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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이크 타이프 Jan 19. 2018

2018이 바라보는 1980, 그리고 1987

영화 <1987>, 그리고 책 <지금 이 순간의 역사>

영화 <1987>

2017년 연말 개봉된 영화 <1987>이 2018년 1월 현재 600만 관객 동원을 넘어서는 흥행을 보이고 있다. 지난 1월 7일 문재인 대통령이 직접 영화관에서 관람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영화 전문지 <시네 21>은 이 영화를 “2016년 겨울, 광장의 승리, 뜨거운 온도가 어디서 발화됐는지 되짚어가는 영화”라고 소개하고 있다(시네21, 제1137호). 1987년 '박종철 군 고문치사사건 실화'를 재구성한 이 영화는 마치 현미경으로 세포분열을 관찰하듯 당시 관련 인물들의 활동과 관계, 그리고 이들의 정서를 스크린 속에 담아냈다.


'얼음 정국'으로 묘사되는 제5공화국 말기, 대학생 박종철은 공안당국에 붙잡혀 부당한 폭행과 고문으로 사망한다. 증거인멸을 위해 사건 은폐를 지시하는 대공수사처 박처장(김윤석 분), 이에 맞서 정의(justice)로서의 '법'을 실천하는 서울지검 최검사(하정우 분). 그리고 이 두 사람의 대립 속에 '부정의를 선택한 자들'과 '정의를 선택한 자들'이 동참한다. 영화 <1987>은 - 영화 메인 포스터 문구처럼 - "그들의 선택이 세상을 바꾸"는 격동의 시간을 밀도 있고 짜임새 있게 그려내고 있다.


출처: 영화 1987 포스터 / 머니투데이 DB


책 <지금 이 순간의 역사>

영화 <1987>의 또 다른 메인 포스터에는 이런 문장이 적혀 있다. "한 사람이 죽고, 모든 것이 변화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어찌 보면 그 반대다. 역사의 모든 것이 변질되어 한 사람의 사망으로 귀결된 것은 아닐까. 사건이 맥락을 만들기도 하지만 역사적 맥락이 하나의 사건으로 '응축'되어 나타나기도 한다. 역사는 하나의 거대한 순환(cycle) 일지 모른다.

출처 http://extmovie.maxmovie.com


이미 7년 전인 2010년에 출간된 <지금 이 순간의 역사>는 통시적 관점에서 이러한 역사적 순환과정을 - 1980 광주항쟁과 1987 6월 항쟁을 기점으로 - 서술하고 있다. 그렇기에 책의 저자 한홍구 교수는 “모든 역사는 현재로 통한다”라고 말한다.


‘한홍구의 현대사 특강2’라는 부제가 붙은 이 책은 “1980년 광주항쟁 이후 2009년 노무현 대통령 서거까지 30년에 걸친 한국 현대사를 정리”하고 있다. 당시 이명박 정부에 의한 정권 교체 이후를 ‘민주주의의 후퇴’로 규정하면서 우리가 걸어온 민주화 과정들을 되짚어 볼 것을 주문한다. 특히 저자는 “광주를 이해하지 못하면 한국 현대사를 절대로 이해하지 못한다”고 강조한다. 지금의 한국 민주주의 현실을 규정지은 사건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최정운 교수의 말을 빌려 5.18 광주의 의미를 이렇게 전한다.


5.18은 우리 역사에서 하나의 사건이 아니다. 우리 역사를 다시 시작하게 만든 사건이며, 아울러 우리 모두에게 각자 새로운 역사를 만들게 한 사건이다
- p.20(최정운, <오월의 사회과학> 인용)    


사건은 맥락을 만들고 맥락은 사건을 만든다

영화 <1987>가 그려내고 있는 하나의 사건은 어떤 역사의 흐름을 응축하고 있는 것일까. 책 <지금 이 순간의 역사>를 따라가 보자.


1961년 5·16 쿠데타

박정희는 1961년 5월 16일 반란을 일으켜 권력을 장악했다. 이것이 흔히 말하는 5·16 쿠데타이다. 박정희는 쿠데타 이후 자신의 군정을 ‘민정으로 이양’하겠다는 약속을 깨고 1963년 대선에 나와 윤보선 후보를 제치고 당선된다. 그 이후 1967년 재선에 성공했다. 이후 헌법상 규정된 ‘대통령 중임제’에 막혀 권력의 꿀맛을 계속 맛볼 수 없게 되자 박정희는 국회 날치기 통과로 3선 개헌을 했고, 이렇게 해서 1971년 4월 대선에 나와 간신히 3선에 성공, 7월 2일 취임했다.    

  

1971년은 데모의 해였다. 의사들의 파업, 판사의 집단행동, ‘KAL 빌딩 방화 사건’이라 일컫는 노동자 폭동 등이 끊이지 않았다. 이에 1971년 말 박정희는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한다. 그리고 1972년 ‘7·4 남북 공동성명’을 발표하며 국민의 시선을 분산시키고는 중앙정보부 중심으로 ‘유신’이라는 종신 집권을 도모하였다. 저자의 말처럼 박정희는 “헌법은 전혀 아랑곳없이 국회를 해산하고 비상 국무회의에서 모든 일을 결정해서는 자기 마음대로 헌법을 만들었다”(p.26).      


그렇게 살벌한 1970년대를 지나며 학생운동은 맥을 못 추고 있었다. 그런데 1979년 8월 7일 ‘YH무역 농성사건’을 계기로 정세가 급변하기 시작했다. 이 사건은 가발제조회사인 YH사에 노조가 결성되자 사장이 임금을 떼어먹고 자취를 감추자 YH 노동자들이 호소할 곳이 없어 제1야당인 신민당사로 뛰어 들어간 사건이다. 그러나 이내 경찰이 당사로 난입해 강경 진압하는 과정에서 노동자 김경숙 씨가 사망하고 신민당 대변인이 코뼈가 부러지는 중상을 입었다. 당시 신민당 총재였던 김영삼이 강하게 반발하자 박정희는 “저거 잘라버려!”라는 한 마디로 일국의 야당 총재를 제명하는 사태가 벌어진다. 이에 김영삼 총재의 고향인 부산과 마산 일대에서 민심이 끓기 시작하고 이것이 1979년 10월 16일 ‘부마 민주항쟁’으로 폭발하면서 박정희 정권에 큰 위기가 닥치게 된다. 이에 박정희 정권은 부산 일대에 계엄령을 선포했다.   

 

1979년 10·26 사태와 12·12 쿠데타

이 과정에서 발생한 사건이 바로 ‘10·26 사태’라 불리는, 박정희의 오른팔이었던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박정희 대통령과 차지철 경호실장 등을 살해한 사건이다. 김재규는 왜 박정희를 쐈을까? <지금 이 순간의 역사>의 저자는 그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유신체제를 무너뜨리는 길은 이 길뿐”이었으며 김재규는 유신체제를 무너뜨려 대규모 유혈사태를 막으려 했다는 것이다.      


유신시대의 종말은 또 다른 정치적 혼란을 가져왔다. 유신이 끝나니 민주화 요구 세력과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유신세력이 충돌을 일으켰고 이런 혼란과 권력 공백 속에서 부상한 세력이 바로 ‘군세력’이었다. 당시 전권을 장악하고 있었던 참모총장 겸 계엄사령관이었던 정승화와 그 밑에 보안사령관이었던 전두환이 그 군세력의 중심에 있었다. 당시 권력 야심을 품었던 전두환을 가만 둘 수 없어 정승화가 그를 인사 조치하려 했다. 이에 전두환은 군부 내 영남 인맥 조직인 ‘하나회’를 이용해 하극상을 일으키고 상관인 정승화와 측근들을 체포하는 사태가 벌어진다. 우리는 이를 ‘12·12 쿠데타’, 또는 ‘12·12 군사반란’이라 부른다.


한편 10·26 사태로 박정희가 살해된 후 1979년 12월 21일부터 1980년 8월 16일까지 최규하 과도정부가 들어섰지만 사실상의 실권자는 12·12 쿠데타로 군부를 장악한 전두환이었다. 최규하 정부 출범 초기, 국민들이 민주화를 기대하던 시기를 ‘서울의 봄’이라 부르기도 한다. 하지만 실권이 없었던 최규하 정부는 민주화에 대한 아무런 계획도 없었고 야당은 끝없이 분열했다. 이른바 3김(김영삼, 김대중, 김종필)의 경쟁이 시작되었고, 군과 학생이라는 두 집단이 ‘유신체제 대 민주화’ 세력을 대표하며 첨예하게 대치하는 상황이 전개되었다.      


광주여, 광주여!

1980년 5월 한국의 정세는 요동을 치기 시작했다. 유신체제가 무너지면서 억눌려왔던 노동자와 학생의 ‘운동’이 들끓었다. 그 와중에서 거리로 나가자는 학생들과 학교 안에서 좀 더 역량을 키우자는 학생들 간의 논쟁이 있었다.      


그러다 5월 13일 일부 대학이 거리로 뛰쳐나갔다. 하지만 시민들의 반응은 뜨겁지 않았다. 상황이 어떻게 돌아갈지 모르는 불안한 상황 때문이었을까. 학생들은 다시 학교로 돌아갔지만 전두환의 ‘군인’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5월 17일 24시를 기해 제주도를 포함한 전국으로 비상계엄을 확대하고, 전국 대학에 휴교령을 내렸다”(p.41). 그리고 3김을 잡아들였다. 휴교령에도 데모 분위기가 고조된 곳은 광주뿐이었다. 이 이유를 저자는 김대중 씨를 체포한 사건이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5월 18일 광주에서 데모가 시작되고 이에 시민들도 길거리로 나왔다. 계엄군은 시민들을 두들겨 팼다. 이에 분노한 시민들은 21일 도청으로 모였는데 그날 정오쯤 갑자기 도청에서 애국가가 울려 퍼지더니 군인들이 총을 쏘기 시작한다. 시민들은 무기고를 부수고 총을 들었다. “시민들이 무장을 한” 것이다. 그러나 5월 27일 도청을 지켰던 시민들을 계엄군은 총을 쏘며 진압했고, 이렇게 1980년 광주 민주항쟁은 실패 아닌 승리, 승리 아닌 실패로 끝났다.      


당시 광주의 소식은 철저하게 외부로 알려지지 않았고 언론은 진실을 왜곡했다. 그 진실을 아는 사람들은 오로지 전라도 사람들과 운동권뿐이었다. 저자는 “그 진실을 아는 운동권들이 바로 광주의 자식으로 다시 태어난 사람들”이라고 서술하고 있다(p. 58). 그리고 이들 중 한 사람이 바로 노무현이었다.   

   

광주를 진압하고 전두환 일당은 1980년 5월 31일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를 출범시키고 신군부가 이미 수립해놓은 집권계획을 본격화하기 시작한다. ‘정치풍토쇄신을위한특별조치법’을 내걸고 구 정치인들의 정치활동을 금지했다. 이후 ‘친절한’ 전두환 정권은 군기관인 보안사 주도로 ‘민주정의당’이라는 새로운 정당을 만들었다. 그리고 전두환은 국가안전기획부(안기부, 중앙정보부의 후신)를 이용하여 구 정치인 중 말 잘 듣는 자들을 선별, 해금시켜 제1야당인 ‘민한당’을 만들었다. 제2야당으로 국민당도 만들었다. 짜고 치는 ‘다당제’ 정치판을 짠 것이다.     

 

하지만 전두환이 한국사회를 ‘자기 입맛에 맞는 체제’로 바꾸는 사이, 다른 한편에서는 대중이 “물밑에서 광주의 패배를 딛고 다시 일어나기 시작”했다. 1980년대 민주화운동의 전기가 되는 사건 중 하나는 1983년 5월 김영삼 씨의 단식 투쟁이다. 광주항쟁 3주년이 되는 날짜에 맞추어 시작된 이 단식은 재야 운동권이 다시 살아나는 계기가 되었다. 1983년 9월 재야의 반합법단체인 민청련이 결성되고 1985년 3월에는 재야 운동단체들이 연합한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이 출범하는 등 “재야가 하나의 진영으로 서기 시작”했고 1985년부터는 각 대학마다 학생회가 정식 활동을 시작했다.      


1987년 6월 항쟁과 이한열 열사

1980년 5·18 광주 민주항쟁 이후인 8월 전두환이 제11대 대통령으로 오르고 1981년 3월 3일 제5공화국 헌법에 의해 제12대 대통령으로 취임한다. 이후 전두환은  1987년 12월까지 8년간 집권을 하게 된다. 한편 이 기간은 양김(김영삼과 김대중)은 제12대 총선을 통해 정치의 핵심으로 등장하는 시기를 포함하고 있다.      


이 시기는 소위 ‘얼음 정국’ 시기였다. 1986년 10·28 건대항쟁 진압 이후 전두환은 '반제동맹당 사건'과 '마르크스-레닌주의당(이하 ML당) 사건' 등의 공안조작 사건들을 만들어냈다. 이 와중인  1987년 1월 14일, 서울대학교 언어학과 3학년 학생이던 박종철이 경찰에 연행되어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심문을 받다가 고문 때문에 사망했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대중들은 움직이기 시작했다. 박종철 사망 후 한 달 후인 2월 7일 박종철 군을 위한 전국 추도회가 개최되었고 이후 6월 10일 거대한 대중집회가 열리게 된 것이다. 이 시기를 다루면서 빠질 수 없는 사건이 바로 ‘이한열’ 군의 사망이다. 6·10 대회 전날인 6월 9일 연대생 이한열이 교문 앞에서 머리에 최루탄을 맞고 사경을 헤매다 결국 한 달 후인 7월 5일 세상을 떠났다.


영화 <1987>에 나오는 가공의 인물 연희(김태리 분)는 이렇게 말한다. "그런다고 세상이 바뀌어요?" 하지만 그렇게 생각했던 수 십만, 수 백만의 '연희'가 모여 새 역사를 만들었다. “청년의 무고한 죽음에 맞닥뜨린 보통 사람들은 그해 100℃의 온도로 끓어올랐다. 그리고 마침내 대한민국 민주화의 분수령이 된 6·29 선언(대통령 직선제 수용 선언)을 이끌어냈다”(시네21 제1137호, p.46). 책 <지금 이 순간의 역사>의 저자는 이것이 바로 '대중의 힘'임을 밝힌다.

대중이 움직이기가 쉽지 않습니다. 쉽지 않지만 한 번 움직이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는 힘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 p.128


1987년 '절반의 민주화'

1987년 6월 항쟁과 6·29 선언 이후 12월 16일, 드디어 국민이 직접 뽑는 대통령 선거가 실시되면서 한국의 ‘민주화’ 시대가 시작되었다. 하지만 1987년 시작된 민주화는 ‘절반의 민주화’였다. 12월 대선 직전 야당의 대표주자들이었던 양김의 대선 후보 단일화가 실패하는 등 야당의 분열로 정권 교체에 실패한 것이다. 이 덕분에 전두환의 후신인 노태우가 대통령으로 당선되면서 “민주주의에 물 먹이”는 상황이 도래했다.


저자는 특히 당시 민주화의 한계를 ‘3당 합당’에서 찾는다. 대선 이후 ‘5공 비리와 광주학살에 대한 국회 청문회’를 통한 과거 청산이 야 3당의 야합으로 유야무야 되고 결국 1990년 3당 합당으로 귀결되면서 과거 청산 문제는 물 건너가게 된 것이다. 다만, 당시 청문회에서 논리적이면서도 거침없는 자세로 ‘청문회 스타’가 된 노무현은 6월 항쟁이 낳은 하나의 성취라 할 수 있다.      


한홍구 교수는 노태우 시대를 지나 1992년 대선에서 당선된 김영삼 대통령의 ‘문민정부’가 이룩한 민주화에 대해 의문을 갖는다. 김영삼 대통령은 취임 이후 군대 사조직이었던 ‘하나회’를 해체하고 금융실명제 등을 실행하면서 긍정적 변화를 만들어냈다. 하지만 저자에 따르면, 김영삼 대통령은 “결코 민주주의를 자신의 내재적 가치로 추구했던 것은 아니”었으며(p.182), 민주주의를 집권을 위한 도구로 삼았다.   

   

여름에 진 인동초, 김대중 대통령 

책 <지금 이 순간의 역사>는 6월 항쟁 이후 민주화에 있어 그 절반의 성취는 1997년 이후 김대중 대통령과 노무현 대통령의 민주정권 10년이라고 말한다. 책을 따라 김대중 대통령의 삶을 간략하게 정리해보자.


김대중은 1924년 하의도에서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해방 전인 1944년 목포상고를 졸업하고 징병을 피하기 위해 해운회사를 들어갔다. 이후 목포 건국준비위원회, 조선신민당 가입 등 젊은 나이에 정치활동을 시작한다. 1961년 5월 14일 보궐선거에서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으나 바로 이틀 뒤 터진 5·16 군사쿠데타로 국회가 해산되면서 하루 국회의원으로 끝나는 해프닝에 그치고 말았다.  

    

독재 욕심을 버리지 못한 박정희의 1969년 3선 개헌 이후 김대중은 경쟁자였던 김영삼을 물리치고 야당 대표로 1971년 대선에 출마한다. 하지만 대통령을 두 번이나 한 박정희와 붙어서 46% 대 54%로 아깝게 대선에서 패하게 된다. 그러나 김대중은 일약 정계의 거물이 되었고 이에 위기감을 느낀 박정희의 탄압이 시작된다. 박정희가 1972년 유신쿠데타로 헌정질서를 짓밟자 당시 신병 차 일본에 있던 김대중은 반유신 활동을 펼치기 시작했다. 이에 박정희의 중앙정보부는 1973년 8월 8일 김대중을 납치했다.     

 

납치 후 기사회생한 김대중은 유신에 대한 저항을 멈추지 않았다. 1976년 3월 1일 명동에서의 3·1 민주구국선언으로 5년형을 선고받고 감옥에 갇혔다가 2년 8개월 만에 풀려난다. 그러나 나오자마자 가택연금에 처해지는 나는 수모를 겪었다. 이후 1979년 10·26 사태로 박정희가 살해되고 김대중은 가택연금에서 풀려 복권되었다.      


그러나 곧바로 전두환의 신군부가 군사쿠데타일으키면서 김대중을 다시 체포하였다. 이에 광주에서 김대중 석방을 요구하는 데모가 일어났고 이는 5·18 광주 민주항쟁으로 번지게 된 요인 중 하나가 되었다. 김대중은 2년 6개월 정도의 징역 이후 석방되었지만 전두환 정권은 정치를 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받고 그를 미국으로 보냈다. 1985년 2월 8일 귀국한 김대중은 곧바로 나흘 후의 2·12 총선에서 신민당 바람을 일으켰다. 이 시기는 민주화운동이 다시 불붙는 시기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후 1987년 12월 대선에 있어 양김씨가 분열하는 바람에 정권 교체를 통한 민주화에는 실패한 바 있다.      


1992년 김영삼의 문민정부 이후 1997년 대선에서 당선된 김대중 대통령을 한홍구 교수는 “이성계 이후로 변방에서 나와 중앙의 권력자가 된 것은 이 분이 처음”이라 평가한다. 한 교수에 따르면, 2000년 6월 남북정상회담을 위시한 햇볕정책, 벤처와 IT산업에 대한 투자 등은 김대중 대통령의 성과다. 그러나 대통령이 된 후 의회를 장악하지 못하고 IMF 외환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재벌개혁을 충실히 이루어내지 못하는 등 개혁다운 개혁을 하지 못한 점은 김대중 정권의 한계다.


아울러 한 교수는 김대중 정권 역시 “가신정치에 의한 정치적 권위주의”라는 한국 현대 정치사의 불행에서 자유롭지 못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김대중 대통령의 삶은 곧 한국 현대사”(p.242)였다는 점이다. 2009년 8월 18일 오후 1시 43분 숨을 거둔 김대중 전 대통령, 그의 삶은 추운 겨울에도 온갖 풍상(風霜)을 참고 이겨내는 인동초(忍冬草)에 비유되기도 한다.      


개천에서 난 마지막 용, 노무현

김대중 대통령에 이어 2003년 민주정권을 이어받은 이는 바로 1989년 5공비리 청문회 스타였던 ‘노무현’ 대통령이었다. 1988년 처음 국회의원에 당선되어 본격적인 정치활동을 시작한 노무현 대통령은 그야말로 개천에서 난 ‘용’이었다.  

    

대학도 못 나오고, 집안 별 볼일 없고, 처가는 좌익 전력이 있고, 현역으로 군대까지 갔다 오고, 그야말로 대한민국 하늘 아래서 개천에서 사는 조건은 다 갖추었습니다. - p.259     


하지만 개천의 용, 노무현 대통령은 ‘개천에서 난 용을 용인하지 않는 사회’를 견뎌내지 못했다. 노 대통령은 수구세력에게 빚지지 않고 당선된 유일한 대통령이지만 그렇기에 수구세력의 격렬한 저항을 받은 대통령이기도 하다. 2003년 취임 후 1년 3개월 만에 야당들의 단합으로 노무현 대통령 ‘탄핵안’이 가결되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급기야 퇴임 후 뇌물수수 직접 개입 의혹이 부상하면서 궁지에 몰리고 결국 노 대통령은 2009년 5월 23일 자택 뒷산인 봉화산 부엉이 바위에서 투신자살하는 비극적 결말을 역사에 남기고 떠났다.      


<지금 이 순간의 역사>에서 저자는 노무현 대통령이 서거한 후 가장 안타까운 것으로 ‘검찰 개혁을 못한 점’을 지적한다. 검사와의 대화도 했지만, “그때 검찰 개혁이 제대로 이루어졌으면 그렇게 돌아가시지 않았을” 것이다(p.290).


잠시 그 ‘검사와의 대화’를 기억해보자. 노무현 대통령은 취임 이후 내각 인사를 단행하면서 법무부 장관으로 강금실 변호사를 임명했다. 당시 검찰총장보다 10년쯤 아래였던 강금실 변호사를 법무부 장관으로 앉힌다는 것은 서열을 중시하는 검찰에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인사였다. 이에 2003년 3월 9일 노무현 대통령은 ‘검사와의 대화’를 시도하고 검찰 개혁의 당위성을 강조했지만 결과는 좋지 않았다. 전국에 생중계된 대화에서 일부 검사가 2002년 노 대통령이 부산지검 동부지청장에게 특정 사건과 관련해 전화를 걸었다는 의혹을 제기하자 노 대통령은 "이쯤 되면 막 가자는 거지요"라고 맞받는 등 (검찰과의) 골은 더 깊어졌다(프레시안, 2009.05.24. 자 기사, “‘이쯤 되면 막 가자는 거지요’를 기억하십니까”).     


한 교수의 말처럼, 노무현 대통령은 권력을 행사하지 않고 탈권위주의와 진정한 민주주의를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제도 개혁이 뒷받침되지 않아 노 대통령이 만든 여러 좋은 시스템이 다음 정권으로 이어지지 않고, 무용지물이 되었다(p.292). 비대해지는 검찰권을 견제하기 위해 ‘공직자 비리 수사처’ 신설 등 제도 개혁이 이루어졌어야 했다.    

  

이명박 정권, 다시 죽음의 시대에

2010년에 출간된 이 책 <지금 이 순간의 역사>는 당시 출범 2년을 맞이하는 이명박 정권을 “민주주의의 역주행”으로 평가하면서 이명박 정권으로 한국사회가 다시 권위주의 시절로 돌아가고 있음을 개탄한다. 2008년 쇠고기 파동으로 일어난 ‘촛불집회’를 공권력을 동원해 끄고 ‘용산참사’에서 보듯 경찰국가로 거듭나는 이명박 정권의 모습은 이러한 민주주의의 역주행을 보여주는 명백한 증거다.    

  

이러한 역주행의 원인은 무엇일까? 저자는 우선 기득권 보수 세력의 도덕적, 정치적 허약함을 지적한다.      

단 한 번도 제대로 과거와 단절한 경험이 없는 나라, 단 한 번도 지배층이 제대로 확 뒤집힌 적이 없는 나라에서 어떻게 자칭 보수세력이 이렇게 도덕적으로 허약하고 이렇게 정치적으로 무능하고 이토록 관용과는 담을 쌓고 살게 되었는지 참으로 놀라울 뿐입니다. 이명박 정권이 들어선 뒤 벌어지고 있는 온갖 역주행은 한국 기득권 세력의 도덕적, 정치적 허약함 때문입니다.
- p.12   


이러한 기득권 세력의 도덕적, 정치적 허약함을 일반 대중들도 답습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영화 <1987>의 김경찬 작가의 말을 들어보자.      


영화의 메인 테마는 6월 항쟁이지만 내가 이 영화를 통해서 보여주고 싶은 궁극적인 것은 직업윤리에 관한 이야기였다. 이명박, 박근혜 정권이 들어서면서 한국 사람들의 직업윤리가 깨지기 시작했다. 그전만 해도 어떤 윤리에서 벗어나는 행동을 할 때면 “우리가 이거 해도 돼? 안 되잖아” 이런 자기 점검이 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남들 다 하는데 뭐” 이러는 거다. 사람들의 윤리가 무너지는 게 눈으로 보이더라. 영화는 자기 직업윤리를 지키려는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대립하고 있는 구조다.
- 시네21, 제1137호 p.49     


한편, <지금 이 순간의 역사>는 이명박 정권으로 시작된 ‘민주주의의 역행’의 또 다른 근원으로 민주개혁진영의 역량 부족을 지적한다. “보수진영이 잘해서 정권을 되찾아 간 것이 아니라 민주개혁진영이 잘 못했기 때문에 대중의 마음을 잡지 못한 것”이라 해석한다(p.303). 민주주의가 밥 먹여주냐라는 질문에 민주개혁 진영이 제대로 답을 주지 못했기 때문에 정권을 내주게 된 것이다. 아울러 저자는 새로운 젊은 층과 함께 호흡하지 못한 진보진영의 ‘칙칙함’을 비판하고 있다. 1990년대, 2000년대 들어와서 대중의 욕구가 변해 가는데 진보가 따라가지 못하고 그런 욕망을 억압하려고만 한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민주개혁세력이나 진보진영은 새로운 젊은 층과 얼마만큼 호흡할 수 있었나요? 처음 촛불이 켜지고 아이들이 뛰쳐나올 때는 발랄함이 넘쳐났어요. 그랬다가 시민단체와 대책위에서 마이크를 잡으니까 어땠습니까? 다시 칙칙해졌어요. 재미없어졌습니다. 진보진영, 민주진영이 젊은 층의 발랄함과 대중의 자연스러운 욕구를 어떻게 공유할지를 고민해야 합니다.
- p.318     


2018이 바라보는 1980, 그리고 1987

1961년 5·16 쿠데타로 시작된 박정희의 독재정권과 이후의 유신정권, 그리고 1979년 10·26 사태로 인한 박정희의 사망. 그의 사망이 탄생시킨 또 다른 권위주의 독재자 전두환. 그에게 휘둘린 1980년대. 그 속에 1980년 5·18 광주 민주항쟁이 있었다. 비록 패배로 끝났지만 이 항쟁을 양분 삼아 ‘민주화 세력’이 자라났고, 1987년 6월 항쟁에서 민주화 세력은 열매를 맺는다. 6월 항쟁으로 대통령 직선제 개헌이 이루어졌고 흔히 얘기하는 ‘87년 체제’가 성립된 것이다. “광주에서의 처절하지만 장엄했던 패배가 이렇게 살아난 것이다”(p.129).      


하지만 완전히 살아나지는 못했다. 87년 체제 이후 야당의 분열로 정권 교체에 실패했고 1993년 김영삼 대통령은 ‘가신 정치’를 벗어나지 못했다. 1998년의 김대중 대통령도, 2003년의 노무현 대통령도 진정한 ‘제도 개혁’에 실패했다. 10년의 민주정권은 결국 2009년 이명박에게 정권을 내어주었고 우리는 다시 ‘민주주의의 역행’을 경험했다. 그리고 2012년 이후 박근혜 통해 우리는 ‘민주주의의 역행’ 뿐만 아니라 ‘국가의 부재’를 경험했다. 1980년대의 두 민주항쟁은 절반의 성취와 절반의 실패를 이룬 셈이다.      


하지만 2016년 한국의 대중들은 역사 속에 잠겨 있었던 1980년 5월의 광주 민주항쟁을 복기해 ‘촛불집회’로 부활시켰다. 영화 <1987> 김경찬 작가의 말처럼 “1987년 승리의 기억이 2016년 촛불시위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는 점도 명백한 사실이다.      


촛불집회로 탄생한 2017년의 문재인 정권은 ‘개헌’을 추진하고 ‘공직자 비리 수사처’ 신설 등 제도 개혁을 진행하고 있다. 기존의 모순들이 곧바로 사라질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바로 지금이 미흡했던 민주개혁진영의 노력을 보완할 수 있는 기회다. 동시에 도덕적, 정치적으로 허약했던 보수세력이 반성하는 기회임은 분명하다.      


한홍구 교수의 말처럼 “모든 역사는 과거에 일어난 일 자체라기보다는 현재의 관점에서 불러내고 해석한 과거”다. 그렇다면 2018년이 바라보는 1980년 5월의 민주항쟁과 1987년 6월 민주항쟁은 명백한 ‘승리’가 될 수 있을까. 아직은 모른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있다. 1987년 "그들선택이 세상을 바꾸"었던 것처럼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선택이 또다시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대중의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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