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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이크 타이프 Jan 17. 2023

[서평] 내 그림을 그리고 싶다.

일러스트레이터가 엮은 페이퍼 버전 '숏츠'

와르르 일상이 무너지는 것보다 무서운 것은 일상이 소리 없이 서서히 녹아내리는 것이다. 일상이 무너지는 건 이를테면, 이런 거다. 아무것도 하기 싫어 잔뜩 밀린 일을 놔두고 넷플릭스 스릴러 드라마를 1회부터 마지막 회까지 하루종일 정주행하는 것. 결국 일의 마감이 하루도 남지 않았음을 맞닥뜨렸을 때 나는 무너진다.  


일상이 녹아내리는 건 이를테면, 이런 거다. 하던 일이 하기 싫었던 것도 아니고, 성실히 일상의 임무들을 해나가던 중, 잠깐 머리를 식힐 겸 유튜브의 ‘숏츠’를 보기 시작한다. 어느덧 수 십 여개의 숏츠를 보고 나니 한 시간이 흘렀고, 집중력은 모두 흐트러졌다. 다시 일을 시작하려니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 다시 숏츠를 보고 또 한 시간이 흐른다. 시간이 녹아내린다. 몇 시간이 지나도 머릿속에 남은 게 없다.


 결국 오늘 마무리할 수 있었던 일을 끝마치지 못했다는 짜증이 몰려오고, 마음을 가라앉히겠다고 또다시 숏츠의 세상으로 빠져든다. 오늘의 반나절이 그렇게 녹아내린다. 남은 건 편두통뿐.


일상을 녹여버리는 유튜브의 ‘숏츠’에서 벗어나야 한다. 숏츠 금단 현상에 괴로움을 호소하는 사람들도 점차 늘어난다. 헤어 나와야 한다. 독서를 해보려 하지만 숏츠에 익숙해진 5초짜리 뇌가 한 페이지에 3~4분을 집중해야 하는 책 한 페이지에 쉽게 적응되진 않는다. 그렇다고 매일 같이 숏츠를 보며 시간을 녹여 없앨 수는 없다. 쉬운 책부터 시작해 보면 어떨까.


이럴 때 읽어볼 만한 책이 일러스트레이터인 먼지(Munge) 작가가 쓴 <내 그림을 그리고 싶다>이다. 손바닥만 한 크기의 책 속에 그림이 가득하다. 텍스트들은 간결하다. 5초 만에 한 페이지를 볼 수도 있다. 일종의 건전한 ‘페이퍼 버전 숏츠’라고도 볼 수 있다. 하지만 ‘그림’이라는 일관된 주제를 다양한 방식으로 보여주는 책이므로 아무 맥락도 없는 자극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유튜브 숏츠와는 차원이 다르다.


책의 작가는 그림 그리기가 무료한 일상을 구해줄 창의적 자극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창의적 자극은 그저 읽고, 보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를 자신의 것으로 직접 만들어가는 과정을 통해 얻어질 수 있다. 이를 위해 자신만의 드로잉 프로젝트를 시작해 보라고 작가는 권유한다.


작가는 책에서 ‘내 그림’을 만드는 다섯 단계를 소개하고 있다.

1. 리서치: 아무것도 안 떠오를 때, 이미지를 수집하고 무작정 그린다.

2. 관찰: 상상력 타령은 그만하고, ‘제대로’ 관찰하고 자신의 시선을 키워라.

3. 탐닉: 마음에 드는 소재에 파고들어 ‘내 것’으로 만들어보자.

4. 개발: 수집한 소스들을 활용해 결과물을 생산하라.

5. 기록과 저장: 이미 자신이 가진 것을 새롭게 개발하라.

책은 각 단계와 관련한 다양한 드로잉 작품을 보여준다. 작가는 ‘그릇’에 탐닉했고, 사람의 얼굴을 관찰했다. 무엇보다 인상적인 것은 작가가 그림을 대하는 ‘편안한’ 태도이다. 작가는 백색 스케치북에만 그림을 그린 것이 아니라, 우편 봉투, 포장지, 이면지 등 주변에서 흔히 접하고, 쉽게 버려버리는 것들에 그림을 그리고 ‘내 그림’을 담은 캔버스로 재탄생시킨다. 캐주얼하면서도 색다른 심상을 불러일으킨다.

일상을 녹여버리는 유튜브 숏츠에서 벗어나기 위해 나는 이 책을 당분간 책상 위, 눈에 띄는 곳에 두려 한다. 생각 없이 숏츠의 늪으로 빠져들라치면 이 책을 펴고 잠시 그림들을 보며, 간결하고 소박하게 쓰인 텍스트를 본다. 노트에 사람(오늘 식당에서 본 요리사)도 그려본다.정신이 한결 맑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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