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예의 본질과 일상화를 논한 자리
2024 공예주간의 기획 프로그램으로 선정된 크래프트& 세미나가 지난 5월 서울공예박물관에서 열렸다. 세미나는 1부 ‘공예, 본질에 다가가다’, 2부 ‘공예, 일상에 들어오다’를 테마로 공예 영역의 전문가와 매개자 6명을 연사로 초청했다. 먼저 허보윤 서울대학교 공예 전공 교수가 학술적 차원에서 공예 담론을 살펴보며 세미나의 포문을 열었고, 그다음으로 김혜정 도예가가 수행적인 태도로서 공예를 바라보는 시각과 치유로서의 공예에 관한 경험담을 나눴다. 공예를 매개로 다양한 활동을 펼치는 이들이 각자의 식견을 공유하는 시간도 이어졌다. 패션·럭셔리 산업에 한국 공예를 접목하는 서영희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문화유산 촬영을 전문으로 하는 사진가 서헌강, 삼청동과 한남동에서 공예 편집숍 월(WOL)을 운영 중인 조성림 대표, 일본에서 인테리어 디자이너로 일하다가 귀국해 갤러리 모시를 오픈한 이나경 나나테이블 대표는 공예의 가치를 일반 대중에게 전달하는 일은 사진가, 큐레이터, 갤러리스트, 디자이너 등 다양한 분야의 공예 매개자들이 함께 해야 하는 것임을 상기시켰다. 여기서는 허보윤 교수와 김혜정 도예가의 강연을 요약해서 소개하고자 한다.
“공예성은 사회를 대하는 공예적 태도로 확장된다. 공예품을 만드는 태도,
대하는 태도를 사회로 확장시켜 보자. 앞으로 젊고 급진적인 새로운 공예가들이 디지털 테크놀로지를 수공과 결합하고 그 결합을 통해 사회적·정치적 문제를
발언할 것을 기대해 본다.” by 허보윤 서울대학교 공예 전공 교수
‘지금 공예를 말하는 이유’라는 주제로 발표를 시작한 허보윤 교수는 공예가 과거 어느 때보다 주목받고 있는 현시점에서 과거를 되짚어 보고, 현대미술과 디자인과는 다른 공예의 가치가 무엇인지를 일목요연하게 전달했다. 그는 『공예의 발명』과 『공예로 생각하기』의 저자로 국내에도 잘 알려진 글렌 애덤슨(Glenn Adamson)과 영국의 역사학자이자 큐레이터인 폴 그린할(Paul Greenhalgh) 등의 이론가들이 공예를 19세기 말 서구에서 발명된 개념으로 정의했음을 소개했다. 공예는 19세기 말 윌리엄 모리스(William Morris)의 미술공예운동을 통해 소규모 생산과 수공업 윤리를 대표하는 고유한 영역으로 자리 잡았다. 공예의 정체성이 위기를 맞게 된 것은 20세기 말엽이다. 당시의 공예가들은 ‘공예’와 ‘장인기술’(craftsmanship) 등의 단어를 거부하고 순수 미술가로 편입하고자 했다. 이를 주도한 인물로 ‘공예에서 예술로 운동’(Craft-to-Art movement)-미국 도자 혁명(American Clay Revolution)이라고도 불린다-을 주창한 그리스계 미국인 조각가 피터 볼커스(Peter Voulkos)를 들 수 있다.
21세기 들어 공예는 전례 없는 부흥기를 맞았다. 2016년 제정된 로에베 재단 공예상 등을 통해 럭셔리 산업도 재능 있는 현대 공예가들을 주목하고 있다. 2004년부터 매년 영국 공예청(Crafts Council)이 주최하는 컬렉트 아트페어(Collect Art Fair)가 2020년을 기점으로 기존 사치 갤러리보다 더 넓은 면적을 가진 서머싯하우스로 행사 장소를 옮긴 사실도 의미심장하다. 그간 제대로 주목받지 못했던 공예가 부상하는 최근의 현상은 근대화 이후 줄곧 우위에 있었던 시각 문화 중심의 태도에 대한 반작용으로 설명할 수 있다. 오늘날의 사회가 급격한 디지털화를 통해 재편성됨에 따라 물질성을 향한 관심이 다시금 대두되고 있다는 것이다.
『뉴캐피털리즘』을 통해 신자유주의를 비판했던 리처드 세넷(Richard Sennett)은 그 대안으로서 물질문화를 주목하는 호모 파베르 프로젝트(homo faber project)의 일환으로 『장인』, 『투게더』, 『짓기와 거주하기』라는 세 권의 책을 출간했다. 세넷의 관점은 하나의 참조점이 될 수 있으며, 이제는 공예의 사회적 가치에 대해 이야기해야 할 시점이다. 공예의 특징은 ‘일상성’, ‘사물성’, ‘수공성’으로 정의되는데 먼저 일상성은 ‘일상의 공간과 개념’을 상정한다. 공예가는 다른 사물과의 조화를 염두에 두고 공예품을 만든다. 그렇기에 순수미술과 달리 공예품은 화이트큐브로 대표되는 전시 공간에 놓였을 때 어색해 보인다. 두 번째 특징인 ‘수공성’은 손(몸) 기술, 숙련, 우아한 노동 등의 문제를 가리킨다. 마지막으로 ‘사물성’은 이미지의 대립 항으로 존재하는 공예를 말한다. 공예활동은 사과를 그리는 일, 즉 재현이 아니라 실제로 먹을 수 있는 사과를 키우는 일이다. 그런 점에서 공예가는 물질을 직접 대면하고 다루기 때문에 그 물질(재료)에 대한 끊임없는 연구가 필요하다.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는 『인간의 조건』에서 매일 고된 일을 되풀이해야 하는 인간을 ‘일하는 동물’이라는 의미의 ‘아니말 라보란스’(animal laborans)라고 명명하며 열등한 존재로 취급하는 한편, 상위자 개념으로 ‘호모 파베르’를 제시한 바 있다. 반면 그의 제자인 리처드 세넷은 『장인』에서 노동하는 인간도 생각할 줄 아는 존재라고 주장하며 한나 아렌트의 구분 방식을 정면으로 반박했다. 허보윤 교수는 사회 문제에 대한 통찰력을 제공하는 리처드 세넷의 관점을 바탕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하나의 틀로서 공예를 이해해야 한다고 강조하며 세미나 발표를 마무리했다.
“공예를 하는 일차적 목적이 예쁜 형태를 만드는 데에 있지 않았다. 먼저 원리를 이해하고 이를 몸으로 체득하면 공예품이 그 결과로 만들어지는 것임을 알았다.”
by 김혜정 도예가
다음 발표자인 김혜정 도예가는 선천적 정맥기형이라는 장애를 가지고 태어나 20여 년간 전업 작가의 길을 걸으면서 경험했던, 공예가 가진 치유의 힘에 대해 이야기해 공감을 자아냈다. 작가는 신체성, 정체성, 여성성이라는 문제를 공예 작업에 몰두하며 이겨낼 수 있었다고 언급했다. 평소 자연과 생명의 순환을 작품의 모티프로 삼는 그의 작업 중 2020 로에베 재단 공예상의 최종 후보작으로 올랐던 작품 〈심피〉(Carpel)는 속씨식물에서 암술이 되는 잎을 형상화했다. 수작업으로 뜯겨지고 찢겨 나간 자연의 형태를 작품에 표현하는 그의 기법은 분재를 만드는 방식과도 닮아 있다. 분재도 관리사가 도구를 이용해 인위적인 방식으로 나무껍질을 벗겨내고 가지를 잘라내었을 때, 스스로 재생하면서 단단하고 아름다운 형상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김혜정 작가는 올해 렉서스 크리에이티브 마스터즈 어워드 최종 후보작으로 선정된 신작 〈백목련 춤〉(Magnolia Dances, 2024)의 작업 과정을 소개했다. 이번 작품에서 작가는 쌀이나 모시 한복에서 느껴지는 은은한 백자의 색감으로 표현하고자 다양한 실험에 몰두했다. 도재상에서 판매하는 도자 소지로는 원하는 컬러를 구현할 수 없었던 까닭에 재료 배합에 시간을 쏟았다. 물레 작업을 할 때면 각 흙마다의 유연성, 가소성, 수직성을 파악해야 했다. 작가에게 있어 물레가 회전하는 시간은 갖은 상념에서 벗어나는 시간이었다. 물레의 중심에 몸을 맞추며 ‘동중정’(動中靜), 즉 움직임 속 고요함을 터득해나갔다. 작업에 몰두하는 작가의 진중한
태도는 완성된 작품에서 고스란히 느껴진다.
이번 세미나를 기획한 안유선 에이피씨웍스 대표는 이번 세미나 참가 신청 접수를 받은 지 불과 2시간 만에 신청자 마감을 했다는 소식을 전했다. 100여 명의 참석자들은 세미나 당일, 장장 5시간 넘게 자리를 지키며 열띤 호응을 이어갔다. 이를 통해 최근 공예에 대한 뜨거운 관심과, 공예를 논하는 진지한 자리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한편 이번 세미나에 참가한 청중의 대부분이 공예가이거나 문화 예술 종사자였기에 앞으로는 일반 대중보다는 타깃을 좁혀서 공예 영역에서 활동하는 이들이 실질적인 영감을 받을 수 있는 프로그램을 기획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이다.
크래프트& 세미나는 올해 매달 지속적으로 개최될 예정이라고 한다. 첫 세미나가 이론, 기획자, 창작자의 눈으로 공예를 다양한 관점으로 바라보았다면, 두 번째 세미나는 상품 기획자, 전시 기획자, 광고 기획자들이 공예에 대한 생각을 전달하고, 프로젝트 사례와 함께 실무적인 인사이트를 나누겠다는 것이다. 이를 시작으로 공예의 담론을 진지하게 다루는 활동이 계속해서 이어질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공예성은 사회를 대하는 공예적 태도로 확장된다. 공예품을 만드는 태도, 대하는 태도를 사회로 확장시켜보자. 앞으로 젊고 급진적인 새로운 공예가들이 디지털 테크놀로지를 수공과 결합하고 그 결합을 통해 사회·정치적 문제를 발언할 것을 기대해본다.” by 허보윤 교수
“이제는 나는 이걸 할 줄 아는데 너는 뭘 잘하니 물어보고 협업하는 시대다. 각자만의 모티브를 가지고 단계적인 준비를 하면서 시대적 흐름에 발맞추길 바란다.” by 서영희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문화유산을 찍을 때 우연히 건진 사진은 하나도 없다. 머릿속으로 날씨와 시간, 구름의 형상을 다 구상한 다음에 셔터를 누른다. 사람을 찍을 때도 마찬가지다. 그 사람의 표정과 손 동작, 배경을 관찰하면서 어떤 각도에서 찍을지 미리 그림을 그린다.”by 서헌강 포토그래퍼
“공예를 하는 일차적 목적이 예쁜 형태를 만드는 데에 있지 않았다. 먼저 원리를 이해하고 이를 몸으로 체득하면 공예품이 그 결과로써 만들어지는 것임을 알았다.” by 김혜정 도예가
“창작자를 위한 팁을 세 가지 준비했다. 먼저 작품에 담고자 하는 이야기를 최대한 전달해야 한다. 그 이야기가 작품을 더욱 빛나게 하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기획자와 사용자의 피드백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내 작품을 직접 오랜 기간 사용해볼 것을 추천한다. 내가 스스로 사용자가 되어 낯설게 보는 객관적인 시각이 필요하다.” by 조성림 대표
“정해진 용도에 맞추기보다 상황에 따라 상상력을 더해서 공예품을 사용하면 활용도가 더욱 높아진다. 공예를 응원하는 한 가지 방법은 일상 속에서 공예를 계속해서 사용하는 것이다.” by 이나경 대표
Interview
안유선 에이피씨웍스 대표
국문학을 전공하고 문화예술 분야에서 커리어를 시작했다. 전시 및 컨벤션 기획, 출판, 홍보 영역에서 전방위적으로 일하는 중이다. 에이피씨웍스 대표이자 『월간한옥』 디렉터를 맡고 있으며, 올해부터 ‘크래프트&’ 세미나를 론칭했다.
먼저 간단한 본인 소개를 해달라.
『월간한옥』을 발행하는 에이피씨웍스의 대표를 맡고 있다. 에이피씨웍스는 『월간한옥』과 《서울한옥박람회》, ‘CRAFT&’ 등을 기획하는 헤리티지 전문 콘텐츠 기업이다. 나는 회사 창립 멤버로 합류해 시작부터 함께 했다. 한국의 헤리티지를 발굴해 세계적으로 알리는 일은 미래에도 AI가 대체할 수 없는 일이라는 생각에서 국내외에서 무형문화재 작품을 전시하거나 전통 상품이나 기업을 브랜딩 하는 업무를 주로 해오고 있다.
『월간한옥』에서 공예를 주시하는 특별한 이유나 배경이 있나?
‘한국적인 모티브를 발견하고 이를 다채롭고 새롭게 경험하는 매거진’을 모토로 하는 『월간한옥』은 한국의 정체성을 한권의 책으로 담아보자는 생각에서 출발했다. 그 정체성의 뿌리는 헤리티지이기 때문에 한국의 다양한 문화유산을 다루는 일은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그 중에서도 공예는 일상에서 가장 가까이 있기에 더 풍부한 이야기를 전달할 수 있다는 점에서 매력을 느꼈다. 다른 문화유산과 달리 전통과 현대의 경계가 모호하기에 확장할 수 있는 기회가 더 많다고 생각한다.
지난해에는 절판된 하워드 리사티의 『공예란 무엇인가』 복간 프로젝트를 텀블벅에서 진행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1000명에 가까운 분들이 10년 전 절판된 책을 복간하는 펀딩에 참여한 놀라운 사건이었다. 복간 프로젝트를 통해 시간이 지나도 공예의 가치는 더욱 높아지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이제는 단순히 아름다운 것을 찾는 것을 넘어서 의미가 있는 것, 인간 중심의 예술을 찾는 시대다. 그 중심에 공예가 있다고 본다.
‘크래프트&’ 세미나를 기획하게 된 계기가 궁금하다.
최근에 흥미로운 공예 전시가 많아지고, 공예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고 있는데 이런 관심을 오프라인에서 함께 나누는 자리는 많지 않은 것 같았다. 전시나 상품의 형태로 공예가 많이 등장하지만 그에 대한 이야기가 쏙 빠져 있다는 느낌을 받았던 것이다. 하지만 전시와 상품도 다양한 이야기 속에서 탄생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를 논하는 자리가 의미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기획 단계에서 공예를 보여줄 수 있는 다양한 방식이 있지만 ‘이야기’에 집중해보자고 방향성을 좁혀 나갔다. 그동안 『월간한옥』 취재 차 인터뷰를 하다 보면 나만 듣기에 너무 아쉬운 이야기를 들을 때가 많았다. 그런 흥미로운 이야기를 콘텐츠로 세미나 자리에서 전달한다면 소기의 목표는 이룬 것이라고 생각했기에 이론, 창작, 홍보 등 다양한 분야의 연사를 섭외해 강연을 기획하게 된 것이었다.
세미나를 마친 소감은? 공예가들의 반응은 어땠나?
100명 선착순 모집을 진행했는데 2시간 만에 참가 신청이 마감되는 것을 보고, 모두가 공예에 대해 이야기하고, 듣고 싶어 한다는 확신이 들었다. 추가 모집이나 실시간 온라인 강연에 대한 문의도 많았다. 다음 행사에는 더 많은 인원이 참여할 수 있도록 방안을 고민해봐야 할 것 같다. 참석자 중 37%는 공예 작가, 20%는 공예 및 미술사학과 학생들, 18%는 문화예술 관련 분야의 종사자였다. 현장에서 오간 여러 질문들을 통해 많은 공예가들이 급변하는 오늘날, 지금의 공예를 어떻게 정의해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이 깊어져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무엇이 맞고 틀리다고 말하기 어렵지만, 서로가 생각하는 공예에 대해 이야기할 필요가 있다고 다시 느끼게 된 시간이었다.
앞으로도 ‘크래프트&’ 세미나 시리즈를 지속할 계획인가?
매달 지속적으로 개최하는 게 목표다. 다음 세미나는 기획자와의 만남을 주제로 한다. 첫 세미나가 이론, 기획자, 창작자의 눈으로 공예를 다양한 관점으로 바라보았다면, 이번에는 상품 기획자, 전시 기획자, 광고 기획자들이 공예에 대한 생각을 전달하고, 프로젝트 사례와 함께 실무적인 기획 인사이트를 제공할 예정이다. ‘크래프트&’을 통해 점차 비지니스, 디자인 등 공예와 연결될 수 있는 다양한 분야를 확장해 나가고자 한다. 공예인들의 사고를 환기시키고, 다채롭게 확장할 수 있도록 하는 길잡이 역할을 맡고 싶다.
향후 계획 중인 흥미로운 공예 프로젝트가 있다면?
공예 분야의 이론과 실무에 관련된 단행본을 기획 중이다. 번역서 『공예란 무엇인가』 재출간을 통해 이론의 기초를 다시 돌아볼 기회를 전달했다면, 올해는 현 시대, 한국 공예에 대한 내용을 다루는 책을 출판할 계획이다. 또 베를린, 경덕진 등 해외 도시와 연계해 공예를 기반으로 한 문화 교류 프로그램도 기획하고 있다. 전시, 워크샵 등 형식에 제한을 두지 않으려 한다. 이처럼 공예인들이 건강한 영감을 얻고 커리어를 성장시킬 수 있는 시간을 마련하고 이를 통해 『월간한옥』이 공예가와 더 많은 교류와 협력을 할 수 있기를 바란다.
https://link.tumblbug.com/fCcIEqZUULb
*본 기사는 2024년 8월에 발행된 <공예문화> 63호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지면 관계상 인터뷰는 생략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