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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민경 Aug 09. 2024

이주 작가의 서사가 펼쳐진
'길 위에 도자'전

국립아시아문화전당에서 4.18.부터 7.28.까지

2015년 광주에 개관한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은 아시아를 주제로 다양한 담론을 활성화하기 위한 ‘아시아 네트워크’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그 일환으로 열린 《길 위에 도자》는 아시아 출신 미국인 도예가 4인의 작품 세계를 보여주는 기획 전시였다. 유년기에 미국으로 이주해 문화적 충돌과 정체성의 혼란을 겪어온 작가들의 개인적 서사가 투영된 작품을 감상할 수 있었다.


'길 위에 도자' 전시 (사진 촬영 김윤해 / 국립아시아문화전당 제공)


미국 도예 레지던시 기관인 아치 브레이 도자 재단(Archie Bray Foundation)의 아트 디렉터였던 작가 스티븐 영 리(Steven Young Lee)는 이민 가정에서 태어난 한국계 미국인이다. 그의 작품은 스미스소니언 미술관(Smithsonian American Art Museum), 알프레드 도자 미술관(Alfred Ceramic Art Museum) 등에 소장되어 있다. 스티븐 영 리의 대표작은 〈해체〉(Deconstructed) 시리즈로, 한국 전통 도자 형태에 의도적인 변형을 가함으로써 관습에 도전하는 작가의 실험 정신이 드러난다. ‘형태의 불완전성, 충돌하는 이미지의 이질성, 문양의 현대성’은 그의 작품 세계를 관통하는 키워드다. 이번 전시에서 작가는 미국과 한국의 문화를 접목한 여러 신작을 선보였는데, 해체 시리즈의 일환인 〈독수리구름무늬 매병〉(Maebyeong Vase with Eagles and Clouds, 2024)은 고려청자의 구름학무늬 매병에서 형태를 가져온 한편, 학 대신 미국의 상징인 흰머리수리를 그려 넣었다. 이를 통해 작가는 한국인이자 미국인으로서 정체성을 가진 혼종적 자아를 표현하고자 했다. 또 다른 신작 〈용구름무늬 항아리〉(Jar with Dragon and Clouds, 2024)와 〈마징가Z아프로디테A무늬 항아리〉(Jar with Tranzor Z and Aphrodite A, 2024)에서도 이와 유사한 문양의 변주를 찾아볼 수 있다. 깨진 달항아리 3점으로 구성된 〈불완전한 긍지〉(Imperfect Pride, 2024)는 문양 대신 미국 성조기의 색상인 빨간색, 흰색, 파란색 유약으로 마감해 강렬한 인상을 준다.


스티븐 영 리의 '독수리구름문양매병'(왼쪽, 중앙), '마징가Z와 마징가Z아프로디테A무늬 항아리'(오른쪽)


한국에서 태어나 생후 9개월에 미국으로 입양된 세 오(Se Oh)는 한국계 미국인이자 퀴어라는 정체성을 식물과 꽃의 형태에서 영감을 받은 작품으로 표현하는 도예가이다. 그는 이번 전시에서 가장 적극적으로 한국적 공예 기법을 작품에 적용했다. 〈자화상〉(Self-portrait, 2023)은 한국 다완의 형태를 연상시키는 도자에 청자빛 유약을 절반만 바른 작품으로 물 위에 피어난 연꽃을 연상시킨다. 재벌구이를 하지 않은 〈경계성〉(Liminality, 2023)은 주류가 아닌 ‘사이’(in-between)에 머무는 작가의 정체성을 드러낸 작품이다. 이번 전시를 계기로 한국을 처음 방문한 그는 광주에서 만난 한국인들에 대한 인상을 〈정(情)원〉(Jeong (情) Garden, 2024)이라는 신작에 표현했다. 자신을 상징하는 오브제 주변으로 정이 많은 한국 사람들을 표상하는 도자 오브제를 배치한 20점의 그릇 시리즈다. 한국인을 상징하는 도자는 한국산 흙으로 빚은 반면, 미국산 흙으로 만든 그릇 안에 한국산 흙으로 만든 그릇을 넣은 오브제를 자신의 자화상으로 제시했다. 작가는 글로만 알고 있던 한국인의 ‘정’ 문화를 이번 광주 방문을 계기로 체감할 수 있었다고 전했다. 그의 또 다른 작품인 〈옥빛 정원〉(Jade Garden, 2024) 또한 한국에 머무르는 동안 완성한 것으로, 고려청자를 연상시키는 옥빛의 유약으로 마감해 자신이 모국에 효과적으로 뿌리내렸다는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했다.


세 오의 금붕어 연못(왼쪽, 중앙)과 '자화상'(오른쪽)


일상의 사물을 도자 오브제로 의인화한 작품 연작을 선보이는 린다 응우옌 로페즈(Linda Nguyen Lopez)는 베트남인 어머니와 멕시코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미국인 도예가이다. 영어가 능통하지 않은 어머니와 소통하기 위해 그는 어린 시절부터 주변의 사물을 활용해 대화를 이어가는 데 익숙했다. 사물을 관찰하는 남다른 시각을 가지게 된 작가는 먼지에 대한 특별한 애착을 가지고 〈털북숭이〉(Furry) 시리즈를 만들고 있다. 그에게 있어 사물에 내려앉은 먼지는 털어내야 하는 지저분한 것이 아닌 시간의 흐름과 사물의 역사를 알려주는 존재다. 이번 전시에서 선보인 〈봄 하늘 선염 먼지 털북숭이[광주]〉(Spring Skies Ombre Dust Furry [Gwangju], 2024) 외 7점의 〈털북숭이〉 시리즈는 작가가 광주에서 얻은 영감을 바탕으로 제작한 작품이다. 한편 그의 또 다른 작품 〈진실〉(Truths, 2024)은 도자로 만든 스툴 시리즈로 멕시코 특유의 모자이크 장식 기법이 돋보인다. 표면에 부착한 조각의 형태는 베트남의 자연적 모티프에서 따왔다.


린다 응우옌 로페즈의 '털북숭이' 시리즈(왼쪽), '금빛 돌이 달린 혹투성이'(오른쪽)


《길 위에 도자》전은 도자 오브제뿐만 아니라 퍼포먼스 또한 도예의 연장선상으로 다뤘다는 점이 눈에 띈다. 벽면에 투사한 퍼포먼스 영상에서는 현대미술 작가 에이미 리 샌포드(Amy Lee Sanford)가 토기를 던져서 산산조각 내고, 파편을 그러모아 원래의 형상대로 이어 붙이는 장면이 반복 상영된다. 작가는 1972년 캄보디아의 지식인 계층 부모에게서 태어났지만 미국에 입양되었다. 그가 태어난 지 얼마 안 됐을 시기, 캄보디아는 크메르 루즈(Khmer Rouge, 캄푸치아 공산당) 정권 아래 집단 학살과 고문이 극심했다. 그의 부친은 가족의 생명이 위험해지자 작가를 미국으로 입양 보냈고, 어린 시절 양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캄보디아 국경을 넘었던 작가는 당시의 기억이 트라우마로 남았다. 그 자신은 물론 캄보디아인, 나아가 끔찍한 독재 정권을 겪었던 모든 인류의 집단 트라우마를 치유하기 위해 작가는 퍼포먼스 시리즈 〈완전한 원〉(Full Circle, 2012~)을 지속하고 있다. 작가가 복원을 시도하는 토기는 캄보디아 캄퐁치낭 지방의 흙을 재료로 빚어낸 것이다. 금이 가고 파편이 유실된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토기는 트라우마가 이미 엎질러진 물처럼 영원히 치유될 수 없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작가는 이 퍼포먼스에 대해 “이웃 간의 문화와 장소성을 만드는 조각들을 찾아서 다시 되돌리는 긴 과정”이라고 설명했다. 이번 전시를 위해 작가가 새롭게 촬영한 퍼포먼스 영상 〈고치기〉(Repairing, 2024)에는 광주 5·18 민주화운동 희생자를 추모하는 마음이 담겨 있다. 영상과 함께 면실과 끈으로 다시 이어 붙인 토기 15점 〈무한한 호, 문화전당로〉(Unbounded Arc, Munhwajeondang-ro, 2024)가 바닥에 원형으로 배치되었다.


에이미 리 샌포드의 퍼포먼스 작업을 위해 사용된 토기


에이미 리 샌포드를 제외한 참여 작가들은 전시 오픈 전부터 짧게는 2주에서 길게는 한 달까지 광주에 머물며 레지던시 프로그램에 참가했다. 이를 위해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은 인근 조선대학교 도예학과와 연계해 대학 내 가마 작업실을 작품의 창·제작을 위한 장소로 활용할 수 있도록 했다. 이를 계기로 조선대학교에서는 전시 기간 중 린다 응우옌 로페즈 작가의 기법을 응용한 창작 워크숍이 3회에 걸쳐 열렸다. 지역 대학과 연계한 프로그램은 학생들이 작가들의 작업 과정을 지켜보고 상호 교류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는 점에서 고무적이다. 다만 레지던시 기간이 짧았던 만큼 작품에 대한 폭넓은 아이디어를 생각해 내기에는 빠듯한 시간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작가들 입장에서는 한국, 그리고 광주라는 도시의 역사성과 문화를 이번 전시를 통해 짧게나마 알아갈 수 있는 기회가 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국립아시아문화전당에서 열린 첫 번째 도예 전시였다는 점에서 앞으로 이곳에서 공예를 소재로 한 전시가 더 많이 열리길 기대해 본다.


'길 위에 도자' 전시 (사진 촬영 김윤해 / 국립아시아문화전당 제공)


Interview
조은영 국립아시아문화전당 전시기획과 학예연구사


《길 위에 도자》전 개최 계기가 무엇인가?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은 예술의 창의성과 테크놀로지를 결합한 융복합 콘텐츠를 줄곧 선보이고 있다. 미디어아트 전시가 주를 이루는 가운데 물성을 다루는 전시에 대한 수요가 꾸준히 있었다. 지난해에 기획한 《일상첨화》전(국립아시아문화전당, 2023.9.14.~12.3.)에서 20세기 한국과 서아시아의 일상 풍경을 담은 회화를 소개했던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문화창조원 복합전시6관은 항온과 항습 기능이 갖춰져 있다는 점에서 물성을 다루는 공예나 회화 전시를 하기에 용이하다. 이번에 전시한 도자는 물론, 지난 전시에서도 김환기, 천경자 등 대가의 회화 작품을 대중에게 보여줄 수 있었다.


도예를 아시아의 전통 유산이라고 소개한 이유는?

9~10세기경 중국에서 자기가 최초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도 10세기부터 고려청자가 등장한다. 토기가 아닌 유약을 입혀 재벌까지 한 자기는 아시아가 먼저이기에 상징성이 있다고 봤다.


이번 전시 작가를 선정한 배경도 궁금하다.

이주 경험이 있는 아시아 출신 공예가를 몇 개월 동안 리서치했다. 유학 등 자발적인 이주가 아닌 이민이나 입양 등 어쩔 수 없는 이유로 터전을 바꿔야 했던 이들을 찾아다녔다. 그렇지만 이번 전시를 ‘디아스포라’라는 거대 담론으로 설명하는 것은 의도적으로 피했는데 개인적 이주 서사에서 출발해 전시를 기획하려 했기 때문이다. 스티븐 영 리와 린다 응우옌 로페즈는 이민 2세대 작가라는 공통점이 있다. 에이미 리 샌포드는 캄보디아, 세 오는 한국에서 각각 미국으로 입양되었다. 아시아 외부에서 활발하게 전개되는 현대 도자예술의 중심지로 미국을 택한 이유는 스티븐 영 리를 비롯한 현대 도예가들이 미국에서 활발한 활동을 보여주고 있어서다.


작가들의 작품에서 한국성을 가미하고자 한 시도가 흥미롭다.

재료적 실험을 해보자고 우리가 먼저 제안했다. 한국계 미국인 작가 세 오는 자신의 뿌리에 대한 궁금증과 작품을 통해 한국과 연결되고자 하는 의지가 강했다. 조선대에서 작업하기에 앞서 광주 도재상에서 다양한 흙을 사 와서 테스트했는데 그가 평소 작품에 사용하는 미국산 흙에 비해 한국산 흙은 거친 면이 있다고 하더라. 물레 작업에서 꽃잎 형태를 얇게 뜨는 과정에서 자꾸 갈라지는 시행착오를 겪다가 결국 그중에서 본인에게 가장 맞는 흙을 찾아서 작업을 완성할 수 있었다. 그는 전통 문양이 새겨진 도장을 구해서 작품 곳곳에 찍기도 했다. 스티븐 영 리의 작품은 대부분 청화백자인데 모두 가스 가마로 제작된다. 그런데 조선대에는 전기 가마가 설치되어 있어 청화백자의 빛깔을 내기 어려웠던 물리적 환경 탓에 〈불완전한 긍지〉 같은 강한 컬러의 유약을 시유한 작품이 탄생할 수 있었다. 도자는 가마 안에서 소성될 때 스스로 수축하며 움직인다. 소성 결과를 예측하고 과정을 컨트롤하는 스티븐 영 리의 작업 과정을 지켜보며 도예라는 매체가 굉장히 흥미롭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조선대와의 교류 프로그램은 어떻게 하게 됐나?

이번 전시를 위해 적극적으로 협조한 도자디자인전공 박재연 교수님 덕분이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학생들이 작가들의 작업에서 많은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이들이 떠난 후에도 자신들이 본 것을 토대로 스티븐 영 리의 〈해체〉 시리즈나 린다 응우옌 로페즈의 〈털북숭이〉 시리즈에 적용한 기법을 변형해보는 실험을 하고 있다고 들었다.


에이미 리 샌포드의 퍼포먼스도 많은 울림을 준다.

도예를 다른 방식으로 보여주는 작가도 함께 소개하고 싶었다. 그의 이주 배경이 전시 주제와도 잘 맞았다. 트라우마와 치유를 주제로 한 그의 퍼포먼스 영상을 국립아시아문화전당에서 소개한 것은 무척이나 상징적이다. 이곳은 바로 5·18 민주화운동의 상징인 옛 전남도청 자리이기 때문이다.


*본 기사는 2024년 8월에 발행된 <공예문화> 63호에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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