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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활강

by 마이크 타이프

한강 작가의 노벨 문학상 시상을 계기로 많은 사람들이 독서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한강 작가의 책은 불티나게 팔려 품절이 되었고 서점은 사람들로 북적인다. 인스타그램엔 ‘나는 지금 책을 보고 있다’를 전시하는 사진들로 가득하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하나의 사사로운 - 그러나 흥미로운 - 논쟁이 수면 위로 떠오른다. 과시용 독서와 진짜 독서 사이의 긴장감이 논쟁의 핵심이다. 한강 작가의 쾌거에 힘입어 사람들이 책으로 달려들고 있지만 정작 책은 읽지 않고, ‘책을 읽고 있는 나’를 전시하기 바쁘다. 이에 대해 일부 사람들은 ‘과시용 독서’라고 비판한다. 하지만 또한편에서는 과시용 독서라 하더라도 독서 문화가 확산되는 분위기가 퍼지는 건 좋은 현상이라고 해석한다.


그런데 이 논쟁의 핵심은 과시용 독서 열풍이 진짜 독서, 이른바 찐 독서 활동으로 진화, 정착될 수 있느냐에 있다. 언론에서도 독서 열풍의 분위기를 잘 유지하고 확장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문제는 이러한 독서의 진화가 그리 쉽지는 않다는 데 있다. 과시용 독서는 취향의 영역이지만 ‘찐’ 독서는 기술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진짜 독서를 해야지 마음을 먹는다고 해서 독서가 되는 게 아니라는 얘기다.


사실 찐 독서, 그러니까 책이 나의 몸으로 들어오는 오감의 체험을 위해서는 몇 가지 조건과 노력이 필요하다. 맛있는 음식을 한 입 베어 물면 즉각 그 맛이 혀를 통해, 식도를 통해 전해져 체화되는 과정과는 사뭇 다르다. 책 속의 텍스트는 딱딱하고 퍽퍽할 뿐 아니라 씹어먹어도 무슨 맛인지 모를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몇 개 문장 씹어 읽어보고는 책을 덮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렇다면, 독서의 기술을 익혀 찐 독서의 세계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생각건대 두 가지 정도의 방법이 떠오른다.


첫째, 모든 기술이 다 그렇지만 독서 역시 ‘쉬운 책’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스키를 처음 배울 때 산꼭대기에서 활강을 시도하지는 않듯이 독서도 쉬운 독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가벼운 내용의 에세이를 읽어보는 건 어떨까. 촉촉하고 부드럽고 달콤해서 바닐라 아이스크림처럼, 마스카포네 치즈 케이크처럼 텍스트가 술술 읽힐 것이다.


한 가지 주의할 점은 이런 류의 에세이만 읽어서는 보다 강렬하고 짜릿한 독서 활강의 맛을 느낄 수 없다는 점이다. 쉬운 단어와 감정 형용사의 결합으로 맛을 낸 책들이다 보니 디저트로는 제격이지만 주식으로 삼기엔 다소 느끼하지 않겠나. 그래서 ‘가벼운 에세이 읽기’에서 머물면 초보 독서가를 벗어날 수 없다.


그렇다면 두 번째 방법은 독서의 기술을 좀 더 세련할 수 있는 방법이라 하겠다. 조금 읽기 어렵게 느껴지는 책 - 가령 마르틴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과 같은 - 을 골라 하루에 딱 한 페이지만 읽고 책을 덮어 버린다. 한 페이지만 읽기로 마음먹었기에 좀 어려워도 부담스럽지 않고, 어차피 한 페이지 읽기가 목표였으니 목표 달성의 기쁨도 누릴 수 있다.

혹자는 이렇게 물어볼 수 있겠다. 그렇게 한 페이지씩 읽으면 언제 한 권을 다 읽나요? 그렇게 오랫동안 책 한 권 붙들고 있으면 앞에 읽었던 내용이 기억이나 나겠어요? 지겨워서 더 안 읽겠네.


그럴 수 있다. 가령 앞에서 소개한 <존재와 시간>이 616페이지로 구성되어 있으니 한 권을 다 읽으려면 대략 2년 정도 걸린다는 계산이 나온다. 그리고 한숨이 나오겠지.

하지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모든 기술이 그러하듯 연습할수록 실력이 늘지 않는가? 매일 한 페이지 읽기를 거듭할수록 독자 자신이 소화할 수 있는 페이지의 크기 자체가 커진다.


사실 책에 새겨진 ‘페이지수’도 굉장히 임의적이다. 보통 책의 크기인 국배판(A5용지 크기)을 기준으로 만든 100페이지짜리 책을 국배판의 두 배 크기인 A4용지에 담으면 50페이지가 된다. 그것을 또 A4용지의 두 배 크기인 A3용지에 담으면 25페이지에 불과한 책이 된다. 결국 개별 독자가 받아들이는 ‘마음속 페이지’가 있기에 책의 페이지수는 그야말로 숫자에 불과하다.


어려운 책 한 페이지 읽기를 반복하다 보면 내 마음속 페이지가 점점 커져서 A5 —> A4 —> A3로 바뀐다. 그렇게 되면 <존재와 시간>의 616페이지는 어느 순간 154페이지로 줄어들 것이다. 154페이지라…해 볼만 하지 않은가?


그래도 까마득하게 느껴진다면, 마지막 방법, 내용은 어렵지만 책의 두께는 얇은 책으로 시작해 보는 걸 추천한다. 가령 버트란드 러셀의 190페이지짜리 <철학이란 무엇인가>는 어떤가. 책을 펴보면 더 만만하다. 페이지의 위 아래 좌 우 여백이 ‘겁나’ 넓어서 한 페이지에 인쇄된 텍스트의 양이 많지 않다. 국내에서 1977년에 나온 책이니 고전의 반열에 오른 책이라 “나는 고전을 읽는다”고 과시하기에도 좋다. 제목부터 딱 자랑하기 좋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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