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서민경 Apr 11. 2023

친환경이라는 눈속임

올버즈 운동화를 통해서 본 욕망 

‘가치 소비’라는 표현이 유행하고 있다. 이는 물건을 사는 데 있어 가성비나 브랜드 네임 벨류를 따지기 보다 자신이 공감하는 가치가 내포된 물건을 구매하기 위해 기꺼이 지갑을 여는 소비 방식을 말한다. 팬데믹을 계기로 요즘 소비자들은 환경에 대한 관심이 부쩍 높아졌다. 업사이클링을 넘어서서 제로 웨이스트, 생분해(biodegradable) 소재, 탄소 중립, ESG 경영과 같은 용어가 친환경을 표방하는 제품에 등장하기 시작한 것도 이러한 현상과 무관하지 않다. 


최근 친환경 제품에 자연스럽게 관심을 가지게 되면서 올버즈라는 브랜드를 알게 됐다. 올버즈라는 동명의 미국 스타트업에서 2016년 론칭한 운동화 브랜드로 인증 받은 친환경 소재를 제품에 활용하며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투자해 화제가 되었다.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 배우 엠마 왓슨, 구글 창업자 래리 페이지가 신은 운동화로도 유명하다. 지난 여름 무렵, 가로수길 근처를 지나가던 길에 매장에 들러 8만 원 상당의 운동화를 구매했다. 해외 브랜드이지만 가격도 합리적이고 심플한 디자인이 마음에 들었다. 착화감도 훌륭했지만 의외로 내구성이 약한 것이 흠이었다. 여름 내내 신고 다녔더니 운동화 앞 코가 찢어졌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올버즈 운동화를 신고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환경을 위해 뭔가를 하고 있다는 묘한 만족감이 있었다. 


이러한 기분은 배민에서 음식을 주문할 때도 이어졌다. 배민 어플에서 원하는 메뉴를 고르고 결제 버튼을 누를 때면 일회용 수저를 함께 받을 것인지를 선택하는 란이 있다. 그 전까지 없었던 이 버튼이 생기면서부터 집으로 배달을 받을 때면 잠시 망설이게 되었다. 직장에서도 플라스틱 수저 세트를 한 벌 비치해두고 배달 음식이 도착하면 되도록 그것을 사용하려고 했다. 식사를 마치면 바로 싱크대로 가서 설거지를 하는데 그런 노동은 환경을 위해 기꺼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귀찮은 마음을 달랬다. 스타벅스에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일회용 잔에 주문할 때 종이 빨대를 낭비하는 대신 컵 입구에 입을 대고 마시거나 생수통에서 라벨을 벗겨낼 때도 나는 환경주의자가 된 기분이었다. 


생각해보면 나는 친환경 소재로 만든 운동화 그 자체보다 올버즈라는 신생 미국 브랜드에 먼저 이끌렸을지도 모른다. 로고명이 박힌 제품 위에 ‘친환경’이라는 포장지가 한 겹 덧씌워진 것을 구입하며 개념 있는 가치 소비를 했다고 느꼈던 것이다. 소비함으로써 발생하는 포장 박스 쓰레기는 또다시 분리수거장에 버려지고, 해외 어딘가에서 집으로 제품이 배달하는 과정에서 배출되는 탄소는 생각하지 않은 채 말이다. OEM 방식으로 생산되는 이런 소비재 특성 상 동남아 어느 지역에서 값싼 노동력을 투입한 덕분에 가격이 낮았을 지도 모를 일이다. 배민 배달을 통해 발생하는 플라스틱 용기 쓰레기와 탄소 배출량, 텀블러 대신 사용한 스타벅스 일회용 컵 또한 환경 파괴에 일조한다. 매일 만들어내는 생활 쓰레기는 외면한 채 그럴듯한 소비 행위로 죄책감을 상쇄하고 싶었던 이런 심리를 김홍중의 <마음의 사회학>은 정확하게 꼬집어내고 있다.


김홍중은 르네 지라르의 <낭만적 거짓과 소설적 진실>의 ‘욕망의 삼각형’을 인용해 ‘욕망’은 ‘욕구’와 달리 주체와 대상 사이에 ‘매개자’가 끼어든다고 설명한다. 그러니까 주체가 욕망하는 것은 그 스스로가 아닌 엄밀히 말해 ‘매개자’의 욕망인 셈이다. 돈키호테의 공명심에는 기사도 정신이 끼어들었고, 보바리의 사교 활동은 3류 소설 주인공이 매개가 되었다. 마찬가지로 나 또한 오바마가 신은 미국 브랜드이자 ‘친환경’이라는 가치로 포장한 제품이라는 사회적 시선으로 올버즈 운동화를 욕망했던 것이다. 


‘가치 소비’라는 용어는 소비자를 현혹시키는 자본주의의 교묘한 그물망에 포섭됐고 친환경 제품 또한 여기서 벗어나기 힘들다. 환경에 대한 일말의 죄책감, 또 자본주의의 수사학으로 사람들을 기만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찜찜한 기분에서 벗어나고자 나는 잠깐이라도 환경주의자가 된 것 같은 착각에 빠지게 하는 소비를 추구하지 않았을까? 즉 주체의 자발적 의지라기 보다 사회적 시선에서 친환경이라는 가치를 높이 평가하는 프레임을 내제화함으로써, 또 특정 브랜드의 특정 제품을 선택하는 ‘나’라는 개인의 취향을 과시하기 위한 행동으로서 제품을 구입했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데카르트의 유명한 명제를 현대 소비사회에 맞게 비튼 바바라 크루거의 1987년 작품 ‘I shop, Therefore I am(나는 소비한다, 고로 존재한다)’의 2020년대 버전은 ’I shop the value, Therefore I am(나는 가치를 소비한다, 고로 존재한다)’로 수정되어야 하지 않을까? 


김홍중이 언급한 바와 같이 스노보크라시의 시대는 ‘모럴 부재의 시대‘가 아닌 ‘과잉의 시대’다. 친환경, 동물 복지, 공정성, 디콜로나이제이션, 탈중심주의, 지역 격차 해소, 젠더 이슈 등 이 시대에 교양 있는 현대인이라면 지켜야 할 가치가 도처에 깔려 있다. 그리고 이 가치는 일정 부분 소비 행위를 중심으로 이뤄진다. 친환경 제품은 물론, 동물 실험을 하지 않는다고 명시한 바디숍 등 화장품을 사거나 텀블벅 같은 플랫폼에서 비거니즘이나 페미니즘을 다룬 책을 후원하는 행위, 그리고 영화 <82년생 김지영>처럼 자신이 공감하는 콘텐츠라면 티켓을 구매하는  ‘영혼 보내기‘ 응원 등이 그것이다. 


한편, 뭔가를 사지 않음으로써 자신이 옹호하는 가치를 드러내는 경우도 있다. 이를테면 건강상의 이유가 아닌 자발적으로 비건을 택한 이들은 육류를 소비하지 않음으로써 동물 복지를 실천하고 있다고 믿는다. 안전 수칙을 지키지 않고 20대 근무자를 죽음으로 몰아넣고 안일하게 대처한 파리바게트의 불매 운동도 마찬가지다. 모럴 과잉의 시대임에도 윤리가 부재한 오늘날, 우리는 소비하지 ‘않는’ 행위를 통해 자본주의, 나아가 스노비즘의 내부에 균열을 낼 수 있을까? 또는 윤리적인 개인이 윤리적인 물건을 판매해 수익을 얻는 행위는 자본주의적이기 때문에 비난 받아야 할까? 환경을 위한 실천으로 대기업이나 글로벌 브랜드가 생산하는 친환경 제품을 사는 온건한 소비 행위가 아닌 다른 방식, 새로운 상상력을 동원해봐야 할 때다. 그것과는 별개로 나는 올해 여름에도 올버즈 운동화를 한 켤레 더 살 생각이다.


*위 글은 김홍중의 <마음의 사회학> '3장. 스노비즘과 윤리'를 참고해 썼습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