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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이크 타이프 Feb 02. 2019

힘 좀 빼자

정당정치의 실종이 낳은 '투쟁' 문화

2017년 11월 12일부터 426일 동안 서울 양천구 서울에너지공사 75m 높이 굴뚝에서 농성해온 금속노조 파인텍지회 홍기탁 전 지회장과 박준호 사무장이, 두 해가 바뀐 2019년 1월 11일 무사히 땅을 밟았다. 두 사람은 땅에서 기다리던 동료와 시민들 품에 안겨 눈물을 흘렸다. 이들이 농성을 풀고 굴뚝에서 내려온 것은 노사 협상이 극적으로 타결된 덕이다. ... 합의 내용은 '최소 3년간 고용보장, 임금은 최저시급+1천원, 노동조합 활동 인정'이다. 


- 한겨레21 No. 1247, p.40.


좀 놀랐다. 한 노동자가 426일 동안 75m 굴뚝에서 고군분투한 결과가 고작 몇 년의 고용보장과 최저시급+1천원이라니. 사회적 약자가 사회에 작은 파동을 일으키기 위한 운동(movement)은 이렇게 눈물겹다. 


고공시위를 마친 두 사람에게 묻고 싶다. 과연 그 426일 간의 시위가 합리적인 선택이었는지. 회사와의 협상 타결을 위해 자신의 426일이란 인생의 큰 조각을 그렇게 희생해도 되는 것이었는지. 억울한 면이 있더라도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 이직 등 다른 길을 찾는 게 더 바람직하지 않았을까. 그들이 땅으로 내려와 흘린 눈물은 어떤 의미일까. 투쟁이 결실을 맺어 감격의 눈물을 흘린 것인가, 아니면 투쟁의 결과가 너무나 허망하여 흘린 슬픔의 눈물일까. 참 노동자의 모습을 실현하기 위해 이렇게까지 투사의 삶을 살아야 하는지. 다른 회사에서 2배, 3배의 연봉을 제시한다고 해도 파인텍의 노동자로 살 것인지. 그렇지 않다면 426일의 투쟁이 아닌 좀더 유연한 방법을 취했어야 하는 것은 아닌지. 국가를 위해, 회사를 위해, 노동조합을 위해서도 아닌 한 사람, 자신을 위해. 


이제 한국의 정치사회 담론에서 '농성', '투쟁' 따위의 대항적 운동(movement)이 사라졌으면 좋겠다. '단식투쟁'도 그 약발이 예전 같지 않다. 정치인들이 애용하는 다이어트 프로그램 정도가 된지 오래다. 삭발을 하고, 빨간 두건을 두르고, 두 주먹 불끈 쥐고 투쟁가를 부르는 노동자의 궐기를 더 이상 보지 않았으면 좋겠다. 사회적 약자가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 아직도 이런 서슬퍼런 극단적 행동을 해야만 한다는 사실은 분명 문제가 있다. 


이런 사회적 에너지 낭비를 막자고 '정당'이 있는 것 아닐까. 사회적 갈등들이 유통되는 통로로서 '정당'이 제 구실을 못하니 노동자가 공장 옥상에 올라가고, 장애인들이 거리에 드러 눕는다. 자신의 몸에 휘발유를 붓고 불을 붙인다. 사회적 갈등들을 표출하고 종합해서 세련된 방식으로 해결해야 할 제대로 된 '정당'이 없으니 억울한 이들은 극단적 방법을 통해 갈등을 사회화할 수 밖에 없다. 여전히 정당대표들은 툭하면 목숨을 건 '단식투쟁'으로 정치적 발언권을 높이려 한다. 하지만 단식투쟁으로 죽은 정치인을 나는 아직 보지 못했다. 

http://www.sisaweek.com/news/articleView.html?idxno=117898

그래, 힘 좀 빼자. 밥도 먹고, 머리도 예쁘게 기르고, 기름 한 방울 나지 않는 나라에서 휘발유는 자동차 굴릴 때만 사용하자. 단식 투쟁하지 말고 그냥 건강한 다이어트를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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