설명하고, 우리는 거듭 사과를 하고, 그 차는 견인되었다. 혼이 나간 내 눈동자를 본 건지 경찰관이 와서 계속 괜찮냐고 묻고, 카페에 앉아있던 사람들이 차는 수리하면 되고 아무도 안 다쳤으니 괜찮다며 위로의 말을 건넸다. 그제야 눈물이 났다.


경찰이 발행해 준 사건번호를 보험사에 알리고 나서야 토요일 아침의 소동이 대충 마무리됐다.



난 운전 안 해


운전을 한다고 생각하면 '사고 나면 어쩌지? 나 때문에 누가 다치면 어쩌지?'라는 생각이 바로 뒤따른다. 그리고 그 생각이 계속 머리를 떠나지 않는 거다. 사고 나고 다치고 그 이후에 벌어질 일들을 상상하면서. 그만 생각해야지 해도 계속 생각이 나서 불안함이 사라지지 않았다. 왜 이렇게 불안할까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한국에서 운전면허는 어떻게 땄지? 생각해 보니 그것마저 불안한 것이다. 어떻게 이런 나에게 운전면허를 줬지, 운전면허를 이렇게 쉽게 주면 세상이 너무 위험해지잖아! 5학년 때 오토바이에 치여서 몇 미터 날아가 잠깐 기절하고 다쳤던 게 내 무의식에 공포로 남아 있나? 그래서 속도가 빠른 것과 사고 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나?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유를 달고 나왔다.


사고 후 일주일 정도는 계속 사고 순간이 떠오르고 소름 끼치는 일이 반복됐다. 조수석에 앉아 있어도 속이 울렁울렁거리고 위가 조이듯이 아팠다. 특히 사고지점 지날 때는 증상이 심해졌는데 고속도로로 나가려면 반드시 지나가는 길목이라 피해 갈 수도 없었다. 그저 남편에게 이제 운전 못 할 것 같다고 불안한 마음을 내비칠 뿐이었다. 남편은 시간 지나면 괜찮아지고 연습하면 할 수 있다고, 못 한다고 하지 말라며 그이 나름의 응원(이었을 거라 믿고 있음)을 보냈다. 하지만 나에겐 그 말이 다시 운전대를 잡으란 압박으로 느껴졌고, 내 상태를 남편에게도 이해받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더 괴로워졌다.


며칠을 잠을 설치다 새벽녘에 한국에 있는 친구 J에게 내 상태를 드문드문 전했다. 그녀는 일종의 PTSD로 볼 수도 있으니 운전에 대한 생각을 하지 말라고 했다. 운전 안 해도 된다고. J의 말을 듣자 마음이 좀 편안해졌다. 내가 듣고 싶은 말이 이거였구나. 누구의 이해도 바라지 말고 스스로에게 원하는 말을 해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고가 났지만 아무도 다치지 않았으니 괜찮아. 이제 내가 운전 안 하면 타인의 재산과 생명을 지킬 수 있어. 운전하지 않으면 내가 불편한 거지 누군가에게 피해 주는 게 아니니까 괜찮아. 아, 남편이 좀 힘들 수 있는데 당신 디스크 왔을 때 내가 돌보던 날들로 퉁쳐요. 그래도 미리 미안합니다. 나 이제 운전 안 해!"



완전 자율주행차 언제 나오니


운전을 하지 않겠다고 했더니 남편은 정말로 운전하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는 한다고 포기하는 걸 싫어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는 나를 이해할 수 없던 거였다. 하지만  한다는 내 선택은 존중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남편만 운전하는 생활을 받아들였다.


나는 일주일에 두세 번씩 아이 친구들을 집으로 불러서 놀게 했다. A의 주선으로 아이 또래 모임이 생긴 덕분이었다. 집을 치우고 음식을 차리는 일은 고됐지만 기꺼운 마음으로 했다. 동네 밖으로 나가게 되면 엄마들이 와서 우리 모녀를 태워 갔다. 그래서 우리 집엔 차는 한 대지만 카시트는 두 개다. 그렇게 일 년 반을 보내고 코로나가 터졌다.


전염병이 무서워 플레이데이트가 중단된 사이 몇몇은 한국으로 돌아가고, 아이들은 저마다 프리스쿨로 킨더로 각자의 일상을 시작하게 됐다. 남편은 재택근무를 여전히 하고 있고, 앞으로도 그럴 것 같다. 사무실로 출근하라고 하면 이직도 강행할 기세다. 그래서 평일에 병원 갈 일 있으면 남편이 시간을 뺄 수 있다. 아이의 킨더도 지난해부터 동네 초등학교에 개관해서 걸어갈 수 있게 됐다. 이런 세상이 올 줄 알았다면 그때 운전연습 시작도 하지 말 것을. 괜한 생각을 한번 해 본다.


뻔한 상상도 해본다. 10년 후쯤엔 완전 자율주행차 탈 수 있을까? 기술이 거기까지 되더라도 제도나 사회적 합의가 뒷받침되긴 어렵겠지? 뭐 괜찮아, 그때쯤이면 난 한국에서 버스 타고 지하철 타고 다닐 거거든!





미국에서 교통사고가 났을 때 인명사고가 아닌 경우는 관할 경찰서에 바로 신고하면 됩니다. 사건번호를 받아서 보험사에 접수하는 것이 혹시 모를 불편할 일들을 막아준다고 하네요. 우리 차는 월요일에 보험사에서 지정한 정비소에 맡기고 렌트를 했습니다. 차 수리는 10일 정도 걸렸고, 수리비는 디덕터블 $500만 냈습니다. 렌트비가 보험 규정으로는 하루 $35까지만 지원돼서 80달러 정도 추가로 냈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교통사고 벌금이 $187(온라인 결제하니 $201) 나왔고, 차 보험료는 40% 정도 인상됐습니다. 보험료가 원래 가격으로 돌아오는 데는 2년이 걸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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