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의 가능성을 가꾸는 것으로의 전환
최근 SNS를 보다가 우연히 제4회 《포르투 디자인 비엔날레》 홍보 게시물을 발견하고 시선이 멈췄다. “디자인이 미래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에서 집합적인 주체들을 통해 현재의 가능성을 가꾸는 것으로 전환될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라는 문구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디자인은 문제 해결의 도구라고 여겨진다. 하지만 위의 질문이 제기한 것처럼 “현재를 다 함께 가꾸는 것” 또한 디자인이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 디자인 영역에서는 던 앤 라비의 ‘사변적 디자인(Speculative Design)’, 빅토리아 & 앨버트 뮤지엄에서 시작한 ‘래피드 리스폰스 콜렉팅(Rapid Response Collecting)’, ‘디자인 행동주의(Design Activism)’를 전개하는 여러 디자이너 등 다양한 전시, 출판, 강연 등의 활동들이 디자인이 단순히 판매 촉진의 수단이 아니라 사람들의 인식 변화를 촉발하는 역할도 있다는 것을 일깨워준다.
공예 영역에서도 최근 들어 이전과 다른 이야기를 하는 움직임이 많아지고 있다. 쓰임새를 강조했던 과거와 비교했을 때 공예가의 자유로운 미적 표현에도 한껏 열려 있는 분위기다. 로에베재단 공예상, 렉서스 크리에이티브 마스터즈 어워드와 같이 글로벌 브랜드가 주최하는 공모전에서 수상하는 한국 공예가들이 늘어나면서 그러한 경향은 더욱 심화되는 추세다. 얼마 전 DDP에서 열린 ‘서울디자인위크’ 기획전시 《시팅 서울》은 서울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디자이너와 공예가들이 만든 100개의 의자를 모아놓은 자리였다. 흥미로운 점은 산업 디자이너들의 대부분은 앉을 수 있는 기능에 비교적 충실한 의자를 제안한 데 비해, 작가주의 디자이너와 공예가들의 의자는 소재나 표현에 있어 실험적이고 자유로운 면모를 띄었다는 점이다. 오늘날 동시대 공예가들이 기능에 연연하기보다는 만들기 그 자체에 몰입하는 작품 활동을 하는 것은 주목할 만한 지점이다.
일반적으로 공예의 특별함은 인간의 ‘손기술’에서 발현된다는 믿음이 존재한다. 제작자가 물건에 남기는 고유한 흔적에 주목하는 것이다. 하지만 공예품은 처음부터 완벽하게 인간의 손에 의해서 탄생하는 것은 아니다. 도자의 재료가 되는 태토는 기계의 분쇄, 탈철, 탈수 공정을 거쳐 가공하기 쉬운 상태로 변화한다. 도예가는 물레, 가마 등을 단순히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과 ‘협업’해 작품을 완성한다. 흙은 끊임없이 도예가의 물리적인 힘에 저항하지만, 손은 도구와 조응하며 계속해서 다음 단계로 나아간다. 한편 3D 프린터로 출력한 공예품도 곳곳에서 등장하고 있다. 이런 것들은 기계의 힘을 빌렸으니 디자인인가? 공예는 인간의 ‘파이널 터치’에만 의미를 두는 특정한 행위인가?
기물(기능성)로써의 공예와 오브제(심미성)로써의 공예 중에 무엇이 우월한지를 가르는 것, 또 기계로 제작된 디자인과 손으로 만든 공예를 명쾌하게 구분하려고 하는 이분법적인 태도는 공예의 담론을 빈곤하게 만든다. 팀 잉골드는 “작품을 만드는 것은 오히려 물질에 관여하기(engagement)”라고 말했다(p. 65). 그러한 관점에서 공예가와 그가 다루는 물질 간의 조응에 관한 이야기, 만들기의 과정에서 공예가만의 ‘이야기 만들어내기(storytelling)’가 오늘날 공예 영역에서 필요한 것이라 할 수 있겠다.
페미니즘 철학자 도나 해러웨이는 ‘SF’를 통한 ‘세계 만들기(Worlding)’를 강조한다. 그에게 SF는 “과학소설(science fiction), 사변적 우화(speculative fabulation), 실뜨기(string figures), 사변적 페미니즘(speculative feminism), 과학적 사실(science fact)”(p. 10)를 모두 포함하는 약어이다. 그중에서도 해러웨이는 인류의 가장 오래된 게임 중 하나인 ‘실뜨기’를 강조하는데 이것은 “만들기의 실천일 뿐만 아니라 사유하기의 실천이고, 교육학적 실천이며 우주론적 퍼포먼스”(p. 30)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SF 개념을 경유했을 때 인간을 포함한 모든 반려종(기계와 같은 무생물조차)들은 객체와 주체라는 구분 없이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얽힌다는 점을 지각할 수 있다.
해러웨이는 예술적 실천으로써 ‘세계 만들기’의 사례 중 하나로 ‘산호초 코바늘 뜨기’ 프로젝트를 소개한다. 라트비아 출신으로 수학자와 예술가로 활동하는 베르트하임 자매((Margaret & Christine Wertheim)가 제안하고 27개 국가, 8천 명의 사람들이 참여해 해양 생태계의 급속한 파괴와 산호초의 죽음을 알린 프로젝트다. 수학자, 공예가, 큐레이터, 활동가들을 산호초라는 복수 종, 즉 ‘집합적인 주체’로 묶는 이 프로젝트에 대해 해러웨이는 “사랑과 분노의 무한 반복”(p. 138)이자 “근접성 없는 친밀”을 통한 “보살피기의 실천”(p. 139)이라고 표현한다. 일각에서는 이러한 활동은 ‘크래프티비즘(craftivism)’이라고 정의하기도 한다. 안영주에 따르면, 크래프티비즘은 2003년 벳시 그리어(Betsy Greer)가 고안한 용어로 “유토피아 사회를 구축하려는 거대 서사를 갖기보다 개개인의 미시적 삶을 변화시키며, 부드럽고 작지만 한 땀 한 땀 만들어가는 실천적 힘”을 드러내는 데 목적이 있다. 위의 ‘산호초 코바늘 뜨기’ 프로젝트라던가 ‘얀 바밍(yarn bombing)’ 같은 아마추어 활동가들의 뜨개질 행위가 크래프티비즘의 대표적 사례로 주로 거론된다.
국내에서도 크래프티비즘의 맥락에서 독해할 수 있는 전시를 뮤지엄이라는 제도적 공간에서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추세다. 성소수자, 이방인 또는 난민으로서 작가가 가진 아픔을 끄집어내는 도자 작품과 퍼포먼스를 망라한 《길 위에 도자》전(2024, 국립아시아문화전당), 버려진 재료 등을 작품 소재로 활용하는 공예가들을 초대한 《물질실천》전(2025, 서울공예박물관)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세상 짓기’라는 주제로 열리는 2025 청주공예비엔날레의 세 번째 세션 ‘모든 존재자를 위한 공예’에서도 해러웨이의 ‘친족 만들기(making kin)’ 개념을 토대로 비인간 존재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하지만 팬데믹 이후 미술계 전반에 인류세 담론이 범람하면서 버려진 재료를 활용하는 것만이 일종의 친환경적 공예 활동으로 받아들여지는 것, 또 그러한 공예품을 모아서 친환경을 주제로 한 전시를 기획하는 것 또한 일종의 유행처럼 소비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경계할 필요가 있다. 중요한 것은 만들기를 통해 자신의 이야기를 지속하는 공예가들의 태도이다. 그런 점에서 《제4회 포르투 디자인 비엔날레》에서 던진 질문을 이렇게 바꿔본다면 어떨까? “공예가 사용성과 심미성만이 지배하는 세계를 벗어나 집합적인 주체들을 통해 현재의 가능성을 가꾸는 것으로 전환될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참고문헌
도나 해러웨이, 최유미 옮김, 『트러블과 함께하기』, 마농지, 2021.
안영주, “공예는 동사다”, 서울시립미술관 세마코럴, 2024년 8월 15일. http://semacoral.org/features/youngjooahn-craft-is-a-verb#fnref1:19
팀 잉골드, 차은정·오성희·권혜윤 옮김, 『만들기』, 포도밭,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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