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PT: Vault Service 전시를 위한 글
<PRPT: Vault Service> 전시를 위해 설계된 은행 금고는 화폐 대신 작품을 보관하는 장소다. 진귀하고 비밀스러운 것을 보관하는 금고의 모티브는 오랜 시간 동안 영화와 소설의 소재가 되며 상상력을 불러일으켰다. 세계에서 가장 안전한 금고로 알려진 미국 금괴보관소(USBD, United States Bullion Depository)는 1937년 미국 켄터키주 군사기지 ‘포트 녹스(Fort Knox)’에 건립되었다. USBD는 미국 연방정부 소유 금괴의 상당량을 보관하고 있으며 007 시리즈 ‘골드핑거’에도 등장했다. 이곳의 이름을 딴 ‘스위스 포트 녹스’는 1996년에 디지털 자산 전문 프라이빗 뱅크 ‘SIAG’가 구축한 일종의 데이터 보호 센터다. 알프스 산맥 지하 800m 암반 아래에 위치한 이곳은 자연재해는 물론 핵무기 공격과 해킹에 대한 방어 시스템을 갖췄다. 30개국에 위치한 4만여 개의 서버에 대한 2차 백업용 데이터와 함께, 미래 세대가 저장된 자료를 해독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타임캡슐이 저장되어 있다. USBD가 일반인의 접근이 철저히 금지된 요새라면 스위스 포트 녹스는 자체 보유한 항공기 착륙장과 세관을 통해 고객들을 맞이한다.
묵직한 콘크리트 건물 안에 숨겨져 있는 금고와 달리 자유항의 미술품 수장고는 국경 사이를 매끄럽게 이동한다. 제네바 자유항은 세상에서 가장 비밀스러운 예술 기지다. 2016년 <뉴욕 타임스>는 전 세계 슈퍼 리치들이 제네바 자유항에 2천8백만 달러로 추산되는 작품을 쌓아놓고 있으며, 그중에는 피카소, 앤디 워홀, 제프 쿤스, 호안 미로 등의 작품도 포함되어 있다고 보도했다. 아예 일반 면세 창고를 미술품 수장고이자 복합 문화 공간으로 탈바꿈시키는 일을 전문으로 하는 글로벌 수장고 브랜드도 생겨났다. ‘르 프리포트(Le Freeport)’는 아트 바젤의 메인 스폰서로도 알려져 있으며, 룩셈부르크 핀델공항, 스위스 제네바역, 싱가포르 창이공항에 이어 올해 인천에 아시아 최대 규모 예술품 수장고 오픈을 앞두고 있다. 미디어 아티스트이자 저술가 히토 슈타이얼(Hito Steyerl)은 ‘면세 예술(Duty-Free Art)’이라는 글에서 자유항 미술품 수장고를 치외법권 지대에 위치한 조세 회피처이자, 일종의 비밀 미술관이라고 설명한다. ‘Duty-Free’라는 용어가 ‘면세’ 외에 ‘의무에서 자유로운’이라는 이중적 의미가 있음에 주목한 그는 자유항 미술품 수장고에 놓인 작품이 민족 국가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국립 미술관의 소장품이라면 짊어져야 하는 의무-교육, 계몽, 재현 등-에서 자유롭다고 주장한다.
<PRPT: Vault Service> 전시는 은행이라는 특수한 환경을 설정함으로써 색다른 방식으로 작품을 경험하는 기회를 제공한다. 앞서 ‘Duty-Free’ 예술이 ‘의무’에서 자유로워졌다면, ‘PRPT’에서 선보이는 예술은 전시 관람 순서를 제한하는 동선에서 자유롭다. 생성형 AI로 결과를 도출하기 위한 시행 명령어인 프롬프트를 입력하듯이 수기 전표에 작품을 호출하는 프롬프트를 적어 은행 창구에 제출하면서 관람은 시작된다. 작품은 한자리에서 조망할 수 있는 미학적인 관조의 대상에서 벗어나며, 그로 인해 방문자들은 한정된 시간 내에 어떤 작품을 금고에서 만나볼 것인지 선택해야 하는 문제를 맞닥뜨린다. 이러한 조건부 감상 방식은 작품을 더욱 진지한 태도로 관찰하는 경험으로 이끈다. 익숙한 은행 공간이 낯설고 비밀스러운 전시장으로 탈바꿈되는 곳, 경험의 몽타주는 이곳에서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